제263화
#70 바라 마지않는 복수 (3)
나는 남주현에게 청 과장에게서 얻어 낸 모든 정보를 넘겼다. 한조희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설록진의 밑에서 청 과장이 저지른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원래 흥신소를 운영할 때도 청 과장은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뢰인이 맡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법도 심심찮게 저지른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록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완전히 선을 넘는 인간은 아니었다.
납치, 살인, 시체 유기…….
청 과장의 입에서 쏟아진 일들에 한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정신으로는 차마 전부 입에 담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한서현은 자리를 뜨는 대신, 그 말들을 모두 꾸역꾸역 들었다.
청 과장이 죽기 전 우리는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그중에 설록진에게 치명적인 정보는 없었다.
청 과장은 그 어떤 증거도 남겨 놓지 않았다. 설록진이 아니라 다른 고객이었다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고객의 약점을 잡을 생각을 했겠지만, 상대는 설록진이었다. 언제든 자신의 머릿속을 뒤적거릴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 청 과장은 도박을 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따지자면 청 과장이 살아 있는 증거인 셈이지만, 우리는 청 과장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살려 줘도 제대로 된 증거로 쓰이기도 전에 죽을 게 뻔하고.
내가 진실을 아는 것과 세상이 진실을 믿게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가 아는 진실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이걸로는 한순간의 노이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은데요. 사람들은 이 정보를 신뢰하지 않을 거예요. 기껏해야 음모론자라는 소리나 듣겠죠.」
그 말에도 나는 일을 진행해 달라고 말했다.
남주현의 말대로 우리가 뿌린 정보는 유의미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남주현이 기껏 뿌려 놓았던 정보는 곧 사라져 어느 순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상황을 전해 들은 한서현은 분노했다.
“어떻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죠?”
“그야, 증거가 없으니까.”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이길까 말까 한 판이다. 아니,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있어도 이런 방법으로는 설록진을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
“내가 말했잖아. 정의로운 방법으로는 절대 설록진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설록진에게 아티팩트를 채우고, 그를 무력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진실 따위로는 설록진을 공격할 수 없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진실을 잊게 될 테니까.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한서현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이런 짓까지 벌였음에도 매정한 세상에 새삼 상처라도 받은 것일까.
나는 한서현을 향해 말했다.
“이 세상 사람 아무도 몰라도, 설록진은 알 거야. 제 얼굴에 우리가 뭘 던졌는지.”
그게 문제다. 우리의 선전포고에 설록진이 어떻게 반응할지.
* * *
여당 중앙당사 앞에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가 놓인 상황. 그들이 언론을 통제하기도 전에 시체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게 문제였다.
뒤이어 터지는 여러 가지 기사들은 막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SNS에 유출된 사진을 완전히 막는다는 건 어려웠다.
결국 미리내당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해당 건은 기사화되어 사람들에게 퍼졌다.
끔찍하게 살해된 채로 여당의 중앙당사에 버려진 40대 남성에 대한 뉴스는 곧 대한민국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리내당의 압박으로 내용은 축소되고 보도의 질은 낮아졌다. 당연한 일이다.
잘못된 주인을 모신 죄라는 말은, 미리내당의 의원을 정면으로 저격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짓을 저지른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인이 미리내당의 의원에게 무언가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
그 말에 미리내당의 사람들은 저마다 추측을 꺼내 놓았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건, 이 일을 저지른 게 벨츠머츠일 거라는 추측이었다.
당장 미리내당 소속의 김성득 의원이 비슷한 꼴로 살해되지 않았는가. 솔직히 그 녀석들이 아니라면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없기야 했다.
간혹 다른 의견을 꺼내는 이도 있었다.
“혹시 벨츠머츠의 소행인 척 야당에서 저희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의견은 곧바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도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인간들은 아니지 않나?”
그냥 살해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를 겨우 정쟁에 이용할 정도로 타락한 인간들이던가? 뒤로 더러운 짓을 저지르면 몰라, 이런 일을 저지를 정도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럴 만한 이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국회에서는 언제나 치고받고 싸우지만, 물밑에서는 여당과 야당은 어느 정도 합의를 이끌어 낸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평화를 깨고 이런 식으로 상대의 뺨을 갈긴다?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이미 대세는 여당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죽기 싫으면 협력해야만 했다. 겉으로는 고고하게 굴면서 저 더러운 작자들과는 다르다고 소리를 쳐 대도 얇은 도금을 벗겨 내면 결국 똑같은 꼴이라는 거다.
“CCTV 영상은?”
“이번에는 주변 CCTV가 전부 뭐에라도 쓰인 듯이 먹통이 돼서요.”
“그것 또한…….”
“김성득 의원님 때하고 같죠.”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빙긋 미소를 짓고 있는 설록진을 본 사람들의 표정에 안도가 서렸다.
“설의원!”
“어제 여기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면서요?”
“그래, 뉴스 봤는가?”
나이는 이 중에서 제일 어리지만, 미리내당의 의원들 누구도 설록진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들 무슨 얘기 중이셨나요?”
“당연히 어제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측하고 있었지.”
“혹시 뭐, 이 건에 대해서 아는 건…….”
그 말에 설록진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 일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물론 아니지.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인터넷에 설의원과 관련된 무슨 헛소리가 떠돌았다고…….”
그 말에도 설록진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흔들림 없는 표정에 말을 꺼낸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물론, 헛소리지!”
남자의 필사적인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황급히 말을 얹었다.
“우리 설의원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있나.”
“그냥, 설의원 잘 나가는 게 아니꼬운 놈들이 이때다 싶어서 기사를 푸는 거겠지.”
“그래, 원래 여당 의원을 향한 이런 원론적 공격이야 언제나 있어 왔고.”
설록진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나서 설록진의 변호를 해 댔다. 이 상황을 기이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설록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경찰은 뭘 하고 있습니까? 이번 일의 범인을 잡아야 하는 건 그쪽이 아닙니까?”
“아, 안 그래도 그 각범부에서 사람이 나왔어.”
설록진은 사람들의 안내를 따라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남자들의 말대로 현장은 이미 각범부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통제를 받고 있었다. 경찰통제선 안쪽에 선 30대 중후반의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옆에 선 남자에게 말을 던지고 있었다.
“유채린 씨는 언제 온대?”
“아, 이번 주말까지는 휴가라고 해서요.”
“젠장, 휴가? 장난해?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휴가가 대수야?”
“정신적 피로가 심한 일이라 주기적으로 휴가가 필요하대요. 휴가 기간에는 아무 일도 맡지 않는대요. 시리우스 사건도 맡지 않겠다고 도망을 갔다던데, 저희 사건은 그거보다 훨씬 심하기까지 하니, 절대로 안 올걸요.”
김용원의 말에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 송천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사정을 우리가 알아줘야 해?”
사물이나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을 읽는 사이코메트리라는 능력의 특징상, 끔찍한 사고일수록 정신에 부담이 되기 마련이었다. 김성득 의원 사건 때도 유채린은 심각한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며 무려 2주간 휴가를 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시체는, 그때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았다. 유채린으로서는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사정을 각범부에서 알아줄 필요는 없었다.
“오늘 안으로는 무조건 오라고 해. 이 건이 제일 긴급하다고. 아니면 내가 네 목을 딸 테니까, 직접 찾아가서 끌고 오든, 어쩌든 오늘 안으로는 꼭 데리고 오라고.”
송천길 팀장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번 일의 범인을 알아내는 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이걸 해결해야만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질 수 있었다. 1팀이 유명무실해진 지금이 기회였다. 진정한 각범부의 실세가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한방이 필요했다.
“다들 수고가 많으십니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송천길은 고개를 돌렸다. 미리내당의 설록진 의원이 서 있었다.
“오, 안녕, 안녕하세요.”
김용원은 삐거덕거리며 설록진의 인사를 받았다. 그 한심한 꼴에 송천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보를 잘 정리하는 놈이라 이번 일에 불렀는데 보고 있을수록 속만 터졌다.
“이번 일 수사 때문에 오신 겁니까?”
“네, 아, 저는 각범부 2팀 소속 송천길이라고 합니다.”
설록진은 짧게 송천길 팀장을 눈에 담았다. 곧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설록진입니다. 제 이름은 이미 아실 것 같지만요.”
“하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분이 없는 분 아니십니까.”
송천길은 부드럽게 그 말을 받았다.
“당사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예, 아무래도.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가지 않네요. 부디 수사가 잘 진행되어 범인이 잡혔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송천길 팀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보다 몇 살은 어린 남자인데도, 여태까지 만난 그 어떤 의원들보다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온화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송천길은 알고 있었다.
이런 타입이야말로 제일 위험하다는걸.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협조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설록진의 눈짓에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이 황급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송천길에게 건넸다. 송천길은 그 명함을 잘 챙겨 넣었다.
자리를 뜨려던 설록진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누가 필요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유채린 씨?”
“네, 맞습니다.”
“부디 그분께서 이곳에 와 줬으면 좋겠네요.”
어딘가 찜찜하게 느껴지는 그 말에 송천길은 미간을 좁혔다.
“어, 팀장님! 이쪽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 찜찜함은 곧 사라졌지만 말이다.
* * *
정신과 상담을 마치고 나온 유채린은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자동차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그녀도 이름과 로고는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고급 브랜드의 외제 차였다.
그녀의 앞에 멈춰선 건 우연일까. 유채린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지만, 자동차는 그녀의 옆을 천천히 따라왔다.
결국, 유채린은 걸음을 멈췄다. 가방 끝에 매달린 열쇠고리를 꼭 잡은 채로, 유채린은 옆을 바라보았다.
까맣게 선팅이 된 운전석의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꿀꺽, 침을 삼키며 유채린은 열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 미리내당의 설록진 의원.
“서, 설록진 의원님?”
언제나 운전기사와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닐 만한 사람이, 직접 자동차를 몰고 그녀를 보러 왔다고?
“일단 옆에 타실래요?”
아무리 설록진이라고 해도,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사람의 차에 함부로 탄다는 건 그녀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채린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설록진의 차 안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