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66 나아간다는 것 (3)
훈련이 끝난 밤, 나는 벨츠머츠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 회의래 봤자 별거 없다. 부엌에서 식사를 마치고 한 열 걸음 걸어서 거실에 앉으면 그게 회의의 시작이었으니까.
“에드워드는?”
“책 읽는대. 한글을 가르쳐 줬더니, 요새는 동화책 위주로 열심히 읽고 있어.”
“어째 영어를 배우는 것보다, 저쪽이 한국말을 배우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은데.”
차송진은 김재호와 한서현 쪽을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두 불량 학생 때문에 못 해 먹겠다는 얼굴이다. 한국말도 겨우 하는 김재호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서현이?
“영어만 보면 뇌가 멎어 버리는 걸 어떡해요. 그냥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웠으면 좋겠다고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한서현의 얼굴에는 야망이 가득했다.
꼭 세계 일짱이 되어야지, 세계 일짱이 되어서 한국어를 세계 공용어로 만들고 말 테야. 하는 듯한 마음의 소리가 들린달까.
“나는 영어 공부 재밌던데.”
차송진의 말에 곧바로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 형이나 그렇겠죠.”
“그래도 에드워드가 가르쳐 주는 건 제법 잘 하지 않아?”
그 말에는 한서현도 무어라 부정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 에드워드의 수업이 괜찮았거든.
이것도 의외였지. 에드워드는 은근히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 딱 눈높이 교육을 해 준달까. 귀여운 걸 좋아하는 김재호에게는 귀여운 캐릭터를 내밀며 눈을 현혹시켰고 한서현에게는 해외 여러 가지 언론 소식을 번역해 주며 접근했다.
은근히 대화를 좋아하는 차송진과는 회화 위주의 수업을 했고.
나야, 목숨이 걸린 일대일 과외였어서 사실 어떻게 배웠는지도 잘 기억도 안 나니 존과의 수업과의 비교는 어렵지만, 확실히 에드워드의 수업은 제법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재호는 뭘 가르치고 있어?”
다들 뭘 가르치는 동안 김재호만 혼자 아무것도 안 하면 서운할 것 같아서 무어라도 배워두라고 한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대답한 건 김재호가 아니라 한서현이었다.
“요새는 송진이 형한테 여러 가지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죠. 전혀 소화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야, 재호가 말, 말도 안 되게 움직이니까 그렇지!”
“형 움직임도 말이 안 되긴 하던데요.”
바람에 팔랑이듯 허공에 펄럭이던 차송진의 몸짓을 떠올린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툭툭 차송진의 어깨를 두들긴 내가 말했다.
“앞으로 운동 열심히 하자.”
“으윽.”
차송진은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자신의 체력이 부족하다는 건 요 며칠 훈련으로 뼈에 새겨졌을 테니까.
“그나저나 오늘 회의를 연 이유가 뭔데.”
“뭔가 송진이 형한테 정식으로 우리 벨츠머츠에 입단하겠다는 말을 못 들은 것 같아서.”
“아, 그, 그랬나?”
차송진이 볼을 붉히며 말했다.
“이미 난 너희 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잖아. 너희 목표도 다 이해한다고.”
“앞으로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면서도, 말이지.”
“응.”
“그럼 이제 형은, 음, 정식으로 우리 벨츠머츠, 어, 사람이 된 것으로.”
큼큼, 헛기침을 내뱉은 내게 한서현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게 최선이에요?”
“이, 이보다 더 어떻게 잘 말하라고.”
“우리 벨츠머츠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이 정도는 돼야죠.”
“와아아!”
뒤에서 김재호가 손뼉을 뻑뻑 쳤다. 그러게, 제대로 된 입단식이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행사라면 지겹게 다녔을 녀석이, 정말로 이게 최선이냐?
‘그런 행사를 따라 하기는 죽어도 싫으니까요. 그럴싸한 케이크를 가운데에 두고 헛소리나 하다가 손뼉이나 치는 행사들이랑, 예? 우리 벨츠머츠의 입단식이 같을 순 없잖습니까.’
차라리 도원결의를 따라 할 걸 그랬나. 복숭아나무까지는 무리여도, 산에 나무가 많긴 한데…….
아니, 암만 그래도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으리!’라니, 너무 야만적이야.
━뭐가 됐든 이보다는 나았을 것 같다만.
‘예에.’
아무래도 너무 준비성이 없었다. 다음에는 플래카드라도 만들어 둬야겠다.
“그럼 이제 형의 닉네임부터 정해 보자.”
“……니, 닉네임?”
“그래, 앞으로 활동할 때 차송진이라는 이름 석 자로 돌아다닐 순 없잖아. 혹시 모르니까 바깥에서 통할 형의 이름을 만들어 둬야 한다고.”
“그냥 벨츠머츠의 일원으로는 안 되는 거야? 뉴스에서도 벨츠머츠의 누구누구라고 뜬 기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으윽, 바른말을 하다니! 하긴, 우리가 정한 닉네임은 거의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다른 빌런 조직이랑 어, 엮일 수도 있고 말이지. 각자 그런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을 한 차송진에게 내가 말했다.
“게다가 우리가 밖에 나가서 대놓고 송진이 형, 이렇게 부를 순 없잖아. 어? 누가 딱 형 알아보고 바로 수배 때려 버리면 어떡하냐고.”
나도 이게 제법 낯부끄러운 짓이라는 건 안다. 그래도 어떡하나!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건 익명성인걸.
“처음 딱 한 번만 부끄러워하면 돼요.”
한서현이 그렇게 말하며 차송진의 어깨를 도닥였다. 아니, 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것도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말이다.
‘그러게요.’
하지만 여기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간 한서현에게 응징을 받을 수도 있으므로 조용히 입을 닫아야겠다. 눈을 굴린 차송진이 우리를 향해 물었다.
“다들 닉네임이 어떻게 되는데?”
“나는 션.”
“션? 너무 미국 이름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이름 끝에 있는 신(神)을 중국식으로 읽은 거야.”
“왜 하필 중국이었어?”
“으음, 그 얘기를 하자면 긴데……. 짧게 줄이자면 내 이름을 꼭 알려 주고 싶은 사람이 중국인이었어서.”
“오, 그게 누군데?”
차송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형이 기대하는 그런 러브스토리 같은 거 없어요. 자기한테 꼭 복수하러 오라며 이름을 알려 준 거니까.”
“으응?”
“쑤어하오주거든, 그 대상이.”
“그, 자기 아빠가 살해당했다고 말했던 그 여자애?”
차송진의 질린 듯한 눈빛에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이쪽은, 토트.”
“죽음이라는 뜻의 독일어예요. 우리 조직 이름도 독일 쪽에서 왔다길래, 대충 저도 그렇게 지었어요.”
“대충이라기엔 너무 본격적인 이름인데……. 그럼 재호는?”
“재호는…….”
차송진의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재호다.”
“어? 조금 전에 자기 실명을 그대로 쓰는 건 안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자기를 다르게 부르면 안 된다잖아. 자기 이름은 무조건 김재호여야겠다는데 어떡해.”
“재호는 재호다.”
김재호의 고집엔 손발을 다 들었다.
“하지만 형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잖아, 응?”
내 간절한 눈빛에 차송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 당장 제대로 떠오르는 이름이 없는데.”
“뭐든 좋으니까.”
“으음.”
한참을 끙끙대던 차송진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는 텔레포터잖아. 그러니까 줄여서 포터라든가.”
“오, 포터라는 닉네임을 쓰면서 순간 이동을 하는 능력자라…….”
뭐지, 이 알 수 없는 한기는. 절대로 이 이름을 써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뭐지.
“이, 이건 안 되겠는걸.”
“그쪽은 션이잖아!”
“포터는 안 된다, 포터는!”
한서현은 유치한 싸움박질을 시작한 우리 둘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그냥 대충 지으면 되는 걸 가지고 말이야. 안 그래, 재호 형?”
“너도 너무 복잡하다. 그냥 서현이 하지.”
“……그건 안 되지, 형.”
“왜?”
“……아니야, 형. 그냥 구경이나 하자.”
* * *
우여곡절 끝에 차송진의 닉네임을 정한 날, 나는 금박사에게로 향했다. 나를 영 마뜩잖은 눈으로 반긴 금박사는 내가 전한 새로운 소식에 금세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벨츠머츠 멤버가 한 명이 더 생겼다고?”
“예, 임시 객식구도 하나 생겼고요. 객식구를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뭐. 일단 이래저래 물건이 많이 필요해져서요.”
“사람을 자꾸 어디서 그렇게 주워 오는 거야?”
금박사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도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어딜 돌아다닐 때마다 자꾸 새로운 사람이 생기는 걸 어떡하나.
“하긴, 제대로 된 전대물을 찍으려면 셋은 너무 적긴 했어.”
“예? 무슨 소리를…….”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말한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리를 했냐고 내가 되묻기도 전에 금박사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래서 새로운 애는 어떤데?”
나는 차송진의 능력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닉네임도.
“익스예요. escape에서 따온 거고.”
한참을 끙끙거리던 끝에 차송진이 짜낸 닉네임은 저랬다. 저걸 들은 한서현이 ‘사대주의’네, 뭐네 말했지만. 그러는 본인도 외국어를 닉네임으로 정하지 않았냐고 되묻자 입을 꾹 다물더라.
원래는 목적지라는 뜻의 destination으로 하려고 했단다. 근데 앞 글자 두 개를 줄이면 ‘데스’가 돼 버리는 탓에 우리 팀의 죽음 집착증 한서현이 자신과 콘셉트가 겹친다며 화를 냈다.
그 데스가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의미로 익스. 사실, 그 단어를 내뱉는 차송진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닉네임을 정하고 쉬고 싶단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도 무어라 말하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가면에는 ‘X’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던데요.”
당연히 차송진 몫의 아이템도 금박사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금박사는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그나저나 비전투원이라니. 이런 멤버는 처음이네. 조금 더 독특한 아이템이 필요하겠어.”
“……무슨 짓을 하려고요?”
“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뭐, 이렇게 말하는데 내게 해가 될 일은 없겠지. 그리고 금박사에게 부탁할 건 또 있었다.
“혹시 정신계 재능을 막을 수 있는 아티팩트를 구할 수 있을까요?”
“음, 한번 찾아보면 있기야 할 테지만. 그런 건 가격대가 엄청날 텐데?”
나는 미리 한서현에게 받아 왔던 달러를 우르르 엎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이 돈은 어디서, 아니, 말하지 마.”
척, 연극적으로 손을 치켜든 금박사가 말했다.
“난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거든.”
“포즈는 멋진데 말은 영 그러네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야. 하하, 나는 누가 고문의 ‘ㄱ’자만 꺼내도 줄줄 불어 버릴 거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너무 깊은 비밀을 알려 주진 말라고.”
“그것참, 안심되는 말이네요.”
내 몇 안 되는 협력자가 바람에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입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새삼 다행이랄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더? 아주 오랜만에 왔다고 내 등골을 다 빼먹으려 드는구나. 어디 한번 말해 봐.”
“휴대폰이 더 필요해요. 그리고 휴대폰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큼큼 헛기침을 내뱉은 내가 금박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혹시 휴대폰 요금도 그쪽이 다 내주고 있었던 겁니까?”
“응, 아. 그럴걸? 그냥 차명 계좌에서 자동 이체해 놓고 있어서 몰랐는데. 왜?”
“그 폰으로 모바일 게임 현질 해도…….”
젠장, 막상 말로 하려니 얼굴이 다 빨개진다. 나는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
“천, 천장까지 80연차인가 뭐 그렇대서요. 아니, 뭐, 그쪽으로 나가는 돈이 영 그러면 내가 돈을 내도 되니까요. 그거 게임 현질 해도 돼요, 안 돼요?”
내 질문에 금박사가 조용해졌다. 그렇지, 아무래도 좀 그래. 빌런 조직을 뒤에서 돕는다는 것도 좀 그런데, 와중에 게임 현질 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거. 좀 모양이 그렇잖아?
“역시 좀 그렇…….”
“무슨 게임 하는데? 뭐 하는데! 앙코르◆보이즈? 베이스 볼 스타즈?”
“예?”
“그것도 아니면 역시 그건가? 포켓소녀? 아니지, 천장까지 80연? 그럼 그 게임밖에 없는데, 마이티 걸스?”
“아.”
쉽사리 게임 이름을 내뱉지 못하는 나에게 자기는 동료라며, 그 어떤 취향이든지 이해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금박사를 피해 나는 겨우 그 던전 같은 집구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으…….”
정말 최악이야. 나는 남주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