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65 죄의 무게 (6)
“여태까지 죄의 무게가 똑같은 줄 알았어요?”
홍난희의 질문에 도채희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저 위에 있는 천국에서는 어쩌면 죄의 무게가 똑같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죠.”
그 말에 도채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산이 왜 간절히 이 아이를 위한 도움을 찾았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김현기는 정말로, 이런 상황을 스스로 택하려고 했던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모두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이곳까지 몰리게 된 아이니까.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희생자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죄를 지은 사실도 지워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무시한 채로 이 아이의 죗값을 재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 아닌가.
“기꺼이 죄를 지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은 사람은 다르다는 뜻이죠?”
도채희의 말에 홍난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쪽도 맞기 한데. 그건 너무 동화 속 얘기고…….”
“다른 의미도 있단 말인가요?”
“소위 말해 있는 분들의 죄는 다들 손을 뻗어서 거두어 주거든. 힘이 있는 친구가, 최고의 변호인단이, 그리고 타락한 이 사법부가. 그렇게 해서 남는 죗값은 턱없이 가벼워.”
홍난희는 그런 상황을 몇 번이나 마주했다. 있는 자들의 죄가 어떻게 가벼워지는지를. 자신 또한 그 기꺼이 그들의 죄를 거두어 주는 사람 중의 하나였으므로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없는 자의 죄는 아무도 거두어 주지 않아요. 기껏해야 국가에서 매칭해 주는 국선 변호사뿐이야. 물론, 국선 변호사 전부가 성의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기꺼이 죄의 무게를 나눠질 만큼 열심인 사람이 없다는 거지.”
그렇게 해서 결과로 남는 죄는…….
“언제나 가난한 자의 죄가 무거운 건 그 때문이죠. 아무도 거둬 주질 않았기 때문에. 김현기 그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우연히 마음씨가 좋은 경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경찰관에게 한가한 경찰관 친구가 있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성질이 더러운 한 변호사의 밑에서 기꺼이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김현기의 죄 또한 무겁게 남았을 거다. 그리고 무거운 죄를 김현기 혼자 짊어져야 했겠지.
도채희의 표정을 본 홍난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일 하다 보면 성질이 더러워진다니까.”
* * *
나는 거실을 보며 감탄했다. 확실히 전문가(?)의 손길은 다르구만.
시꺼멓던 벽지는 회색빛으로 바뀌었고 중간중간 원목 가구와 식물들도 들어왔다. 식물들마다 머리 위에 식물용 조명들을 배치해 엄청나게 화사해졌다.
채광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채광이 엄청 좋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달까.
“명색이 빌런 기지인데 이렇게 모델하우스처럼 반짝거려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어? 그리고 식물들은 다 뭐냐. 쓸데없이 생기가 넘치잖아. 바로 옆에 언데드 실험실이 있는데 거실이 이렇게 싱그러운 건, 뭐냐, 그 조화롭지도 않고…….”
물론 그렇게 투덜거리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 이게 우리 집?”
한서현마저 이렇게 말할 정도였고, 차송진은 연신 따봉을 날리고 있었으며, 김재호는…….
“어어, 그거 먹는 거 아니다.”
“안 먹어. 나도 이거 안 먹는 거라는 거 알아.”
식물이 신기한 듯 화분에 코를 박고 식물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를 빼고 반응이 이렇게나 좋다니.
크윽, 이렇게 된 거 나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보도록 할까.
━조금 전까지 간장 종지만큼 좁은 마음으로 거실을 깎아내렸던 주제에 잘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끙! 제가 조금 속이 좁게 굴었던 건 인정하겠습니다만, 아니, 아주 틀린 소리도 없지 않았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그래도 아쉽네요. 처음으로 좀 내 마음대로 꾸민 데라 애정이 있었는데.’
━처음이라니? 전에도 혼자 살지 않았냐?
‘아, 전생에서 살았던 집 말하는 겁니까? 거긴 처음부터 끝까지 설록진 취향이었는데요.’
당연하지 않은가. 애초에 설록진 명의로 된, 설록진이 보낸 사람들이 관리해 주는 집이었는데. 인테리어를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묻긴 했지만, 결국 세세한 건 모두 설록진이 관여했지.
‘설록진은 나름 개집 꾸미기에 진심이었거든요.’
개집이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하긴 했지만. 그때에는 참 뭐 하나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었는데.
‘아직도 인테리어 망가진다면서 안마 의자를 못 사게 한 건 화가 나네요. 거실 뷰가 망쳐진다나. 정 안마를 받고 싶은 거면 차라리 마사지 샵에나 다니라며 샵 이용권을 끊어 주긴 했는데,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막상 느긋하게 마사지 받을 시간이 없었단 말입니다.’
━……마사지 샵도 다녔냐?
‘못 다녔다니까요?’
도대체 내 얘기를 제대로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나는 레이의 말을 뒤로 하고 마저 집안을 살폈다. 내가 문에 달아 놨던 가지각색의 명패들은 안타깝지만 인테리어를 해친다는 이유로 모두 제거되었다.
최소한의 가구만 있던 차송진의 방도 이제는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네 방보다 나은데?
‘그러게요.’
확실히 에드워드와 상담 끝에 꾸며 둔 방이라 그런지, 태가 달랐다. 기본적으로 보라색과 푸른색 계열로 꾸며진 방 안은 차송진의 성격처럼 정갈했다.
에드워드의 방 안은 붉은색이 눈에 확 띄었다. 거기에 초록색도. 보기만 해도 정신없는 색의 조합이었지만,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이게 바로 재능이라는 걸까.
[잘했네.]
“응, 응!”
지금 한국어로 대답한 건가! 가슴이 뭉클……하기는 무슨.
“응은 반말이고, 인마!”
내 말에 한서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존댓말은 이상하게 못 알아듣는 척하던데, 아무래도 알아듣고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닐까요?”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차송진이 말했다.
“그리고 따지자면 에드워드가 너보다 연상이니까, 존댓말은 안 해도 되는 거 아닐까?”
차송진의 말에 나는 깨달았다. 만약 둘 중 존댓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라는 사실을. 그랬지, 참. 왠지 나보다 한참은 더 어리게 느껴진단 말이지.
크흠, 어쨌거나 인테리어를 바꾸는 일도 끝났겠다. 정호산 쪽의 근황도 확인했겠다.
이제는 다시 벨츠머츠의 일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당장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가장 급한 건 아무래도…….
우리 쪽의 전력을 확인하는 일이겠지.
“다들 훈련실로 모이라고 해.”
“후, 훈련실?”
내 말에 차송진이 벌벌 떨었다.
“그래, 제대로 훈련실에서 훈련해 본 지도 오래됐잖아.”
“나도 가야 하는 건가?”
차송진의 말에 내가 눈을 부릅떴다.
“형이야말로 제일 훈련이 필요한 사람이잖아! 제일 약하면서.”
“……그냥 나는 이대로 살면 안 될까. 아, 안전한 데에 콕 박혀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안 돼! 우리가 적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지켜 줄 수 없을 때 누군가 형을 덮치면 어떻게 해? 그냥 잡혀갈 거야?”
내 말에 차송진은 기가 질린 얼굴로 작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리 전투조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 하나쯤은 마련해 둬야 했다. 아티팩트를 둘둘 달아 놓는다고 해도, 그걸 써먹는 사람이 부실하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말이지.
“기본적인 호신술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그리고 그 호신술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체력과 근력이 필요하다고.”
쯧, 나는 차송진의 가느다란 팔뚝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런 팔뚝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건지.
일단 차송진은 기초 체력 훈련 예약이다.
기만의 시련을 통과한 세 사람의 능력치도 정확히 체크를 해 둬야 했고, 에드워드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생각해 봐야 했다.
이렇게 중간중간 제대로 파악해 두지 않으면, 꼭 나중에 문제가 생긴단 말이지.
━에드워드의 능력도 봐 줄 생각이냐?
‘당연하죠. 일단은 임시지만, 저희와 동행하게 됐잖습니까?’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도 언제든 체크를 해 둬야지.
‘게다가 움직임을 봤을 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것 같지가 않아서요.’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훈련을 받은 사람은 그 움직임에서부터 태가 나는 법이었다. 정호산이나, 유선제의 움직임에 비해서 에드워드의 움직임에는 빈틈이 많았다.
평상시 풀어진 모습이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마는, 에드워드가 살아온 행적을 생각해 볼 때 제대로 된 헌터 훈련을 못 받았다고 하는 쪽이 더 일리가 있겠지.
나는 에드워드에게 말을 붙였다.
[네 능력을 제대로 테스트해 볼까 하는데, 괜찮아?]
내 질문에 에드워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능력을 테스트해 보겠다고? 왜?]
[그야, 나는 네 능력이 어떤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게다가 우리가 훈련하는 동안 쉬기만 하는 것도 시간이 아깝잖아?]
[테스트를 해 본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일단은 네 능력이 어떤 건지부터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지.]
일단 나는 에드워드의 능력이 뭔지 정확하게 몰랐다. 미국 서부 쪽에서 제법 유명한 용병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랑은 제대로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방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사용한다는 모호한 설명만으로는 에드워드의 능력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걸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떤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지, 한계치는 어느 정도인지, 흡수하는 마력의 종류가 상관이 있는 건지……. 그렇게 흡수한 에너지를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지. 냉기를 흡수하면 냉기로만 방출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마력으로 변환이 가능한지.]
다행히 에드워드의 앞에는 만능 마력 변환기인 내가 있으니, 테스트를 하기에는 완벽한 상황이었다.
[아, 혹시 네가 아는 게 있으면 미리 말해 줘도 되고.]
내 말에 에드워드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나도 내 능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잘 몰라. 나 혼자서는 아무런 훈련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 훈련을 도울 만큼, 친했던 사람도 없었고.]
[용병대에 있지 않았어?]
[……용병대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낸 적 없어.]
음, 얘도 친구가 없었구나.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래, 사실 친구가 없는 게 정상이고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 비정상이라니까.
친구가 아니라고는 해도 서로 훈련 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동안 여기저기 철새처럼 돌아다녔다는 걸 생각해 보니…….
‘어지간히 미움을 받고 살았네요, 얘도.’
━곧 떠날 놈인데, 자기 시간을 내서 훈련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
‘크흠.’
나는 에드워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면 오히려 잘됐네. 여기에 있으면서 한 번 같이 알아보자고. 네가 정확히 어떤 능력을 쓸 수 있는지 말이야.]
내 말에 에드워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아!”
“좋아요, 라고 해 봐.”
“좋아! YO!”
어딘가 억양이 이상한 그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한서현의 말대로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차송진이 내 뒤에서 속삭였다.
“그러니까 에드워드는 존댓말을 해야 할 사람이 아니래도.”
“……오늘 훈련은 형부터 하는 걸로 하자.”
“왜!”
왜는 왜야. 바른말을 한 죄다!
그렇게 벨츠머츠의 훈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