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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41화 (241/352)

제241화

#65 죄의 무게 (3)

정호산의 말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 아이 넉 달 전에 보육원에서 나왔어요. 넉 달 전이 걔 생일이었거든요. 그 애는 자기 생일이 오는 게 그 무엇보다 싫었다고 말했어요. 축하해야 할 생일이, 무엇보다 싫었던 겁니다. 그날이 오면 쫓겨나야 하니까.”

처음, 김현기는 정호산의 말에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정호산은 집요했다. 쉬는 동안 계속 김현기를 찾아갔고, 입을 여는 데 성공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열여섯, 세상에 잔뜩 상처받고 움츠러들었으나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하게 바라는 꼬맹이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차갑고 쓰라렸다.

보육원의 퇴소 나이는 보통 만 18세였지만, 각성자의 경우 고작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보육원에서 나와야 했다.

“열여섯, 그 어린 나이에 그 녀석은 자신을 감싸 주던 유일한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난 겁니다. 그렇게 쫓겨난 뒤에 정부에서 지원받는 퇴소비가 얼마나 되시는지 아십니까?”

“얼만데요?”

“천만 원이요.”

정호산과 강이신도 보육원 출신이었지만, 재능을 각성한 뒤 바로 바벨 아카데미에 입학했기에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이 보육원에서 퇴소한 각성자들의 인생이 얼마나 암울한지.

“겨우 그 정도밖에…….”

“그 천만 원으로 월세 구했대요. 오백에, 백. 넉 달 동안 일을 구해 보려고 했는데 못 구했대요. 그 어디에서도 안 받아 줘서. 그러니 어떻겠어요.”

돈은 떨어져 가고, 배는 고프고. 날은 아직 춥고. 차라리 불 능력자라면 따뜻하게라도 있었을 텐데, 냉기 능력자라 도움도 안 됐다고 우는 김현기를 본 순간 정호산은 결심했다.

이 아이를 어떻게든 돕고 싶다고.

“보육소에서 나온 다음에, 어디 갈 데가 없었대요? 아, 아카데미는! 그래, 아카데미는 왜 가지 못한 건데요?”

헌터 아카데미만 다녔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이 대답했다.

“빙결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잠재력 등급이 D였습니다. 공립 아카데미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전부 탈락했다더군요. 공립은 경쟁률이 대단하니까요. 남은 건 사립 아카데미에 가는 것뿐이었죠. 사립 아카데미의 학비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의 말문이 막혔다.

“한 학기에만 몇백, 거기에 실습비는 따로죠. 실습비까지 내면 한 학기에 천만 원 단위는 우습게 깨지는 데다가 소모형 아티팩트도 모조리 본인 부담인데 갓 보육원을 나온 애가 그런 곳엘 어떻게 갑니까?”

도채희와 정호산도 어릴 적에 부모를 잃었지만, 그 아이와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왜냐? 그들은 잠재력이 A등급인 데다가 전투에서도 무난하게 먹힐 수 있는 좋은 재능을 타고났으니까.

학비는 면제에, 때마다 생활비까지 내어 주던 최고의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해 성공이 보장된 직업으로 뛰어든 그 둘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그럼, 임시로 지낼 보호소라도…….”

“쉼터에서도 각성자라는 이유로 받아 주지 않았답니다.”

“각성자용 쉼터는…….”

“그런 건 없어요.”

주먹을 꽉 쥔 정호산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도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각성자를 위한 쉼터 같은 곳은 없다는 것을.”

정호산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는 몰랐습니다. 선 바깥의 각성자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정호산이 아는 바닥이란, 기껏해야 강이신이 딛고 있는 곳뿐이었다. 바벨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나, 헌터가 되지 못하고 게이트 채굴이나 하며 살아가는 삶. 강이신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닥이라고 말했고, 정호산 또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밑바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는 약자들이었다.

“알아보니 금은방에서 일어났던 일도 사고……였더라고요.”

“사람이 죽은 일을 사고라고만 할 수는…….”

“금은방 주인이 불법 아티팩트를 사용했어요. 유통이 허락되지 않은 액체가 발사되는 아티팩트로, 염산을 사람한테 뿌린 거나 다름없어요. 순간적으로 시야를 상실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능력이 나간 거죠. 그 애는 그 전날까지 제대로 능력을 발현하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사람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라면, 입학시험 정도는 간단하게 통과했을 거다. 실제로 알아보니, 김현기의 평상시 능력으로는 작은 얼음 조각 두어 개를 만들어 내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30분 동안 정신을 집중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고 간주했기에, 순간적으로 능력이 폭발한 거죠. 고의로 한 일이 아니에요.”

결국 그 모든 건 아주 불행한 사고였던 거다.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 아이에겐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어요. 금은방을 선택한 것도, 그나마 그 주변에서는 제일 부자인 것 같아 보여서라고 했어요. 하나만, 딱 하나만 훔치려고 했대요. 작은 걸로…….”

“그 애를 믿어요?”

“네.”

정호산이 말했다.

“증거도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그 녀석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팔찌 하나가 전부였다. 그 난리가 났어도, 훔친 것은 그뿐이었다.

“물론 잘못을 저질렀죠. 하지만 그 잘못을 모두 그 애의 탓으로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상황이 이런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정호산의 말은 그대로 도채희의 심장에 꽂혔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마는 살인마,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맡아 줄 변호사가 필요해요. 이런 사정을 제대로 말해서, 그 아이가 온당한 재판을 받게 해 줄 변호사요. 그냥 대충 살인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변호사가 아니라요.”

정호산의 눈을 마주 본 홍난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툭툭 시계를 건드린 그녀가 말했다.

“시간 다 됐네요.”

음료에는 입도 대지 못한 두 사람과 달리 그녀의 앞에 놓인 바닐라라테는 어느새 거품까지 모두 사라진 다음이었다.

“저, 그럼 이 사건은 어떻게…….”

정호산의 간절한 말에 대한 홍난희의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안 됐지만, 이 사건까지 맡을 짬이 안 나서.”

“예?”

그 말에 누구보다 놀란 건 도채희였다.

“커피 잘 마셨어요.”

그 말을 남기고 떠나는 홍난희를 정호산은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페를 나가는 그녀를 따라나서 그녀의 손목을 잡은 것은 도채희였다.

“음?”

홍난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요? 왜, 왜 못 맡는데요.”

도채희의 말에 홍난희가 말했다.

“말했잖아요. 바쁘고 짬이 안 나서 그런 사건까지 맡기는 무리라고.”

“그래도…….”

“그래도, 뭐요.”

홍난희는 도채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사건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이 겨우 십오 분 얘기 들은 걸로 열정적인 대변인이 되시기로 하셨네.”

그 말에 도채희의 얼굴이 벌게졌다.

“왜요, 사정을 들으니 딱해? 그 애한테 막 이입이 되고 막 그러나?”

홍난희의 말투는 한껏 신랄해졌다. 도채희가 말했다.

“하지만 사정이 딱하잖아요.”

“이봐요, 경찰 나리. 사정이 딱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알아요? 내가 맡은 사건 주르르 말해 줘? 당장 이번 안전세 오른 것 때문에 지내던 건물에서 퇴거당하게 생긴 사건만 서른 건이 넘어요. 당장 다음 주까지 내용 증명 안 보내면 내쫓기게 생긴 사람이 백 명이 넘는다고. 나한테는 그 사건도 중요해요.”

홍난희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드러났다.

“지금 이 상황에 형사 사건 하나 더 맡을 만큼 나 여유 있는 사람 아니라니까요. 아까 내 사무실도 봤잖아요. 거기 지금 서류 한 덩어리 더 얹을 틈이라도 있어 보여?”

홍난희의 말에 도채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홍난희는 이미 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서른 건이 넘는 사건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니.

홍난희는 이미 한계까지 사건을 끌어안고 있었다.

“형사 사건 맡는 게 얼마나 피곤한 줄 알아요? 여기저기 서류 떼러 다녀야 해, 증인 말도 들어야 해, 녹취도 따야 해. 필요한 서류 꾸미는 데도 한세월이라고.”

“……제, 제가 할게요.”

“뭐?”

“내가 한다고요.”

도채희의 말에 홍난희는 얼굴을 구기고 중얼거렸다.

“그게 다 뭔 소리예요?”

“나, 나 시간 많아요!”

도채희는 퉁퉁 가슴을 두드렸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면, 하기 싫어서가 아니면 제가 도와드리면 되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돕겠다고 나서 봐야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아니에요. 그런 거 저 잘해요. 증인들 만나러 다니고, 녹취 따는 거. 제가 하던 일이 그런 거니까.”

“경찰이 변호사에게 협조하겠다고?”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한 다음에 도움을 드리는 식으로 하면 되잖아요. 돈도 안 받을 거고, 이건 뭐, 부업 같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제 취미 생활 같은 거니까 상관없잖아요?”

홍난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쪽이 잘리면?”

“나 못 자를걸요? 자를 수 있었으면 진작 잘랐을걸요.”

그래, 도채희는 막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가 책임져야 할 팀도 없어졌겠다. 안 될 게 뭔가 싶었다.

이러다가 잘리면, 그래. 잘리는 거지.

도채희의 말에 홍난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예요?”

대화를 들으며 홍난희는 알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도채희는 자신만큼이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사건을 가지고 온 정호산이라는 남자와는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듣는 게 분명했다. 거기에 처음, 도채희는 변호사를 구하러 왔다는 정호산의 태도에 분명히 거부감을 보였다.

왜 굳이 살인마를 위해서 변호사를 구하러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태도였지.

그런 태도를 왜 한순간에 싹 바꿔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 애를 구하려고 하는지 홍난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이 사건을 옆에서 보다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뭘요.”

“진짜 나쁜 게 뭔지, 제가 따라야 할 정의라는 게 뭔지요.”

도채희는 여태까지 그 어떤 범죄자의 마음도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왜냐? 나쁜 놈들은 그냥 나쁜 놈들로만 두는 게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이신 사건 때도, 벨츠머츠라는 놈들이 나타났을 때도 그냥 그놈들이 나쁜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와 이해관계를 모두 무시하고 그냥 간단히 그렇게 생각했다.

박철완이 그들의 끄나풀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잘못을 저지른 나쁜 사람.

그렇게만 생각하면 마음 편하게 그들을 탓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여러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 생각에는 금이 갔고, 도채희는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뭐가 나쁜 것일까.

과연 자신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따라야 할 정의는 무엇일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진짜 자신이 바라는 정의를 이룰 수 있는 걸까.

그 말을 들은 홍난희가 말했다.

“말해 두는데, 나 성질 더러워요.”

“예?”

“저 친구랑 얘기해서 서류 갖고 내일 시간 날 때 와요.”

“어?”

“해 보자고요.”

도채희는 홍난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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