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65 죄의 무게 (1)
남주현 기자에게 연락해 보기 전에, 따로 알아볼 일이 많았다. 때문에 나는 안타깝게도 에케아에 같이 가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거 맞냐,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우리 애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쇼핑 타임을 제가 놓치고 싶어 할 리가 없잖아요!’
암, 암! 카트에 뭘 담을 때마다 한서현의 눈치를 보는 일과 인형 코너를 지날 때마다 김재호의 눈치를 보는 일이 그립지 않을 리가.
게다가 이제는 내가 아니더라도 믿음직한 보호자가 있지 않은가. 나는 차송진에게 보호자 감투를 넘겨주었다.
“저, 정말 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럼, 우리 중 형이 제일 형이잖아.”
“으응, 그건 그런데.”
━이럴 때만 알차게 ‘형’이라는 걸 써먹는구나.
‘음, 형이 생긴다는 게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좋구나, 형이라는 거. 나보다 몇 살은 어린 사람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느꼈던 거부감은, 압도적인 편안함에 묻혀 사라졌다.
게다가 차송진은 형다웠다. 음, 그럼! 조금 겁이 많긴 해도, 잘 보면 은근히 할 말은 다 하는 강단 있는 성격에, 음, 책임감도 좀 있는 편이고, 일단…….
‘형이라고 불러 주면 저렇게 좋아하잖아요.’
‘내가 보호자야!’라고 몇 번이나 되뇌며 두 주먹으로 가슴을 통통 두드리는 차송진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맞다. 재호가 인형을 사 달라고 하면 두 개까지만 사 줘.”
“두, 두 개?”
“응.”
웬만해서는 하나만 사 주고 싶지만, 기내식 사건도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제가 먹을 걸 한 번 양보해서 내려보냈는데도 그 난리였다니까요. 아니, 나도 밥은 먹어야지…….’
두 끼 나오는 기내식을 한 끼씩 나눠 먹었는데, 뭐가 그리 억울하다는 건지. 그럼 난 쫄쫄 굶으라는 거냐! 하필이면 기내식이 똑 떨어져 더 시킬 수도 없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하지만 김재호는 내 상황을 이해해 주지 않았고, 나에게 살벌한 보복을 가했다. 아직까지 그때 멍든 종아리가 아팠다.
‘그래도 잘 참긴 했으니까요.’
그래서 두 개다.
“딱 두 개만 사 주는 거다.”
“왜 개수에 제한을 두는 거야? 돈은 부족하지 않을 텐데, 얼마든지 사도…….”
“그랬다간 우리 기지가 꽉 차 버릴 거야.”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그래, 인형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하지만 김재호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인형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지금도 김재호의 곁에는 내가 처음으로 사 준 인형이 그대로 있었다.
몇 번이나 빨아도 때가 빠지지도 않고, 겉은 이미 다 터진 것을 김재호는 꼭 끌어안고 내게 내주지 않았다. 버리고 새로 사 준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앞으로도 재호는 인형을 계속 사 달라고 할 거라고. 안 사 줄 수도 없어! 안 사 주면 삐치니까! 그렇게 사 주는 인형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벨츠머츠 기지 전체를 뒤덮게 될 거라고! 게다가 김재호가 사는 건 꼭 지 몸통만큼이나 큰 것뿐이다. 조그만 걸 모으면 내가 말도 안 해! 지금도 김재호의 침대는 인형으로 뒤덮여 발을 디딜 틈도 없는 상태였다.
“재호가 사 달라는 대로 다 사 주다 보면 우리 기지가 언젠가 인형의 집이 되어 버리고 말 거야…….”
내 중얼거림에 차송진은 아까보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꼭 두 개만 살게!”
* * *
모두 내보낸 나는 천천히 뉴스 기사를 살폈다. 설록진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에는 뉴스 사회ㆍ정치면을 보는 것보다 좋은 것도 없었다.
━설록진, 그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거냐?
‘글쎄요.’
내가 개입하며 미래는 바뀌었다.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았고, 살아 있어야 할 사람이 죽었지. 그로 인해서 이미 역사는 바뀌었고 내가 알고 있던 타임라인은 뒤흔들렸다.
‘더는 과거의 지식에만 태연히 기댈 수 없게 됐단 뜻이지요. 그래도 앞으로 설록진이 무슨 일을 꾸밀지는 대충 예상이 가요.’
설록진의 제1 목표는 시리우스를 무너트리는 거였다. 대한민국의 거대길드가 짱짱하게 남아 있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일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유선제가 죽었어야 할 사건을 뒤집으며, 그리고 쇼핑몰 테러 사건을 잘 마무리하며 시리우스는 예전만은 못해도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다.
게다가 몸을 잔뜩 사리고 있었기에, 또 헤집기도 어려운 상황.
‘그러니까 사회ㆍ정치면을 보고 있는 겁니다.’
━어째서?
‘이럴 때에 설록진이 하는 짓은 늘 똑같거든요.’
「이번 달부터 ‘안전세’ 도입. 내가 내는 세금 어떻게 달라지나?」
나는 그 기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장 자신이 자신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계획이 틀어지는 일이야 늘 있지만, 국회에서 일어나는 일만큼은 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 돌아가거든요.’
이기적인 위정자를 우두머리로 앉혀 놓은 세상은 아주 조금씩 살기 팍팍해지고 있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멸망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어제는 참을 만했던 온도가 오늘은 버티기 힘들어지고, 내일이면 내 목숨을 끊을 만큼 뜨거워지는 꼴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뜨거운 물에 삶겨진 개구리 꼴이 되는 거지.
설록진네 패거리가 이번에 내놓은 ‘안전세’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위험한 지역에 추가로 세금을 물리자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얼핏 들으면 말이 되는 이야기다.
위험한 지역에는 그만큼 헌터의 파견도 잦을 수밖에 없고 피해 복구 등의 비용도 더 들어갈 테니까. 그러니 그런 위험 지역에 세금을 더 걷는다는 건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파헤쳐 보면 이 안전세가 얼마나 잔인한 법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안전세를 무는 것은 가진 것이 없어 위험 지역에 내몰린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이미 그 누구보다 안전하고 문제가 없는 지역에 살고 있었으므로, 이 안전세를 물 일이 없다. 대부분의 법을 지지하는 이들도 ‘안전세’를 물 만큼 위험한 지역이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막상 이 안전세를 물어야 할,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이것을 앎에도 목소리를 낼 힘이 없다.
그러니 이 법은, 그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고 부드럽게 통과되어 가난한 이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 것이다.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법이 생겼는데도 이 세상이 너무나도 조용한 게요?’
━네가 말했듯, 그 누구도 약자들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네, 그리고 설록진이 판을 참 잘 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약자들이 살기 힘들다고 말하면 그럴 겁니다. 그러면 너희 때문에 안전한 구역에 사는 우리가 복구 비용을 대란 말이야?’
겉으로 보면 너무나도 멀쩡한 논리 때문에, 사람들은 쉬이 잊고는 하는 것이다.
오, 설록진은 사람들의 틈을 파고드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누구든 이 법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법이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일조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이 법은 ‘공평’한 것으로 여겨질 테니까.
그래, 당연하지.
어떤 사람들 때문에 세금이 더 쓰인다면, 당연히 그쪽에서 돈을 더 내는 게 맞지.
안전세를 물기 싫다면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가면 됐을 거 아니야?
그럼 싼 땅에 살면서, 혜택은 똑같이, 아니, 남들보다 더 받고 싶다는 이야기야?
어느새 이 법을 만들고, 지지하던 국회의원들에 대한 문제는 쏙 빠지고 구민끼리 서로 편을 갈라 싸우게 만드는 거다.
결국, 입을 다무는 것은 이 안전세를 물어야 하는 소외계층일 것이다.
그들이 입을 열면 열수록 파렴치한 쓰레기로 몰릴 뿐이라는 걸 그들 또한 깨닫게 될 테니까.
설록진이 쓰는 방법은 늘 이랬다.
설록진은 아주 천천히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는 셈이다. 방향에 따라서는 후퇴가 아닌 전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록진이 걷는 그 길 끝에는, 깎아 내지르는 절벽이 있다. 사람들이 꽉 차 있는 절벽에서 설록진이 앞으로 내디딘 한 걸음은, 누군가를 절벽 밑으로 밀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 절벽에 선 사람들 대부분은 모른다. 왜? 아직 절벽 끝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절벽에서 좀 먼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안심할 거예요. 아직 내 뒤에는 자리가 좀 남아 있잖아. 아직 내 차례는 멀었어.’
나 또한 내가 멸망이라는 절벽 끝에 매달리기 전까지는 내 등 뒤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둘씩 절벽 밑으로 떨어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뒤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설록진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죠.’
거대한 흐름이 있다.
내가 그 거대한 흐름을 뒤집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그 흐름을 뒤엎기엔 너무나도 무력하고 멍청하다. 설록진의 곁에서 살면서 내가 배운 거라곤, 이 세계에는 발을 담그고 싶지도 않은 더러운 바닥이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되도록 정호산이 그런 세상을 모르고 살기를 바랐다.
보육원 출신이지만, 정호산은 누구보다 빛나는 놈이었다.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얼굴에, 멋진 재능. 거기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놈이었으니까.
최고의 아카데미로 꼽히는 바벨의 우등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붉은개 길드에 소속된 그놈의 미래에는 그 어떤 그림자도 드리워지질 않길 바랐다. 다행히 내 바람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명철이라는 빛나는 해가 정호산을 바로 비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나라는 놈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호산은 진창에 발을 디뎠고…….
나는 정호산을 홀로 둘 생각이 없었다.
* * *
“미친 거 아니야.”
남주현은 자신에게 온 연락에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이희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또 주식이 떨어졌습니까?”
“아니, 아직 안 떨어졌…… 그거 아니거든요?”
“그럼 무슨 일입니까?”
“그 인간한테 연락이 왔는데…….”
그 말에 이희원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두 사람이 말하는 ‘그 인간’은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드디어 연락이 왔습니까?”
이희원은 그들의 뒤에서 돌아다니는 작은 그림자를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희망적인 소식입니까?”
“안타깝게도 저 친구랑은 전혀 관련이 없네요.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지금 가장 급한 게 뭔데……. 지금 나한테 이런 일이나 하라고? 하!”
[뭐야. 나 빼고 왜 속닥거리고 있어?]
“흐아아악!”
두 사람 사이에서 튀어나온 머리통에 남주현이 괴성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그 꼴을 본 쑤어하오주의 눈빛이 더러워졌다.
[날 빼고 뭔가를 꾸미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다른 일 때문에 그래요.]
[다른 일, 뭐? 도대체 션은 언제 만날 수 있는 건데?]
쑤어하오주의 말에 남주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 문장만큼은 너무 많이 들어서 통역이 없어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션, 없다! 아니다!]
남주현의 과민 반응에 쑤어하오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더 의심스러워…….]
이희원은 남주현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말했다.
“제가 봐도 의심스러우니까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뭐, 뭘 그만둬요!”
“지금 그 행동이요.”
“내가 뭘 했다고!”
남주현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지만, 이희원은 눈썹만 까딱였다.
두 사람의 모든 몸짓 대화를 눈에 담은 쑤어하오주가 복어처럼 볼을 부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