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61 버림받은 사냥개 (2)
퇴근을 준비하던 내게 설록진은 같이 갈 곳이 있다고 말했다.
밤 9시에 가까워진 시간에, 함께 갈 곳이라니. 설록진의 말에 나는 얼굴을 구겼다.
퇴근을 준비하던 차에 추가 근무를 하게 된 것도 열이 받았지만 이런 밤에 설록진이 나를 끌고 가는 곳에는 늘 유쾌하지 않은 일이 따라붙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게 어디 거절할 권리가 있었던가.
나는 애써 웃는 얼굴로 설록진과 함께 차가 주차돼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운전을 준비하던 운전기사에게 설록진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김 기사는 오늘 일찍 퇴근하도록 해요.”
“예, 감사합니다.”
운전기사를 보내는 걸 보니, 접대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 야밤에 나와 단둘이 가야 할 만한 일이라.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퇴근한 운전기사를 대신해 운전대를 잡는 건 나의 몫이었다.
어쩐지 운전면허를 따 두라더니, 알차게 부려 먹는 중이었다.
나는 설록진이 불러 주는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그대로 입력했다.
다행이랄까. 설록진이 불러 준 곳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 빌딩 주소였다. 난 또, 어디 야산에라도 가서 또 누굴 묻으려고 하는 줄 알았지.
“라디오 좀 틀겠습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라디오를 틀었다. 이제부터 노래를 들으며 운전할 테니, 되도록 말을 걸지 말라는 내 식의 반항이다.
그리고 설록진은 내 반항을 받아 주었다. 이게 설록진 식의 웃기지도 않는 배려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야, 김 기사가 운전할 때는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는커녕 클래식 음반도 못 틀게 했으니까.
나는 일부러 설록진이 질색할 만한 여자 아이돌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틀어 댄 적도 있었다. 나한테 팬미팅 참석권을 억지로 안겨 주는 덕분에 그만뒀지만…….
그때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지. 가기 싫다고 말해도 들어주지도 않고. 팬미팅에 다녀오라며 새 양복까지 선물로 줘서 사람들이 다 날 보면서 수군거리고…….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자다가 이불을 걷어찰 정도로 부끄러웠다.
긴장이 풀린 나는 운전대를 두들기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흥얼거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사연과 유행가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어느새 자동차는 목적지에 닿았다.
“도착했는데요.”
내 말에 설록진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신아, 설마 이 야밤에 나를 혼자 보낼 생각인 거니?”
하,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댁을 누가 해칠 수 있다고? 표정 관리에는 실패한 나지만, 나도 모르게 나올 뻔한 말은 가까스로 삼키는 데에 성공했다.
“예, 아무렴요. 같이 가야죠.”
그 말을 내뱉은 나는 재빨리 운전석에서 내려 설록진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제야 설록진은 우아한 몸짓으로 자동차에서 내려섰다.
아주, 왕자님이 따로 없다.
이미 모든 사람이 퇴근한 듯 불이 꺼진 빌딩 안으로 설록진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끔거린 나 또한 설록진을 따라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설록진과 함께 하는 일에는 어차피 목격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각, 또각. 설록진의 구두가 바닥을 울렸다.
모든 사람이 퇴근한 빌딩 안은 이상할 정도로 스산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데…….’
설록진의 밑에 있는 동안, 예전에는 관심도 없던 뉴스를 매일 챙겨 보기 시작한 내게 이 건물은 유난히 눈에 익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열심히 볼걸. 대충 봤던 터라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붙어 있었던 간판을 확인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설록진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황송하게도 손수 눌러 주었다.
13층, 설록진이 누른 층수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오늘 왜 오신 겁니까?”
“왜 서프라이즈를 앞에 두고 재미를 까먹는 짓을 해.”
“그야, 전 서프라이즈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특히 당신이 선물하는 건.
“저는 말이죠, 미리 뭘 선물해 줄지 말해 주는 걸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아니, 애초에 저한테 뭐가 필요한지 미리 물어봐 주는 걸 좋아한다고요.”
내 말에 설록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도 이건 제법 좋아할 거야.”
그 말에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았다. 설록진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아주 X 같은 일들이 일어났으므로.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내 생일……은 저번 달이었고. 갑자기 중국어를 배우라고 했던 건, 삼 개월 전이었고…….
띵.
내 복잡한 머릿속은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설록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역시 이곳에도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모두 퇴근했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이 꺼져 있는 게 정상인가? 보통은 비상구에라도 불이 들어와 있지 않냐고.
게다가 복도 안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알 수 없는 한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나는 잠시 몸을 떨었다.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눈보다, 코가 이상을 감지하는 게 빨랐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맡아 본 비릿한 피 냄새에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뭐 해, 이신아. 어서 오지 않고.”
창문에서 흘러들어 오는 달빛에 비친 설록진의 모습은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상판대기가 종교화에서나 볼 법하게 그럴싸했지만, 난 저 안에 스며들어 있는 본질을 안다.
하지만 내겐 선택지가 없었고, 나는 설록진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필이면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처음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윽고 커다란 창을 향해 스며들어 오는 달빛이 시야를 밝히기 시작했다.
내가 맡았던 피 냄새는 착각이 아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짙어지기 시작한 피 냄새에 나는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마침내 이 피 냄새의 근원지를 찾은 순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큭.”
이런 일에는 익숙해진 나조차 질릴 정도로 눈앞에 드러난 광경은 처참했다. 못해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자신의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죽어 있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이나 현실을 비꼬는 회화 작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원들의 죽음, 따위의 제목이 붙을 법한 광경이었다.
반항도 하지 못하고 제가 일하던 그 자리에 고개를 처박고 죽어 있는 사람들이라니.
그들의 책상 밑으로 고인 핏자국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이 처참한 광경을 만들었을,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아니다. 바로 내 옆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설록진이었지.
“대체…….”
여기에 뭐가 있는 거냐, 그렇게 물으려던 나는 입을 닫았다. 설록진의 동공은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에 무언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지금 설록진이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천천히 설록진의 앞에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림자에서 나타난 놈의 모습은 끔찍했다.
온몸은 피에 젖어 있었고, 언제 씻었는지 모를 만큼 지저분했다. 길고 빽빽하게 자라난 머리카락 덕분에 가려진 얼굴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검은 옷 사이사이 드러난 몸은 모두 흉터투성이에, 피와 때로 얼룩진 손에는 손톱들이 모두 짐승의 것처럼 길게 자라나 있었다.
“네 조련사는 어디에 있어?”
설록진의 질문에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목을 긁는 듯한 소리만 냈다.
“아, 이런. 말을 못 한다는 걸 까먹었네. 이래서 불편하단 말이야.”
턱에 얹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들긴 설록진이 다시 남자에게 명령했다.
“네 조련사였던 걸 들고 와.”
그 말에 남자는 다시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나는 설록진의 뒤에서 이를 악물었다. 조련사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고 내가 물을 새도 없었다.
철푸덕. 천장에서부터 조각조각이 난 시체 조각이 떨어졌으니까.
덕분에 설록진의 얼굴에 핏자국이 튀었다.
설록진은 인상을 쓰며 손가락으로 핏자국을 닦았다.
“넌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니까.”
나는 설록진이 당장에라도 저놈을 죽일까 겁을 집어먹었지만, 다행히 설록진은 놈을 벌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일은 잘했어.”
오히려 놈을 칭찬했다. 그 칭찬에도 놈은 미동조차 없었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설록진은 다른 곳으로 곧 시선을 돌렸다. 조각나 버린 시체를 바라본 설록진이 혀를 찼다.
“이번에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내가 분명히 조련사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해 뒀을 텐데…….”
설록진의 말에 남자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늘게 눈을 뜬 설록진이 곧 아하, 가볍게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내가 깜빡했구나, 조련사를 죽이지 말라는 말은 안 했어?”
마치 그에 대답하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알 수 없는 대화를 따라가려다가는 내 뇌가 녹는 게 먼저겠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톡톡 설록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설록진은 그제야 내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맞다, 이신이가 있었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나를 잊었을 리가. 애초에 이 모든 광경을 내게 보여 주려고 데리고 온 것일 텐데.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인사해, 이신아. 이쪽은 음, 그러니까 개라고 하자.”
“……개요.”
따지자면 나도 설록진의 ‘개’ 아닌가? 그런데 저쪽도 ‘개’라고?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설록진이 말했다.
“따지자면 너는 내 애완견. 저쪽은 사냥개.”
“……그렇군요.”
그런 구분까지 있어? 대체 키우는 개가 몇이나 되냐고 빈정거릴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그래서요.”
“보다시피 여기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어. 보여? 내 개를 맡아 길러 주던 조련사가 저 꼴이 된 거?”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전부 저놈에게 살해당한 건 안타까운 사고 축에도 들 수 없는 건가. 나는 애써 설록진의 말에 대답했다.
“……돌봐주던 개한테 저 꼴이 된 걸 보니 형편없는 조련사 같은데요.”
내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설록진은 곧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맞아. 아주 형편없는 놈이었지. 내가 분명 내 개한테 손을 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멋대로 손을 댄 모양이야. 물론 너도 봐서 알겠지만, 저 개는 너보다도 머리가 훨씬 나빠. 내가 음, 말을 잘 듣게 하려고 여러 가지를 건드려 놔서.”
아하, 바보 천치가 됐다는 뜻이군.
“그러니 속이 터지긴 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기르던 개한테 물리다니, 죽어 마땅하지 않아?”
“그래서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내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설록진이 나를 굳이 이곳에 데리고 와서 저 개를 보여 주는 이유가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너무나도 싫어서…….
제발 아니길 바라며 나는 설록진을 바라보았지만, 설록진은 역시나 내 간절한 소망을 짓밟았다.
“그러니까 이신아, 개 한 마리 길러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