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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22화 (222/352)

제222화

#60 잘 못 하거든요, 이런 건 (3)

존과 아이를 뒤로하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저들의 몫이다.

이제, 내 몫의 일을 해낼 차례다. 예를 들어 한서현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라든가, 대담이라든가, 토론이라든가…….

━그래, 이제 더는 도망칠 수 없을 테니.

‘예…….’

아쉽게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미국을 떠날 준비를 마치면, 곧바로 테이카에게 카지노 건을 떠넘기고 튈 생각이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돌아가는 대로 또 할 일이 있으니, 진득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이 이야기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쩐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건 쉬운데, 어째 내 일이 되면 이렇게나 하기 싫어지는 건지.

그렇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내게 레이가 속삭였다.

━잠깐, 그 전에 뭐 잊은 거 없냐.

‘잊은 거라뇨?’

━먹을 거 사 가야지!

아차차,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 * *

호텔에 도착한 나에게 바로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먹을 거!”

김재호는 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낚아채듯 가지고 갔다. 레이의 충고가 새삼 고마웠다. 빈손으로 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거 다 네 거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 먹으라고!”

“응!”

김재호는 내게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이미 핫도그 두 개를 입에 털어 넣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귀담아듣고 있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김재호의 뒤로 차송진과 피곤한 얼굴의 에드워드가 보였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배고팠지? 밥부터 먹어.”

“그러려면 재호 허락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차송진이 질린 표정으로 비닐봉지에 코를 박고 있는 김재호를 바라보았다.

“김재호!”

내 부름에 김재호는 마지못해 비닐봉지를 차송진에게 건넸다. 봉지를 건네받은 차송진은 바로 에드워드에게 봉지를 벌려 주었다.

[음, 고마워.]

[천만에.]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뚝딱거릴 수 있다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나를 힐끗 바라봤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선약이 있었다.

두 사람의 뒤에서 마치 유령처럼 슬쩍 나타난 한서현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현이, 너도 뭐 좀 먹고…….”

“배 안 고파요.”

다이애나의 본거지를 습격한다고 점심을 그대로 넘겼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그만큼 대화가 급하다는 뜻이겠지.

━네놈에게 도망갈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싶다는 뜻이겠지. 이게 다 네가 조금의 변명만 생겨도 도망갔기 때문이지 않으냐.

할 말이 없었다.

“도망 안 갈 테니까, 일단은 뭐라도 먹고…….”

“진짜 배 안 고프다니까요.”

한 번 더 권했다가는 내 머리가 반으로 갈릴 것 같은 기세다.

‘나는 배고프다고 말할 분위기, 아니죠?’

━잘 아는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핫도그를 아련한 눈으로 바라본 뒤 한서현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거실 옆에 딸려 있던 자그마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서현이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아요.”

할 말이 있으니 앉아 보라고 말하던 건 내 대산데. 나는 쭈뼛거리며 한서현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마음이 불편했다.

“하아.”

깊은 한숨 소리에 어깨가 절로 떨렸다. 막상 나를 이렇게 앉혀 놓았으면서,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얼굴인 걸 보니,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왜 아까 나를 말린 거예요?”

고민 끝에 나온 한서현의 질문은 곧바로 본론으로 향했다. 나는 그 질문에 일단 눈부터 굴렸다.

왜 말렸느냐.

답은 간단하다.

한서현이 사람을 죽이는 꼴을 보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한서현을 설득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왜’ 사람을 죽이는 걸 말렸냐고 되묻겠지.

“대답 안 해요?”

내 침묵에 한서현의 말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말을 이었다.

“그냥,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어.”

“뭘 고민하는데요. 말렸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으음, 너도 대충 짐작하고 있잖냐. 그…….”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게 싫어서요?”

역시 알고 있었군.

“왜요?”

역시 내 예상대로 이유를 묻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내가 댈 수 있는 대답은 한정적이다.

1. 너는 아직 어리다.

2. 너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3. 그냥 내가 싫다.

곧바로 반격이 날아올 만큼 허접한 이유뿐이다. 사실 1번과 2번은 같은 말이기도 하니, 결과적으로 나는 별 이유도 없이 한서현을 막고 있는 거다. 그냥 내 마음이나 편하자고.

“나 많이 강해졌잖아요. 더는 보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알지, 너 강한 거.”

나는 한서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해지기 위해서 한서현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안다.

한서현이 뼈를 이용해서 기술을 얼마나 열심히 갈고닦았는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뼈 폭탄이라는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이런 한서현이라는 대단한 녀석을 데리고 내가 하는 짓이라고는…….

━갑자기 왜 쭈그러드는 건데.

‘이 누추한 벨츠머츠라는 곳에 이런 귀하신 분이 와도 되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너 또 헛소리한다.

‘예, 헛소리죠.’

확실히 한서현이 불만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제나 나는 우리의 전력을 고려해서 작전을 짰다. 처음 한서현을 전투에서 배제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서현의 능력이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한서현은 강해졌고, 더는 그런 이유로 한서현을 전투에서 배제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한서현이 말하는 바도 이거다.

나도 이제 강해졌어요. 그러니까 나도 이제 끼워 달라고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서현을 직접적인 전투에서 배제했고 그러니 불만이 터져 나온 거다.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그래요? 알잖아요, 나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거.”

“그게 문제야. 네가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거.”

내 명령 하나면 한서현은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여 버리겠지. 그게 문제였다. 한서현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됐다는 거. 그리고 그건 아마도 나 때문일 거라는 거.

실험실에서 비인도적인 삶을 살며 비틀린 기준을 갖게 된 김재호와는 달리 한서현은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그런 애가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된 건 모두 내 탓 아닌가.

━글쎄, 나는 저 녀석도 애초부터 좀 비틀린 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만…….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저라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랐을 겁니다.’

나는 내가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여태까지 악당이 할 법한 짓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저질렀다.

거짓말하고, 훔치고, 죽이고. 그리고 나는 앞으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런 짓을 수없이 반복할 거다.

나라는 인간은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이런 나를 진심으로 따르는 아이들이 생겼다는 거고, 나 때문에 그 아이들마저 나와 같은 진창으로 떨어지게 생겼다는 거다.

━그러니까 더는 네놈에게 물들지 않았으면 한다는 거 아니냐.

‘예, 따지자면 그렇죠.’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냐?

이 벨츠머츠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한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악당인 내가 이끄는 이상 벨츠머츠 또한 악당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법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딜 가나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악당 말이다.

나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

하지만 한서현과 김재호는 그런 취급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하나.

━갑자기 양심이 일하기 시작했다는 거냐.

‘예…….’

나는 나쁜 짓을 저질러도 된다. 왜냐, 나는 이미 타락했으니까. 못된 놈이니까. 하지만 한서현과 김재호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아직 두 사람에게는 돌아갈 여지가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젠데요.”

너만큼은 나처럼 진창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면, 한서현은 무어라 답할까. 이 지독하게 착한 녀석은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을까.

“나도 죽일 수 있다고요. 애초에 나는 신경도 안 쓰여요. 이제 와서 몇 명을 죽이든, 말든. 달라질 게 뭔데요.”

“그러니까 네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니까.”

“도대체 뭐가 문젠데! 왜 보스는 수십 명을 죽여도 되고, 재호 형도 되는데, 왜 나만 안 돼요, 나만?”

그렇게 소리친 한서현이 서럽게 외쳤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왜 나만 빼놓는 건데요.”

“그래서 나도 이번에 다시 생각해 보려고. 재호도 앞으로는…….”

“왜요, 왜 다시 생각하게 됐는데요. 나 때문에?”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닌 게 아니잖아요! 나 때문에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왜요, 왜 갑자기 그러는데요. 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내가 끼려니까 갑자기 안 된다고 말하는 건데요.”

갑자기 내가 이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서현이 말했다.

“난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나도 보스를 도울 수 있다고.”

확실히 나와 함께한다면 언제까지 선을 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선 바깥에 있는 한, 이곳으로 넘어오지 말라는 내 말은 통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이 선 밖으로 너희를 끌어내고 싶지 않은 걸 어떡하냐.

“내가 잘못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에요?”

한서현이 서늘하게 말했다. 나를 노려보는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원망, 자신을 밀어내는 것에 대한 원망.

“그냥 날 좀 인정해 주면 안 돼요?”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냐, 이건. 그러니까 나도 널 인정하는데…….”

“아니잖아요. 나를 아직도 어린애로만 보는 거면서.”

“아니야.”

“그럼 말해 봐요. 여태까지 재호 형이랑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면서, 나만 안 되는 이유가 뭔데요.”

그거야, 내 기억에 과거에 봤던 김재호의 모습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인상을 구긴 한서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말리려면 조금 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야 할 거예요.”

“서현아.”

“오늘은 보스가 준비된 거 같지가 않으니까 준비할 시간을 줄게요.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굴면 그때에는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그런 말을 하며 나는 방 밖으로 나가는 한서현을 붙잡지 못했다.

끄응…….

━저 녀석을 설득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납득이 갈 수 있는 말을 준비했어야지.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는 말에 저 녀석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한 거냐?

레이의 말이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사실 전 리더의 자질이 없는 게 아닐까요?’

━얼씨구? 그래서 뭐 어쩌게. 이제 와서 저 녀석들을 다 방생하기라도 할 생각이냐? 네 살길 살아가라고? 네가 리더의 자질이 있든 없든 저 녀석들을 끌어안기로 한 이상 제대로 책임져야지.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질을 운운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한서현은 이미 많이 기다렸다. 그날 전투에서도, 오늘 호텔에 와서도.

이 모자란 리더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지 않았나. 이 기회를 놓쳐 버릴 순 없지.

━그러니 그 안 돌아가는 머리를 한번 잘 굴려 봐서 생각해 봐라. 정말로 네가 저 녀석을 아낀다면 무슨 선택을 해야 할지.

문제는 나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막막하다는 거지. 그렇게 한서현에게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 중인 그 순간, 슬쩍 문이 열렸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차송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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