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59 잘하거든요, 이런 거 (5)
팅, 팅, 팅. 내 실드에 막힌 총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서현의 동공이 검게 타올랐다.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곧바로 한서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한서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리는 거냐.
‘아직 얘기가 안 끝났잖습니까.’
━지금은 저쪽이 얘기할 시간을 안 줄 것 같다만…….
그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한서현을 풀어 줄 수는 없다.
“말했잖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한서현은 실드를 두들기고 있는 총알을 손으로 가리키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럼, 전 뭘 하는데요. 여기에서 그냥 놀아요?”
한서현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내가 언제 놀라고 했나, 우리를 보조해 달라고 했지.
“얘기 언제까지 할 거야. 쟤네 큰 거 꺼내 온다.”
김재호의 말대로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적이, 막 로켓 런처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젠장!
“전처럼 우리를 보조해 줘, 알잖아.”
“……알았어요.”
여전히 위장병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표정이 영 그랬지만, 한서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로켓 런처부터 처리해야 할 때였다. 나는 손을 뻗어 마력으로 얼음 창을 짜 올렸다. 갑자기 공중에서 나타난 얼음 창에 건물 안쪽에서 동요가 번졌다.
적들이 대비하기 전, 나는 창문 안으로 얼음 창을 쏘아 보냈다.
창문이 깨지고, 건물 안쪽에 얼음 창이 박혀 들었다. 창문가에 붙어 서서 우리를 향해 총을 쏴 댔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창문에 빼곡하게 붙어 섰던 총구가 사라지자 그 틈을 타고 김재호가 안쪽으로 스며 들어갔다.
나는 힐끗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입을 꾹 다문 한서현의 얼굴에는 ‘불만’이라는 두 글자를 써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할 이야기긴 했지. 문제는 타이밍이 최악이었다는 거다.
‘절 위로하는 겁니까?’
━아니, 타이밍이 최악이었다고 탓하는 건데.
젠장, 내 편은 한 명도 없군.
[으아악!]
생각을 뚫고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간 김재호의 활약이다. 창문 바깥으로 내던져진 남자는 몇 번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곧 남자는 조용해졌다. 숨이 끊어진 거다.
━김재호가 저렇게 날뛰는 상황인데, 한서현은 묶어 놓으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으으, 그거야 그렇지만……. 일단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일이 끝난 다음에 생각해 보자고요.’
━참나.
레이의 잔소리를 피해 나는 마력으로 다시 한번 얼음 창을 짜냈다. 아까의 얼음 창이 우리를 공격할 사람들을 흩어 놓는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안쪽으로 들어갈 길을 낼 생각이다.
창문 쪽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내 창이 날아갔다. 퍼억, 내 창에 맞은 그림자가 안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김재호가 그림자에서 던진 단검이 공중을 날았다.
퍽, 퍽.
단검이 사람들의 몸에 꽂혔다.
[죽어!]
총알이 쏟아졌으나, 김재호는 이미 그림자 속으로 녹아든 다음이었다. 그리고 방심한 녀석의 등 뒤로, 조금 전 동료의 몸에 꽂혔던 단검이 날아들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이리저리 날아드는 단검에 건물 안에 있던 남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재호만으로도 상황은 끝인데요.’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내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나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온 모래가 공중에 화살표를 그렸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기둥 뒤에 숨어서 숨을 고르고 있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얼음 창을 곧장 그 남자에게 선물로 날려 주었다. 벽에 꽂힌 신세가 된 남자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이런 끔찍한 꼴은 잘도 보여 주면서, 직접 손을 대는 건 안 된다니.
레이의 말에 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러니까 이따가 생각한다고요.’
나중에 제대로 얘기를 해 보자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얼음 창과 김재호의 단검만으로도 이미 내부는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두, 뒤져! 괴물!]
숨이 채 끊어지지 않았던 남자가 나를 향해 권총을 갈겼지만, 안타깝게도 그 총알이 내 몸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공중에 붙잡힌 총알을 본 남자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놈이 내게 쏜 총알을 그놈의 머리통에 돌려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한데요, 각성자가 보이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각성자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각성자뿐이다.
당연히 폭력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각성자를 끌어들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상대한 사람은 모두 비각성자였다.
방탄복들이나, 기관총 따위의 중화기로 무장을 시켜 뒀다고는 해도 각성자인 우리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가 정말로 갱단의 본거지라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전력인데요.’
사실상 말이 안 된다.
당장 도박판에서 봤던 어거스트만 해도 각성자였는데, 막상 이 본부에 각성자가 보이지 않는다니.
지하 공간에 다 몰려 있다든가?
이런 난리를 치는데도 올라오지도 않는단 말이야?
더는 위층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그때, 한서현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지하로 내려가려고요?]
“그래.”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요.]
“왜?”
[안 느껴져요?]
한서현의 모래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아래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저 안에서 전투라도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무슨 끔찍한 연구라도 진행되고 있는 건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무어라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고 무언가 튀어나왔다. 계단과 그 근처의 벽까지 함께 부서진 터라 사방으로 벽돌이 튀었다.
나는 재빨리 나와 김재호의 앞에 마력으로 실드를 둘렀다.
“미친, 이게 무슨…….”
벽을 뚫고 바깥으로 나온 사람은 온몸이 검었다.
흙먼지에 가려져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매끈한 탄소 재질로 덮인 몸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나는 재빨리 흙먼지 뒤의 사람을 훑었다. 눈으로 보이는 실루엣은 둔해 보였지만, 조금 전 보인 속도는 상당했다. 둔해 보이는 건 외견뿐이라는 뜻이다.
흙먼지 너머에 있는 불청객을 알아차린 듯, 놈은 곧바로 눈앞에 있는 우리를 보고 경계 자세를 취했다.
적이냐, 아니면 아군이냐.
우리는 흙먼지를 사이에 두고 대치를 이어 갔다. 그리고 흙먼지가 가라앉고,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을 무렵.
[뭐야, 당신도 한편인 거야?]
강철 인간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니키? 당신입니까?]
[그래! 나야! 빌어먹을, 너도 한편이었다니. 역시 나를 꼬여 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곧바로 성을 내는 니키에게 나는 황급히 말했다.
[아니요, 오해입니다! 저는 당신을 구하러 온 쪽이라고요!]
[구하러 왔다고?]
[예! 당신 혼자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카지노에 갔는데…… 그곳에 있던 놈이 여길 알려 주더군요.]
니키는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우리 밑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뒤에는 의심을 거뒀다.
[그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내 뒤에는 사나운 표정으로 단검을 들고 있는 김재호와 어느새 달려온 한서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 친구들입니다. 니키 당신을 구출하는 데에 기꺼이 손을 보태기로 했죠.]
[오, 고맙네.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구하러 와 주다니.]
니키의 인사에 김재호와 한서현은 입을 다물었다.
척 보아하니 영어 울렁증이 턱 끝까지 올라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음…….’
아직 우리 원어민 교사가 일을 안 해서……. 어쩔 수 없지.
[친구들이 좀, 말이 없는 편입니다.]
[그냥 말이 없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겁니까?]
정신을 잃고 끌려갔다고 들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니키는 멀쩡하다 못해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묶여 있길래 다 때려 부수고 탈출했거든.]
[다 때려 부쉈다고요?]
[으응.]
[그건 당신 능력입니까?]
[어? 어! 멋있지?]
온몸이 다른 물체로 변하는 건가.
마치 생강 과자처럼 둔해 보이는 실루엣만 아니라면 제법 멋지게 보였을 것 같은데…….
손과 발도 둥글어서 정말로…….
이런 말을 하면 실례겠지만, 귀여웠다.
김재호의 눈빛이 쓸데없이 반짝이고 있는 게 불길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럼 모른다는 뜻입니까?]
[내 몸에 뭔가를 한 것 같긴 해. 능력이 무척이나 둔해진 느낌이거든, 몸도 무거워졌고…….]
얼굴을 구긴 니키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외쳤다.
[아니! 내 손이 왜 이래!]
[아.]
저건 부작용 같은 거였구나. 원래 저렇게 둔둔한 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너무 전체적인 실루엣이 너무 둥글다 싶긴 했다.
[괜찮으시면 저 안쪽을 저희가 조사해 보려고 하는데요.]
[저 안을?]
[예.]
일단 정확한 건 저 안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내 말에 니키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설마 다 죽인 겁니까?]
이럴 수가! 아직 아티팩트를 누가 만든 건지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경악하는 나를 보며 니키가 황급히 소리쳤다.
[누굴 살인마인 줄 알아?]
━그러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끄응.’
나는 김재호와 한서현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 지하를 둘러봐야 한다는 거죠?”
“그래.”
“이 여자는 어쩔 생각인데요?”
“일단은 안전한 데로 옮겨 줘야지.”
한서현에게 그렇게 말한 나는 니키에게 안전한 곳에 가 있으라는 말을 했고…….
[나도 같이 지하로 내려갈래.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거든.]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넷은 다 함께 지하로 내려가기로 했다.
니키에 의해 반파된 지하는 엉망이었다. 벽에서 떨어지는 흙먼지를 본 한서현이 말했다.
“이거 이대로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설마…….”
[다들 뭐라고 하는 거야? 대체 어느 나라 말인데, 그건?]
“아.”
나는 니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안이 무너지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두 개의 질문에 대답은 하나뿐이었지만, 다행히 니키는 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단번에 무너지진 않지 않을까?]
뭔데 그 미묘하게 힘 빠지는 말투는.
다행히 우리가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에 지하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지하는 꽤나 넓었다. 적어도 방 몇 개는 있어 보였다. 문제는 그 지하가 몽땅 부서져 있다는 거지…….
[정말 화가 많이 났었나 봅니다.]
내 말에 니키는 부끄러운 듯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잔해 속에서 사람을 찾은 김재호가 내게 손짓했다.
“여기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
“이걸 살아 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트럭에라도 들이받힌 듯이 허리가 꺾인 남자는 척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안 죽였다면서요.]
[……어머.]
니키는 딴청을 부렸다.
마치 거대한 트럭이 뚫고 온 듯 벽이 여러 군데 부서져 있었다. 그 확실한 흔적을 따라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