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58 사기꾼과 거짓말쟁이 (7)
━크흠,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나는 또 네가…….
‘네가 뭐요.’
━그…… 연상 취향인 줄 알았지.
뭐라는 거야, 이 노땅 아티팩트가.
‘따지자면 연상 취향이 맞긴 해서 더 짜증이 나네요.’
━연상 취향이었냐?
‘굳이 따지자면 포용력 있는 타입이 제 이상형…… 아니, 지금 이런 얘기나 할 땝니까?’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레이에게 넘어가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보낼 뻔했다. 나는 다시 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존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르되, 여기에서 존을 만난 이상 존을 그냥 두고 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가 또 스승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어떻게든 당신 인생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그러니까 말해라. 제발 날 좀 구해 달라고, 이 지옥에서 꺼내 달라고 말이야.
━그런 말을 안 해도 꺼내 줄 생각이 만만이면서,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저는 구조를 하고 싶은 거지, 납치를 하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
구해 달라,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된다고.
내 시선에 존이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동생이 정말 그렇게 된 거라면, 내가, 나라는 사람이 더 살 가치는 있나 싶기도 하고요.]
이미 자신이 사랑했던 일도 못 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 또한 모두 잃은 다음이니……. 더는 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존을 이대로 둘 수가 없었다.
[당신을 세뇌하는 미친놈이 있습니까? 막, 말을 안 들으면 눈앞에서 사람들을 죽이면서 협박한다든가…….]
[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숨통을 꽉 쥐면서 당신 인생을 뒤흔드는 스토커가 있냐고요.]
[그건 아니지만…….]
[그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겁을 내는 겁니까? 그냥 살아요. 살아 보고 생각해 보자고요.]
나는 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자유롭게,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이 기회를 그냥 놓칠 생각이에요?]
[하, 하지만…….]
[존, 당신은 죽기에는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말입니까?]
존의 얼굴에는 내 말을 향한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내 말은 영 미덥지 않다 이거지. 당장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당신에게는 살 가치가 있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해봤자 와 닿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그래도 말이지.
나는 당신이 살았으면 한다.
이번의 생에서만큼은 과거와 달리 아주 행복했으면 한다.
[뭐, 지금 당장 아닌 것 같으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증명해 줘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내 말에 존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일단 구해 줄 테니까, 나더러 증명하라고요?]
[내가 마음이 넓어서, 외상을 잘해 주는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살아서 갚아요.]
내 말에 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도저히 말로는 당신을 못 이기겠네요. 알겠습니다. 일단, 일단은 한 번 살아보도록 하죠. 저도 좋아서 여기에 있는 건 아니니까…….]
좋아, 이걸로 과거의 스승님을 지옥에서 건져 내기는 성공했군.
이제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 낼 차례다.
[일단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부터 옮겨야겠습니다.]
[이, 이 사람들을 다요?]
[예. 어디 안전한 곳 없을까요.]
내 말에 생각에 빠진 존을 뒤로 하고 나는 일단 사람들의 상태부터 살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 별장이 있는데 거기라면 안전할 겁니다.]
좋아, 안전한 공간도 확보했다. 이제 문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 사람들을 거기까지 어떻게 옮기냐 하는 거였다.
혹시나 해서 사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자신이 도망갈까 걱정하는 다이애나가 자동차는 물론이고 자전거까지 전부 치워 버렸단다.
젠장.
그럼 이 사람들을 전부 등에 업고 거기까지 가는 수밖에 없단 건가. 평상시에 이런 궂은일은 한서현이나 김재호에게 슬쩍 시키면 그만인데.
━여기에 있지도 않은 녀석들을 부려 먹을 생각을 하는 거냐.
그래, 나는 새 나라의 어른이니까, 내 일은 스스로 척척해야만…….
“아아, 누가 저 사람들 좀 다 옮겨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이런 중얼거림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누가 내 일 좀 대신해 줬으면 좋겠는데…….
마치 내 중얼거림을 들은 것처럼, 하이얏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스켈레톤이 뚝 떨어졌다.
“뭐, 뭔데!”
[으아악!]
갑자기 등장한 해골바가지에 존은 또 한 번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가 깨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될 만큼 시원한 백 텀블링이었다.
그나저나 스켈레톤이 여기에 있다는 건…….
나는 얼굴에 손을 얹었다.
“서현이냐.”
“예.”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슬쩍 고개를 위로 올렸다.
창고 천장에 난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벨츠머츠 멤버들과 임시 원어민 교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분명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나?”
“예, 그랬는데 누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슝하고 날아왔죠.”
말이 되냐! 어떻게 그렇게 금방 와! 아니, 애초에 진짜 순간이동으로 날아온 거라고 치더라도 내 말을 그럼 도청하고 있었다는 거잖냐!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당당한 표정을 보니 따져 봤자 손해는 나였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존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스켈레톤을 가리켰다.
[저, 저건 뭐, 뭡니까?]
“아.”
그 전에 소개부터 해야겠군.
[놀라지 마세요, 제 부하들입니다.]
[주, 죽었는데요?]
[아, 저건 제 부하가 소환한 스켈레톤이고요. 제 부하는 저 천장 쪽에 있습니다.]
[히이익!]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 존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목 아프다, 내려와라.”
내 말에 천장에 매달려 있던 멤버들이 모두 바닥으로 내려왔다. 바닥으로 내려오자마자 슬쩍 존을 눈짓으로 가리킨 한서현이 물었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군데요?”
“내 영어 선생님.”
“예?”
“옛날에 저 사람 방송을 보면서 영어를 배웠거든.”
나는 그렇게 둘러댔다. 내 말에 한서현이 존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떡 벌렸다.
“연, 연예인이었어요? 그럼 그건 팬심…….”
“응?”
내가 한서현의 말에 뭐라 대답하기도 전, 김재호가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연예인!”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공책과 펜을 꺼낸 김재호는 그대로 존에게 달려갔다.
“뭘 하는 거야?”
“연예인을 만나면 사인을 받아 두라고 했어.”
김재호의 요청에 당황한 표정을 했던 존은 곧 기쁜 얼굴로 김재호에게 사인을 해 주었다.
[세상에, 내 팬이 또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존의 사인을 받은 김재호는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얼마에 팔 수 있냐?”
음…….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진실은 묻어 두도록 해야겠다.
* * *
나는 한서현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과 존을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 두는 데에 성공했다.
[혹시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이곳에서 머물고 있던 만큼, 무언가를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 질문에 존은 난처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은 모릅니다. 다이애나는 내 앞에서는 일 얘기를 도통 안 했거든요. 그, 나더러는 그냥 예, 예쁘게만 있으라고 말해서…….]
[우웩.]
참고로 지금 토하는 소리를 낸 건 내가 아니다. 에드워드다. 나는 에드워드의 옆구리를 툭 쳤다. 에드워드는 겨우 표정을 갈무리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좀 역겨운 소리를 들으면 토하는 버릇이 있어서.]
표정은 관리했는데, 입으로 나오는 말은 관리를 못했구나. 내가 에드워드의 발등을 잘근잘근 밟는 사이 존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나도 그녀의 취향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긴 합니다. 나 같은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막상 그렇게 말하는 꼴이 누가 봐도 사랑을 잔뜩 받은 정부처럼 보여서 할 말이 없어졌다.
내게 발등을 밟히며 얼굴을 구겼던 에드워드도 [헐…….]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잃었을 정도니.
아니, 뭐야. 저 표정은. 여기서 정말 등 따습고 배부르게 잘 지냈던 거야?
어엉? 정부로 살았다며!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자신을 가지고 노는 사람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비장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어째서 네가 몰입을 하는 거냐.
‘……그러게요.’
나는 레이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존이 여기에서 사랑받는 정부로 잘살았느냐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정보를 캐내려 말을 하면 할수록 존은 아는 것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정말 개뿔도 아는 게 없군요.]
유노 낫띵, 존…….
아련한 내 말에 존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쉽게도 존에게서 도움을 받는 일에는 실패했으나, 그래도 건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첫째로, 그 카지노를 운영하는 게 갱단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둘째로, 그 갱단 주인의 이름이 다이애나라는 것까지 알아냈으니까.
음,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근거지가 어딘지 이런 것까지 알아냈으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존은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왠지 조금 전보다 기가 죽어 보이는 존을 향해 말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여기에 있으세요.]
[예? 여기서 말입니까?]
[아니면, 이걸 갖고 떠나도 좋고요.]
나는 품속에서 내가 땄던 캐시 티켓을 꺼내 존의 손에 들려 주었다. 처음에는 뭔가 하는 눈으로 내가 건넨 티켓을 바라본 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건 너무 큰 돈인데!]
[당신이라면 잘 써 줄 거라고 믿어요.]
나는 무어라 말하려는 존을 뒤로한 채, 한서현이 불러낸 모래 독수리의 등에 올라탔다. 독수리는 우리 모두를 태우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사라진 니키를 찾아야지.”
제일 우선이었다. 그러니까…….
“부탁한다, 서현아!”
한서현은 입술을 삐죽였다.
“아까만 해도 왜 여기까지 왔냐는 얼굴이더니.”
솔직히 그 생각을 아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써먹어 줘야지.
━쓰레기 같은 생각이구나.
‘그럼, 여기까지 온 애를 그냥 돌아가라고 합니까? 예?’
어쨌거나 내 말에 한서현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모래를 사방에 풀었다. 쥐돌이와 새돌이도 움직이고 있었으니 니키의 위치는 곧 드러날 거다.
나는 한서현에게 내가 아는 정보를 모두 말해 주었다.
“흠, 확실히 이상하네요. 굳이 그 사람만 따로 빼서 데리고 간 게요.”
“그래.”
굳이 우리와 니키를 구분해서 가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가장 걱정되는 건 어거스트가 정신계 능력자라는 점이겠죠.’
그 녀석의 암시는 분명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주변 아티팩트와 공명해 순간적으로 그 수준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었다.
시전자에게 부담이 되는 방식이라 본인도 그리 즐겨 쓰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순간적이나마 세뇌에 버금가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거지.
거기에 만약 그 능력을 더욱 증폭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다면…….
“니키라는 사람,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는 거예요?”
“아까 검색해 봤는데 니키라는 이름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뜨지 않던걸.”
차송진의 말에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나 또한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미국 헌터들에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소속 헌터가 백 명이 넘는 대형 길드라면, 그래도 알 법한데.
“니키라는 건 아무래도 본명이 아니라 가명이나, 애칭 같아요.”
“하긴, 도박을 하러 왔으니 본명을 숨길 법도 하지.”
음, 뭐. 니키가 어떤 사람이든 그게 중요하겠나.
“일단 구해 주기나 하자고.”
“그 사람을 구한 다음에는요?”
“……그 갱단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지.”
정신계 능력자까지 엮어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었다면, 글쎄.
“가만히 둘 수는 없지, 그런 놈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