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58 사기꾼과 거짓말쟁이 (6)
[잡혀갔대서 걱정했는데, 여기에 와서 웬 아저씨를 꼬시고 있네…….]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연 에디가 눈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나저나 너희 보스, 취향이…….]
[아니, 아니야!]
차송진은 황급히 말을 던졌다. 여기에서 에디의 말을 그냥 뒀다간 강이신의 이미지가 더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할 것 같았으니까.
[으, 으음. 일단은 아니라고 믿어 줄게.]
에디는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차송진도 할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단 부정은 했는데, 중년 남성을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운명을 믿어요?’라는 말을 하다니.
‘그러고 보니 저 인간, 나한테는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말했었잖아?’
저런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다니는 사람은, 무슨 무슨 법에 의해서 잡혀가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차송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치를 떨 때였다. 옆에서 한서현이 차송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뭐라는데요?”
“음, 날 믿어. 너는 저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듣고 싶지 않을 거야.”
“왜 그걸 멋대로 판단하세요? 내가 듣고 싶을 수도 있는데!”
멘탈을 보호해 주고자 했을 뿐인데, 뾰족한 대답이 돌아왔다. 차송진은 머릿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겼다.
그래,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피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참자, 눈앞에 있는 애는 짱 센 네크로맨서다.
참자.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저 녀석을 이길 수 없다. 아니, 저 녀석에게 지게 되면 죽었다 깨어나게 될 거다.
참자, 뼈다귀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차송진이 말했다.
“당장 우리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진 않아.”
정신을 잃은 채 실려 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강이신에 대한 걱정뿐이었으나, 실제로 와 보니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한서현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차송진의 말에 홱 고개를 돌린 한서현이 말했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더 기다려 보죠. 어쩌면 우리 도움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분명히 별일이 없으면 돌아가기로 해 놓고서는. 차송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툭하면 자기 몸을 갈아대는 보스를 뒀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다.
그렇게 이신 없는 이신 팀은 일단 어둠 속에 숨어 이어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 * *
운명을 믿어요?
내 말에 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존 스미스의 팬이었던 내가, 하필이면 이런 꼴로 당신 앞에 떨어진 게 꼭 운명처럼 느껴지지 않냐는 거예요.”
“어, 음…….”
“언제까지 여기에서 나쁜 짓이나 거들면서 살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도망치면, 제 동생이 위험해져서요.”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 동생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믿어요?”
내 질문에 존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내게 동생을 잘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 다이애나라는 사람이 보스인 모양이지?
그녀를 믿고 말고야 존의 자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존의 동생은 이미 옛날에 죽었다. 이건 존의 입으로 들은 말이니 정확할 거다. 자신은 이미 죽은 동생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했다고 들었으니.
“단 한 번이라도 이곳에서 동생을 만난 적이 있어요?”
“내 상황이 누굴 만나기에 그리 좋진 못하잖아요.”
“그럼, 동생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본 적은요? 전화해 봤다거나, 사진을 봤다거나.”
내 말에 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없어요.”
“알잖아요,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필요가 없어진 골칫덩어리를 살려 두는 사람은 없어요.”
존과 달리 그의 동생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는 해도, 마약에 손을 대고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형의 인생까지 말아먹은 남자를 나는 안타깝다고 동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녀석만 아니었더라면 존은 평범한 삶을 살았을 테니까. 비록 더럽게 인기가 없는 아나운서라고 놀림을 받았겠지만.
“내, 내 잘못인가요?”
“뭐라고요?”
“내가 필립을 찾지 않아서, 그래서 다이애나가 그 녀석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그 녀석을 자주 찾았다면, 그랬다면 필립은 죽지 않았을까요?”
정말로 빌어먹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다.
“아니요.”
나는 딱 잘라 말해 주었다.
“그 녀석의 죽음에 당신의 잘못은 조금도 없어요. 당신이 몇 번을 건져도 그 사람은 죽을 자리를 향해 뛰어들었을 테니까.”
내 냉정한 말에 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녀석을 외면한 것도 사실이에요. 솔직히, 어, 여기에 오고 나서 일부러 그 녀석을 찾지 않았어요. 이 정도 했으면 됐지, 싶어서…….”
땅을 파는 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존을 향해 말했다.
“이미 충분히 그 녀석을 위해 희생했잖아요. 아나운서를 때려치우고 여기에 있는 것만 봐도 뻔한데, 뭐!”
“사실 나는 그다지 인기도 없었고…….”
“그래도 당신 일을 무척이나 좋아했잖아요. 라디오에 흘러나갈 멘트를 쓰는 것도,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어 주는 것도…….”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무 데서도 말한 적 없는데.”
“팬이었다고 했잖아요. 라디오를 듣다 보면 그런 것쯤은 팬심으로 알 수 있어요.”
내 말에 존은 순수한 얼굴로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네요!’ 하고 말했다. 저 정신머리로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는지는 의문이지만, 덕분에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말해 봐요.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요?”
내 손과 발을 묶고 있는 매듭을 바라본 존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보통 지금 상황에선 우리 대사가 서로 바뀌어야 맞을 텐데요.”
하긴, 손발이 묶여 있는 상대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작은 얼음 창을 만들어 냈다. 공중에서 나타난 얼음 창은 내 손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단번에 끊어 냈다.
“와, 와우.”
“언제든 나갈 수 있었어요.”
“그, 그렇겠네요. 굳이 내 도움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굳이 인기척을 내고 존에게 말을 건 것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제야 내 눈빛에 담긴 뜻을 이해한 존이 입을 열었다.
“왜 나를 구하려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그쪽 팬이라고.”
뻥이 아니다.
나는 존이 진행을 맡은 라디오를 끔찍하게 사랑했으므로.
* * *
존은 내가 하얀색 방에서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단둘이 지하실에 갇혔으면서, 존은 나를 대할 때 단 한 번도 짜증을 낸 적이 없었다.
다짜고짜 나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설록진은 나와 존을 작은 전자사전과 함께 그 빌어먹을 방에 가두었고 덕분에 존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나는 그 조그만 전자사전을 온종일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어라고는 아주 기본적인 것밖에 하지 못하던 나에게, 이 파란 눈을 가진 신사와의 대화는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존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괜찮아요.’였다.
존은 뭐든지 괜찮다고 말했다.
실수해도 괜찮아요.
짜증을 내도 괜찮아요.
내가 화를 내도, 욕을 해도.
모두 괜찮다고만 했다.
막상 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음에도, 존은 그 상황에서조차 나를 배려했다.
그의 배려로 나는 겨우 정신을 잡고 그에게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지방 방송국의 아나운서였다는 그는 자신이 진행했던 라디오의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쓸 만큼 글솜씨가 좋았고 내게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존은 마치 라디오의 진행자가 된 것처럼 내게 매일 아침 새로운 오프닝 멘트를 읊어 주었고, 나는 존의 라디오를 통해 그의 세상을 배웠다.
“유난히 해가 반짝이는 날입니다. 이런 날은 사실 무얼 해도 기분이 좋지만, 쭉 뻗은 도로를 달리는 것만큼이나 상쾌한 일은 없죠. 여러분들의 드라이브 친구가 되고 싶은 제 마음을 담아,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로 오늘의 아침 라디오 시작하겠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존의 노래 실력은 끔찍했지만, 나를 웃기기에는 충분했다.
존의 오프닝 멘트를 들을 때면, 지금 상황을 잊고 눈을 감은 채 내가 미국 서부를 달리고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존과 갇혀 있던 시간을 나는 아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존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록 내 가슴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존과의 수업이 끝난 뒤, 설록진은 존을 살려 둘까.
여태까지의 패턴을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었다.
“왜 그래요?”
“존, 당신은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어렸고, 내 속마음을 현명하게 숨길 줄을 몰랐다. 존에 대한 죄책감에 나는 내 걱정을 그에게 옮기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여태까지 이 방에 나와 함께 갇혔던 사람들은 거의 살아 나가지 못했다고.
존에게 그 말을 한 날, 나는 존의 눈동자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존은 늘 나를 위로했던 대로 따스한 말을 건네주었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러지 말아요. 나를 위해서라도 우리 마지막 날까지 행복하기로 해요. 그거면 난 됐어요.”
내 어깨를 두드린 존은 다음 날에도 똑같이 내게 새로운 뉴스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아나운서를 관둔 거예요? 이렇게 잘하는데.”
“글쎄, 이름 때문이려나.”
“이름?”
“아무래도 존 스미스라는 이름은 공인으로서는 꽝이니까요. 너무 흔하고, 너무 기억에 남지 않으니까.”
“확실히 임팩트 있는 이름은 아니네요.”
“개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을 바꿔 버리고 싶진 않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존의 얼굴은 쓸쓸해 보였다.
“앞으로는 나를 기억하면서,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흔한 이름인 게 좋을지도 몰라요. 전 세계에 존 스미스 씨는 엄청나게 많을 테니까…….”
“내가 당신을 기억할게요.”
내가 지킬 수 있었던 약속은 그것뿐이다.
“더는 가르칠 게 없겠어요.”
“없긴 뭐가 없어요.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데. 겨우 이제 영어를 하게 됐거든요?”
“아니요, 당신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걸 다 배웠어요. 당신의 영어는 누가 들어도 완벽하다고 할 거예요.”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존은 단호했다.
“영원히 나와 여기에 갇혀 지낼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내 졸업이 의미하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이었음에도, 존은 담담히 내게 졸업해야만 하는 때가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와 싸웠고, 그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러 영어를 못하는 체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설록진이 찾아왔고 설록진은 내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인사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훌륭한 선생님’이었으니까, 해 주는 배려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바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존은 달랐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존은 다음 날, 내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오프닝 멘트로 라디오를 시작했다.
“오늘은 제 학생이 졸업하는 날입니다. 처음에는 알파벳도 제대로 외지 못했던 그 친구가, 어느새 아나운서를 해도 될 만큼 멋진 영어 능통자가 되었네요. 기쁘고 또 기쁩니다. 제 학생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조금 넓어졌을 테니까요. 오늘, 제 학생을 위해 마지막으로 노래를 추천하고 가죠. 존 레논이 부릅니다. 블레스 유.”
겨우 정을 준 내 첫 번째 선생님을,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다. 울부짖으며 눈물만 흘려대는 나에게 존이 말했다.
“이신, 나는 있잖아요. 이신이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존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죽는 걸로 도망칠 수 있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요. 당신을 두고 도망쳐서.”
그는 끝까지 내 걱정만 하다 간 바보 같은 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