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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03화 (203/352)

제203화

#57 라스베이거스 (7)

나라고 매번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블러핑을 치는 건 아니었다. 좋지 않은 패가 들어오면 일찍 죽기도 했고 패가 풀리는 걸 보고 중간에 패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 말할 만한 승률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하는 거냐?

‘거짓말을 잘하려면 상대방을 잘 읽어야 하거든요.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제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알아내는 거죠. 어떤 말이 먹히는지, 어떤 행동이 상대방을 뒤흔들 수 있는지.’

━허,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인데?

‘훈련을 받지 않는 민간인들을 읽는 거야 뻔하죠.’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몇 번이나 다른 사람들의 속을 읽어대야 했던 나에게 이 테이블 위의 환경은 편안하기 짝이 없었다.

감정을 숨기는 걸 훈련받은 전문 요원도 아니고,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거든.

몇몇은 제법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그래 봤자다.

‘미세 표정이라는 게 있어요. 어떤 상황을 마주하고 순간적으로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인데, 그 표정을 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죠. 얼굴이 아니더라도 행동적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요.’

딜러의 앞에 공유 패가 다섯 장이나 깔리는 텍사스 홀덤은 드러나는 정보가 많은 만큼 심리전이 주를 이루는 종목. 답안지를 보고 포커를 치는 셈이니, 내가 질려야 질 수가 없지.

외부인이 돈을 쓸어 가는 상황에 다른 곳이었다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법도 했지만, 다행히 이 테이블은 여전히 분위기가 좋았다.

돈을 잃을 때마다 뚱한 표정으로 나에게 ‘정말 전문 도박꾼 아니야?’ 하면서 퉁을 놓긴 해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니키 덕분이었다.

거기에 니키를 좋아하는 길드원들이 던지는 말도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악당 역할을 해 주겠다더니, 확실하네.”

“악당이 오기 전에도 나는 이미 탈탈 털리고 있었는걸.”

“아하! 그때의 악당은 니키였지.”

“너희 다 내가 만든 길드의 길드원이거든?”

니키의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너한테 탈탈 털리는 주제에, 이렇게 분위기가 화기애애해도 되는 거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애초에 돈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어서 그런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 수만은 없지.

내가 이긴 판이 두 손가락을 넘어가기 시작한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행동에 니키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이기고 빼겠다는 거?”

“예.”

내 말에 니키가 입술을 쭉 내민 채로 말했다.

“악당 역할을 해 준다면서. 원래 마지막에는 용사님이 악당을 물리치는 그림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여기가 동화 속이라면 그렇겠지만, 알잖습니까. 현실에서는 악당이란 놈들은 늘 적당히 빠져나간다는 거. 그러니까 저는 여기까지 하죠.”

“그럴싸한 소리라서 어이가 없네.”

“그러니까.”

리아와 저드의 말에 이어 테이블에 둘러앉았던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내게 말을 던졌다.

“어쨌거나 즐거웠어.”

“응, ‘그’ 니키가 이렇게 털리는 건 또 오랜만이니까.”

“하하! 그럼. 아까 죽을 때까지 가 보자고 해 놓고는 결국 폴드했을 때, 더럽게 웃겼지.”

깔깔 웃음을 터트린 길드원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

“니키는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다들 나를 아주 신나게 놀리는구나!”

“그동안 우리를 벗겨 먹었던 걸 생각해. 심지어 저스틴이랑 게릭은 포커 룰을 아직까지도 이해 못 했다고!”

“이해했거든.”

“이해한 사람이 아메리카 에어라인을 들고 죽냐?”

“그동안 우리의 ‘악당’은 니키였다는 거지.”

그 말을 듣고 있던 니키의 입술이 점점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거 우리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저 사람들은 저 업보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렇게 떠들어대는 건지 모르겠구나.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재빨리 도망쳐야겠습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하, 그럼 저는 이만…….”

“잠깐만!”

니키가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목을 잡았다. 어찌나 빠른지, 순간 잔상이 보일 정도였다.

팔찌가 빛나지 않은 걸로 봐서 이건 순수한 신체 능력이었다.

나는 내 손목을 잡은 니키의 손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니키는 재빨리 손을 뗐다.

“뭡니까?”

“내일도 여기 올 거야?”

니키의 말에 나는 눈을 굴렸다.

“그건 왜 묻는 겁니까?”

“내일은 꼭 그쪽을 한 번은 이겨 보고 싶거든.”

승부욕이 발동한 건가. 애초에 이기기 위해 게임을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을 놀리는 길드원들 때문에 호승심에 불이 붙어 버린 모양이었다.

“나도 오늘 그쪽 얼굴을 아주 열심히 봤단 말이지.”

니키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성애적인 관심은 아니다. 그녀의 눈에는 나를 이겨 먹겠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고 있었으니까.

“글쎄요, 그쪽 테이블을 내일도 털어먹었다간 정말로 악당이 될 것 같아서…….”

“내 친구들을 걱정하는 거라면 상관없어. 그쪽이 아니더라도 나한테 다 털렸을 테니까.”

“그래도 되는 겁니까?”

매번 그렇게 털어먹는데도 용케 친분이 유지되는군.

내 질문에 니키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다음 달 길드에 낼 상납금을 줄여 준다고 하면 돼.”

“길드를 그런 식으로 운영해도 되는 겁니까?”

내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구긴 니키가 내 질문을 무시한 채로 내게 물었다.

“할 거야, 말 거야?”

“나야 상관은 없지만…….”

오늘 니키 혼자만 나한테 잃은 돈이 몇억은 되는 것 같은데, 그냥 나를 한 번은 이겨 보고 싶다고 다시 승부를 청하다니.

하긴 이들에게 포커 게임은 놀이일 뿐이니까. 판돈이 얼마나 걸렸든 말이다.

“내일, 점심 먹고 여기서 보자고.”

“예에.”

내가 마지 못해 내일도 여기로 오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니키는 나를 놔주었다.

뒤에서 길드원들이 니키에게 휘파람을 불며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내일도 탈탈 털어 줄 생각이냐?

‘그래야죠.’

미국에서 잘 나가는 헌터에게 저 돈은 껌값일 테니까.

‘누구 때처럼 성심성의껏 놀아드려야죠.’

━뭐냐, 그 삐딱한 말은.

‘오춘기라도 왔나 보죠.’

━중년의 위기 쪽이 아니라?

‘그래도 몸뚱어리는 어리잖아요.’

━말은. 그래서 뭐가 불만인데? 저 여자가 너를 휘두르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니키 같은 타입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을 손에 쥐었으며, 그 성공을 감출 생각도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을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다만 이 카지노라는 공간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다.

‘저기에서 불과 몇 발자국을 더 걸으면, 도박이라는 것에 인생을 전부 갖다 바친 사람들이 나오니까요. 그들보다 수십 배가 더 되는 돈을 쓰면서도 이 모든 걸 놀이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보자면…….’

뭔가 이 세상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그런 생각도 잠시. 직원의 앞에 선 나는 팔찌를 들이밀었다.

“정산해 주시죠.”

음, 팔찌가 무거워서 손을 다 들 수가 없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만.

‘역시, 옛날 카지노가 훨씬 더 좋다니까요.’

돈을 아무리 벌어도 버는 느낌이 안 든다니까? 나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직원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깐 사이 내가 번 돈은 13억.

‘잠깐 포커를 친 거치고는 과분한 돈이죠.’

* * *

카지노에서 나오니 석양에 물든 하늘이 나를 반겼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즐겼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그 판은 제법 재미가 있었거든.

‘내일까지는 니키네 일행과 어울려 주고 그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호구 짓을 좀 해야겠습니다.’

내 주변으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떡밥을 뿌려야, 나를 낚으러 올 테니까.

일행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발을 옮기는데, 카지노의 입구 그 앞에 주저앉아 있는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는 히스패닉계 아이였다. 이제 겨우 열 살은 되었을까. 자그마한 뒤통수를 보는 순간 발이 멈췄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카지노에 올 이유는 하나뿐이다. 저 안에 이 어린애의 보호자가 있는 거겠지.

카지노에는 출입이 금지되니, 어쩔 수 없이 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겠고.

꼴을 보니 이미 보호자에게 방치당한 지 꽤 되어 보였다.

━저런 어린애가…….

평소라면 내게 또 그놈의 오지랖이 발동한 거냐고 퉁을 놓았을 레이 또한 꼬맹이의 행색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래서 제가 도박꾼들을 싫어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오로지 하나에 매달리니까.

지금 내 상황에, 저 어린애를 챙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장 돌아가서 우리 애들이나 챙겨야지.

이성이라는 놈은 내게 그렇게 속삭였지만, 막상 꼬질한 아이를 앞에 두고 나니 도저히 발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하아.”

나는 결국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뭐 해, 꼬맹아?”

“……알 거 없잖아요.”

“알 거 있는데. 너 같은 꼬맹이가 이런 데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은 말이야. 나 같은 소시민은 저 카지노에서 마음 편하게 도박할 수 없게 되거든.”

“왜요?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너하고 상관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니까.”

내 말에 꼬맹이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래서, 뭐요.”

척 보기에도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녀석이다. 지나가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동정에 기대느니, 그 사마리아인의 지갑을 터는 쪽을 선택할 타입.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툭 말을 던졌다.

“아르바이트 하나 할래?”

“‘그런 짓’ 안 해요.”

내 말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니, 여태까지 이런 제안을 몇 번이나 들은 건지 꼬맹이의 눈빛이 바로 변했다.

“뭐?”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오면 소리 지를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졌다. 아이는 나에게서 두어 걸음 멀어졌다.

“아니, 오해야. 나는 절대로 그런 짓 안 해. 아니,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하. 하. 참 믿음이 가는 말이네요.”

열 살짜리 꼬맹이가 보이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까칠한 반응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빌어먹을 놈의 새끼들. 대체 이 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순수하게 애를 도와줄 생각인 나 같은 착한 사람들만 곤란해지잖나.

나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여기에서 괜히 더 접근해 봤자 결과는 더 안 좋아질 테니까.

━그렇다고 그 애를 그대로 두고 갈 생각이냐?

‘저런 타입은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핫도그 하나가 더 잘 통하거든요.’

나는 근처 푸드 트럭으로 갔다. 나는 핫도그를 두 개 시켰다. 하나는 할라페뇨 잔뜩, 하나는 할라페뇨를 뺀 순한 맛으로.

핫도그를 들고 온 나는 꼬맹이의 앞에 주저앉았다.

“뭔데요.”

“아저씨가 밥을 혼자 못 먹는 병이 있어서 말이야. 저 앞에서 파는 거 그대로 가지고 왔으니 뭐, 이상한 거 탔느냐는 둥 이상한 말은 하지 말고.”

바로 앞에 있는 푸드 트럭이다.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내가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겠지.

내 손에서 잽싸게 핫도그를 채가는 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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