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57 라스베이거스 (4)
바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곧바로 맥주부터 시켰다.
[그쪽도 한 잔.]
에드워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술은 안 해서.]
[뭐? 그럼 왜 따라온 건데.]
[그냥 같이 말이나 나눌까 해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대화는 가능하잖아. 바텐더, 여기 시원한 물 한 잔이요.]
내 말에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만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흔들었다.
[그리고 그쪽 지갑이나 돼 줄까 했지.]
에드워드는 맥주잔을 쥔 채로 고개를 돌렸다. 잔뜩 얼굴을 구기면서도 거절은 하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바텐더가 건넨 시원한 냉수를 들이켰다.
머릿속으로 레이의 말이 들려왔다.
━술을 안 한다는 건 진짜냐, 아니면 저 녀석을 속이기 위해 그냥 한 말이냐?
‘거짓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술을 잘 못 하거든요. 사실 술을 마셔 본 적도 몇 번 없고요.’
━그거 의외인데. 네가 말하는 것만 들으면 전생에 술독에 빠져 살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거든.
확실히 내가 이런저런 접대 자리에 많이 끌려 나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접대 자리에서도 나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설록진 그놈이 먹지 말라는 걸 어떡합니까. 자기 세뇌에도 멀쩡한 내가 알코올 따위에 져서 해롱거리는 게 자존심 상한다나?’
그것도 있고, 술에 취한 내가 진상 짓을 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변 말을 들어 보면 설록진 멱살을 잡고 정호산을 살려 내라며 엉엉 울면서 난동을 부렸다던데, 용케 그 성격에 날 안 죽였지.
‘술은 물론이고 담배나, 마약도 금지당했습니다. 하다못해 정신병원에서 처방받은 우울증 약도 뺏어 갔다니까요.’
━정신병원에도 갔었냐?
‘예, 하도 상황이 거지 같고 그래서 한 번 몰래 가 봤죠. 혹시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그리고 그 사실을 들켜서 설록진에게 온갖 쪽은 다 당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말하면 된다나. 내게 정신병이 온 이유가 뭔지도 이해 못 하는데, 참 잘도 말하겠다.
‘게다가 술에 취한 진상들을 어찌나 많이 봤는지. 술이라는 놈에 질릴 대로 질려서요.’
전생이든, 현생이든.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에드워드는 연거푸 맥주 두 잔을 물처럼 들이켰다. 입가를 닦은 에드워드가 그제야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나랑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날 따라온 건데?]
[우리 팀에 들어오고 싶다는 거, 진심 아니지?]
내 질문에 에드워드는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떨었다.
[허,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원래 사람은 패닉에 빠지면 아무 짓이나 하기 마련이거든. 그냥 앞에 보이는 게 우리였으니까 이쪽으로 달려든 거잖아. 정말로 우리 팀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잖아. 그랬으면 우리가 하는 짓이 뭔지, 우리가 어떤 놈들인지 물었겠지. 하지만 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어.]
내 말에 에드워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뭐.]
에드워드가 얼굴을 구기며 내게 말했다.
[진심이 아니면, 나를 쫓아내기라도 하려고? 상관없잖아. 내가 뭘 원하든. 나 잘해, 뭐든. 그게 중요한 거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그쪽 업계는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팀은 이미 꽉 찼어. 그리고 말했지만, 우리 팀은 인성을 봐서. 그런 이유에서라면 들여 줄 수가 없거든.]
[씨X. 그놈의 인성.]
━곧장 욕부터 내뱉는 걸 봐서 충분할 것 같다만…….
나는 레이의 말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원하면 신분을 바꿔 주고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을 돕겠다고. 굳이 우리한테 합류하지 않아도 돼.]
어쭙잖게 빌런이 되겠다고 날뛰는 것보다는 이쪽이 백 배는 괜찮은 선택이 아니냐고.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그런 상식적인 선택이 통하는 놈이 아니었다.
[그래, 좋아. 조용히 숨을 죽이고 새 삶을 찾는 거, 좋다고. 하지만 그래서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같은 건 못되잖아.]
[그게 당신 목표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그래.]
그러고 보니 테이카 쿠퍼보다 잘난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하긴 했었지. 진심이었구나, 그거.
[그걸 위해서 여태까지 그 고생을 하면서 달려왔는데…….]
이래저래 악에 받쳐 있는 상태에서 충고를 건네 봤자 내 말은 소귀에 경 읽기겠지.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물어야겠다.
[왜?]
[뭐?]
[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저런 목표에 ‘그냥’이라는 이유는 없다. 분명 이를 갈면서 세계 최고가 되고 말리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을 거다. 이 녀석에 대해 써 내려간 기사를 봐서 그 계기가 뭔지 대충 감은 온다만, 그래도 직접 이 녀석의 입으로 들어야겠다. 그 계기라는 거.
내 질문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굳었다.
[술도 안 마시는 주제에 나를 왜 따라왔나 했더니. 인생 상담이라도 해 주고 싶은 거야?]
[원래 여기가 그런 데잖아? 처량한 인간들이 모여서 자기 인생이 제일 힘들다고 털어놓는 곳.]
내 질문에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참나.]
에드워드는 손가락을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그러더니 독한 위스키를 주문했다. 단번에 위스키를 털어 넣은 에드워드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긴, 온 세상이 내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숨길 이유는 없겠지. 뻔하잖아. 내가 세계 최고가 되어야, 그래야 그 사람이 나를 놓친 걸 죽어라 후회할 테니까.]
오승우. 그 인간도 참 죄인이라니까. 나는 에드워드의 말에 물을 홀짝이며 마셨다. 에드워드가 말을 이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이유지? 그래도 내겐 그게 유일한 목표였거든.]
말로는 우리 조직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하지만, 에드워드의 말에는 진심이 없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자포자기에 가깝다.
차라리 차송진처럼 우리를 원망했다면, 이것보다는 나았을 거다.
[뭐,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이래라저래라할 만한 사람은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뭐라 말할 자격은 없지만 말이야. 네 인생의 가치를 타인에게 걸어 두는 거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
에드워드는 내 말에 연달아 위스키를 들이켰다. 좋아, 전혀 들을 상태가 아니군.
[정말로 우리 조직에 들어오고 싶다면, 최소한 한국어는 배워 두도록 해.]
[나한테 한국어를 배우라고?]
[그래. 말도 안 통하는데 한 팀이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거야, 그쪽 애들이 영어를 배우면…….]
[뭐든지 잘 할 수 있다면서? 참고로 우리 조직의 주 무대는 한국이고, 한국어는 필수 조건이야. 싫으면 뭐, 어쩔 수 없이 우리 조직 면접에 탈락하는 것으로…….]
[배워! 배우면 되잖아!]
얼굴이 시뻘게진 에드워드가 외쳤다. 레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레이의 말에 내가 답했다.
‘다 생각이 있거든요.’
━어째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은데.
에드워드와 이야기를 마친 나는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녀석을 부축했다. 술값을 확인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텐더에게 카드를 건넸다.
‘다시는 저 술고래에게 술을 사 준다고 말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술은 역시 만악의 근원이다.
* * *
다음 날 아침. 스위트룸으로 건너간 나는 모두를 불러 모아 중대 발표를 했다.
“내가 일을 보는 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에서 공부할 거다.”
“공부요?”
“그래, 마침 원어민 교사도 생겼겠다. 이번 기회에 영어를 배워 두면 좋잖아?”
에드워드를 원어민 교사로 고용한 건, 농담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영어를 배워 두면 두고두고 잘 써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거라도 시켜야지 술값을 하지.”
“밥값도 아니고 술값?”
차송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그 말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배우는 건 영어뿐만이 아니야.”
“그 인간한테 또 뭘 배우라고요.”
“에드워드가 가르치는 게 아니야. 모두가 한 과목씩을 맡아 가르칠 거다.”
이번에 느낀 거다. 다들 어렸을 때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해선지, 여러 가지로 모자라는 점이 많다는 거 말이다. 특히 김재호의 국어 실력이라든가, 국어 실력. 음, 그리고 국어 실력 말이다.
게다가 에드워드 혼자 교사를 하면 불균형이 일어날 수 있지도 않은가.
━무슨 불균형?
‘혼자 교사라고 거들먹거릴 수도 있잖아요.’
겨우 영어를 잘하는 것뿐이면서 우리 애들한테 거들먹거리게 둘 수는 없지.
“서현이가 에드워드와 재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예? 그놈한테 한국어를 가르치라고요?”
“그래.”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알겠지만, 그놈한테는 왜…….”
“이왕이면 다 같이 배우는 게 좋잖냐.”
한서현은 내 설명에 영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덕 시간도 있으면 좋겠는데…….”
처음에는 내가 가르칠까 싶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게다가 설록진과 대략 십 년을 붙어먹으며 타락할 대로 타락한 내 시꺼먼 양심으로 누군가에게 도덕에 대해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기도 하고 말이다.
뭐, 내장형 양심인 레이를 달고 있으니,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말을 옮기는 게 너무 귀찮아서 그만.
도덕까지 한서현에게 맡길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한서현도 그리 좋은 도덕 선생님은 못 될 것 같았다.
김재호에 가려져서 그렇지 한서현도 사실 위험한 녀석이었다. 음, 그렇지. 한서현이 스켈레톤 계약 중독 증상에 시달린다는 걸 잊지 말자고.
어쨌거나 도덕은 중요하다, 중요하고말고.
어쨌거나 그 중요한 수업을 맡을 적임자는…….
“그쪽이 도덕 선생님을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차송진은 내 말에 어깨를 크게 들썩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내, 내가?”
“응.”
나와 한서현, 김재호는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들이었다. 한서현은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한서현도 무데뽀 기질이 상당하지.
반면 차송진은 겁이 많다. 겁이 많다는 건 단점이기도 했지만, 장점이기도 했다. 행동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 생각이 차송진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왜냐, 차송진은 좋은 녀석이니까.
“내가 어떻게…….”
“당신은 좋은 사람이잖아. 뭐가 옳고 그른지, 뭘 해서는 안 되는지 그런 걸 말해 주기에 당신보다 적당한 사람은 없어. 아주 기본적인 거여도 좋으니까,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말해 주면 돼.”
“하지만 그게, 그쪽들은 악당이고…….”
“그래, 우리가 그동안 사람을 좀 죽였지. 알아, 나쁜 짓이라는 거. 그래도 그게 나쁜 짓인 걸 알고는 해야 하잖아.”
생각해 보면 김재호에게 그동안 참 몹쓸 짓을 했다 싶었다. 음, 지금에라도 제대로 가르쳐야지.
“정말 내가 가르쳐도 되겠어?”
“딱 적임자야.”
나는 차송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아침에 사 온 메모지를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제대로 된 교재를 구하기 전까지는 아쉽게도 이걸로 때워야겠어. 일단은 교재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대체 어떤 학교가 교재부터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요?”
“그럴싸하게 홈스쿨링이라고 말할까?”
“……홈스쿨링도 이런 식으로 교재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럴싸하게 홈스쿨링’이라니 그거 완전 영어 사대주의에 걸려든 사람이나 할 법한 말인데요.”
내가 옛날 옛적에 영어 사대주의라고 말한 걸 담아 두고 있었군. 역시 한서현은 속이 좁군.
“그리고 그 어떤 학교가 이렇게 교사와 학생이 바뀌는데요.”
“원래 삶이라는 건 순환하기 마련이잖아. 지식도 그렇지. 음, 지식에 절대적인 건 없는 거야. 사람이라면 언제나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타인에게 배우려는 노오력을 해야만…….”
“너희 보스 그럴싸한 말로 회피한다.”
나는 충격에 젖어 차송진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순하던 차송진이 맞나? 저런 말을 하다니! 가만히 차송진을 바라보던 한서현이 툭 말을 던졌다.
“이제 형 보스이기도 하거든요?”
“아하, 그랬지.”
그 사이에 둘의 사이가 참 훈훈해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큼, 헛기침을 내뱉은 나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이제 상의해서 시간표를 짜고, 수업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 봐. 에드워드와 소통은 도덕 선생님이 맡아. 그쪽이 가장 영어에 능숙한 것 같으니까.”
내 말에 차송진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여기에서 날 빼면 가장 영어 능력치가 높은 건 차송진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
어떻게 제대로 학교도 나오지 않은 차송진보다 한서현이 더 영어를 못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럴 수가 있더라.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이 참이었다.
“그리고…….”
“잠깐, 질문이요.”
내 말이 끝나기 전 한서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에드워드가 영어를, 내가 한국어를. 그리고 송진이 형이 도덕을 가르친다면 재호 형은요?”
그래, 김재호가 있었지. 안 그래도 김재호가 입을 삐쭉 내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탁, 발로 땅바닥을 차는 꼴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음, 애써 무시했는데. 더는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군.
“우리 재호는 체육 선생님을 하도록 할까요?”
“이 방 안에서요?”
“그럼, 저글링?”
“전 몸에 구멍이 뚫려서 죽고 싶지 않은데요.”
“좋아, 재호가 무얼 가르쳐 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도 오늘 할 일이야.”
“이게 뭐야!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잖아!”
나는 뒤에서 들리는 불만을 무시한 채로 선글라스를 썼다.
“다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빠는 돈 벌러 다녀올게요.”
━도박이나 하러 가는 거면서, 거창하게도 말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