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99화 (199/352)

제199화

#57 라스베이거스 (3)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먼저 입을 연 건 한서현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요?”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알아듣지 못하는 말 속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들은 에드워드가 재빨리 반응했다.

[거기 갈 생각이야? 여기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를?]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된다. 확실히 여기에서 사고를 친 다음에 라스베이거스에 간다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거기에서는 아주 조용히 움직일 생각이니까.]

[아니, 뭘 하려고 가는 건지는 말을 해 줘야지. 설마 카지노를 털 생각인가? 하긴 빌런이니까 카지노를 털고 싶은 것도 이해하긴 하는데……. 오! 젠장. 내가 진짜 강도단이라도 된 것 같잖아? 그, 그렇지. 나는 이제 빌런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지한 얼굴로 저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한 에드워드를 밀치고 한서현이 입을 열었다.

“거긴 왜 갈 생각인데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거기에 안 들르면 너무 서운하잖아.”

“한가롭게 관광이나 하자고요? 미쳤어요?”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도 겁을 먹은 두 눈동자를 깜빡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거 아니고,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거기서 도박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역시 도박에 대한 생각은 레이와 비슷하군. 흠, 정말 둘이 짠 거 아닌가.

━이 정도는 상식이라는 게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아주 보편적인 생각 같다만.

‘그렇게 말하면 제가 상식이라는 게 박혀 있지 않은 이상한 사람이 돼 버리는데요.’

━적어도 내 말을 이해할 지능은 있어서 다행이다.

하긴, 자금이 다 떨어졌으니 카지노에 가서 도박이나 한번 하고 올게 하면 보통은 미쳤냐며 소리를 치겠지.

“걱정하지 마, 내가 또 도박에는 꽤 일가견이 있거든.”

내 말에 한서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제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걸 본 김재호가 순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 얼굴을 본 한서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산 넘어 산이라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입을 닫고 있던 차송진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도박하러 갈 생각이야, 요?”

서로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던 걸 잊기라도 한 듯이 이상해진 말투에 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말 놓자니까.”

“어, 으응!”

여전히 어벙한 얼굴로 차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송진의 눈에 깃든 의문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무턱대고 라스베이거스로 가기 전에 한 번쯤은 제대로 상황 설명을 해 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모두에게 내 계획을 대충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에드워드는 영 알아듣지 못한 기색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영어로 다시 말하기는 귀찮으니까.

어쨌거나 결론은…….

“사고를 치러 가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누가 들어도 사고를 치러 간다는 것 같거든요?”

그런가? 그냥 평범하게 사기꾼들을 응징하고 그놈들 돈을 강탈하려는 계획일 뿐인데. 누가 죽지도 않고, 뭘 부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얌전하게 돈만 털어 오겠다는 건데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니까,”

그렇게 투덜거린 한서현이 내게 말했다.

“일단 뭐가 됐든 좋으니까 빨리 움직이죠. 이랬다간 기껏 더미를 만들어 놓은 보람도 없이 들켜 버리겠어요.”

한서현의 말이 맞다.

“빨리 짐 챙겨.”

뒷일은 음, 맡겨 둘 사람이 있으니 괜찮겠지!

* * *

“화, 환자가 사라졌어요!”

골든데이의 병실을 지키던 간병인은 병실에서 놀라 뛰쳐나왔다.

병실에서 모습을 감춘 건 중환자실에 있던 ‘미스터 차’뿐만이 아니었다. 골든데이 전원이 병원 안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당황했다.

“병원비가 무서워서 도망갔을 리는 없잖아요. 무려 그 테이카 쿠퍼가 모두 수납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실종을 깨달은 병원 관계자들은 바로 보호자에게 연락했다. 그 연락에 그들의 에이전시를 맡고 있었던 노먼 베이런이 황급히 달려왔다.

“모, 모두 사라졌다니요?”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에이전시가 되어 누릴 멋진 날들을 꿈꿨던 노먼의 행복했던 미래 계획은 그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C급 용병대의 몸으로 S급 게이트를 공략하여 화제의 인물이 된 골든데이 용병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노먼 베이런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가 들고 있던 주식이 문자 그대로 휴지 조각이 되었으니까.

* * *

라스베이거스로 가기 전 우리는 모두 가면의 얼굴을 바꿨다. 주변에 알려진 얼굴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다른 멤버들은 동양계 쪽의 얼굴을 유지했지만, 카지노에 들락날락해야 할 나는 이 주변에서 흔한 백인의 얼굴로 바꿔 두었다. 확실히 타 인종은 눈에 띄는 편이니까.

그동안 얼굴을 매번 바꿔 댔어도 외국인의 얼굴은 처음이어서일까. 멤버들이 나를 유난히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왜들 그래?”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대체 뭐가?”

“미국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알렉스 씨가 갑자기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이렇게 영어로 말하면 제법 그럴싸하지?]

내 말에 멤버들은 더 멀찍이 내게서 멀어졌다. 이거 왠지 서운한데. 나는 볼을 긁적거렸다.

순식간에 바뀐 얼굴에 에드워드는 감탄을 터트렸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바꾸고 다닐 수 있다니. 대단하군!]

감탄이야 자유라지만, 툭하면 자신의 얼굴을 손거울에 비춰 보는 게 영 껄끄러웠다.

엄청난 왕자병으로 보이잖냐!

“으으, 진짜 꼴 보기 싫다.”

순간 내 속마음이 튀어나온 줄 알았다. 역시 한서현은 가차 없군.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른 손거울을 꺼내든 채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염X, 아니, 난리를 치고 있는 에드워드가 꼴 보기 싫다는 건 나도 동의한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은 같이 가기로 한 사이인데.

내게 가까이 다가온 한서현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어영부영 저 녀석을 우리 팀에 넣을 생각이라면…….”

“아니, 이번에는 절대 아니야. 말했잖아. 임시 원어민 교사라고. 영어 실력만 쪽쪽 빨아먹고 버리자니까.”

“……송진이 형 때도 그런 식으로 말했잖아요.”

“송진이 ‘형’?”

“그야, 저보다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는 보스는 정말로 ‘차씨’라고 부를 생각이에요?”

“호칭은 조금 더 고민해 본다니까.”

“……참나.”

한서현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형이라고 부르려고 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걸 어떡하냐! 내가 더 나이가 많다니까?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요.”

짧게 혀를 찬 한서현은 공중에서 스태프를 소환해 냈다.

한서현이 거대한 스태프를 바닥에 내리꽂자 주변으로 검은색 모래가 모여들었다. 작은 소용돌이를 이룬 모래들은 이윽고 하나로 뭉쳐 거대한 새의 형상을 이루었다.

[와우, 정말 멋있는데.]

한서현이 부른 거대 새를 본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한서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역시 칭찬에는 약하다니까.

한서현이 불러낸 거대 새는 우리 모두를 태워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거기에 훨씬 움직임도 자연스러웠다. 멀리에서 보면 정말 살아 있는 새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확실히 기만자의 시련을 통과하고 나서 여러모로 능력치가 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차송진은 아예 다른 쪽으로 능력을 개화했고, 한서현은 자아를 가진 스켈레톤을 부를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김재호는 그림자 영역을 보다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건 나중에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어째 그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서부터는 다들 조금씩 성장을 한 것 같단 말이죠.’

━막상 제일 고생한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말이지.

‘저는 그냥 무사히 이 시련을 넘긴 것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새삼 내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서운해할 생각은 없다. 우리 멤버들의 성장이 곧 우리 팀의 성장이기도 하고,

늦은 밤, 우리는 무사히 라스베이거스의 MJ 호텔에 도착했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호화 호텔이 모여 있는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제일 잘나가기로 유명한 호텔로 로비부터 으리으리했다.

척 보기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인간들 사이로 추레한 옷을 입은 우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정도 묵을 생각인데, 스위트룸 남아 있습니까?]

내 말에 호텔 직원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스위트룸에는 트윈 베드 하나뿐이라 다섯 분이 머물기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바로 옆쪽에 있는 방을 커넥팅 해 드릴까요?]

크,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트룸에 그 옆에 붙은 방까지 빌리자, 하루 숙박비로만 이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 나왔다.

설록진 밑에 있을 때는 코웃음을 치면서 썼던 돈인데, 몇 달 동안 소시민의 생활에 익숙해진 것 때문인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고작 잠을 자는 데에 저렇게 많은 돈을 쓰다니…….

‘사기 도박꾼의 표적이 되려면 이런 돈지랄은 필수거든요.’

제대로 된 신분을 댈 수 없는 지금은, 이렇게 무식하게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게 가장 확실한 위장 방법이었다.

이 호텔의 최상층에 묵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들 우리가 무언가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할 테니까.

‘카지노에서 돈을 따지 못하면, 당장 사흘 뒤부터는 길바닥에서 노숙해야 할 판이지만요.’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호텔 직원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호텔 직원은 직접 방 앞쪽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카드키로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와우.]

“우와.”

방을 확인한 일행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김재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차송진은 쭈뼛거리면서도 김재호의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한서현은 창문에 붙어 창문 바깥에 아름답게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커다란 거실에 욕실 두 개, 방도 두 개. 드레스 룸까지 갖춰진 스위트룸은 과연 그 비싼 가격이 이해될 정도로 내부가 고급스러웠다. 전망도 끝내 주고 말이지.

스위트룸 내부의 침대는 세 개뿐이었지만, 바로 옆쪽 객실도 같이 빌려 두었기에 자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커넥팅 룸이라더니, 문 하나를 열자 바로 다음 방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서현이랑, 재호. 차…… 송진 씨는 여기에서 묵어. 나랑 에드워드는 저쪽 방에서 묵을 테니까.”

에드워드를 감시하는 건 내 몫으로 해 두기로 했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침대를 지정해 준 나는 멤버들에게 말했다.

“대충 씻고 다들 잘 준비해. 오늘은 일단 푹 쉬자고.”

나는 같은 내용을 에드워드에게도 전했다. 내 말에 에드워드가 뒤통수에 손깍지를 낀 채로 물었다.

[오늘 자기 전에 호텔 바에 다녀와도 돼?]

[호텔 바에는 왜?]

내 질문에 에드워드가 말했다.

[바에 뭘 하러 가겠어. 술 마시러 가지.]

이 상황에서도 술을 마시러 가겠다는 저 굵은 신경줄에 찬사를 보내야 하는 건지, 원.

[나도 돈 있으니까 안 줘도 돼.]

호기롭게 말을 던진 에드워드는 잠시 뒤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다, 좀 모자라려나? 이런 데는 많이 비싸지?]

아무래도 일반적인 주점보다야 가격대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잘나가는 용병 아니었나?

내 눈빛에 에드워드가 얼굴을 붉히곤 소리쳤다.

[그, 그쪽 부하 밥값으로 다 써서 그래! 내 지갑이 얼마나 위협 받았는 줄 알아?]

[우리 애가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뭐? 한 끼에 십 인분은 족히 먹었거든?]

음, 그랬나. 김재호의 위장이 조금 특출난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식비로 생활비가 다 털릴 정도라니.

보기보다 가난했구나…….

내 눈빛에 에드워드가 열불을 터트렸다.

[됐어! 나 혼자 다녀올게.]

나는 에드워드를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가.]

이번 기회에 저 녀석의 속마음을 한 번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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