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57 라스베이거스 (2)
라스베이거스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몇 가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야반도주다.”
━잠깐만, 야반도주하고 사전 준비라는 말은 잘 안 맞지 않냐?
‘야반도주를 하는 데에도 준비가 필요하잖습니까. 그냥 덜렁 나갈 순 없다고요?’
내 말을 들은 한서현이 말했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병원비는 테이카가 모두 내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아.”
믿는다, 세계 최강!
내 말에도 한서현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쪽은 재호 형이 옆구리에 칼을 꽂은 건, 모르는 거죠?”
아, 이게 걱정인 건가. 나는 한서현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쪽도 다 아는 일이니까.”
“아, 안다고요? 그런데도 우리 입원비 내주겠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서현이 입을 벌리고 말했다.
“돈이 썩어 나게 많은 거예요, 아니면 답도 없는 호구인 거예요?”
“아마도 둘 다?”
그보다는 친구? 까짓거 돈으로 사겠어, 하는 주말 드라마 재벌 2세 서브 남자 주인공 같은 마음이 아닐까? 음, 그리고 보통 서브 남자 주인공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지.
━정말 숨 쉬듯이 악담을 내뱉는구나.
우리끼리야 그냥 나가면 그만이지만, 중환자실에 있는 차송진이 문제다. 거기는 상시로 상황을 지켜보는 간병인이 있었으니까.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간병인의 시선을 끌고 있을 테니까 차송진을 데리고 와.”
내 말에 한서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내가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여기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쳇.”
한서현은 짧게 혀를 찼다.
좋아, 학업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키는 좋은 작전이었어. 이제 영어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하지 않을까.
━그냥 열이 받은 꼬맹이가 하나 늘어난 것 같은데.
‘서현이는 보통 늘 열이 받아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음, 그리고 몸이 찬 것보다야 열이 많은 게 좋지 않은가. 나는 차분히 한서현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사실, 작전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긴 했다.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차송진을 우리 병실로 데려온 뒤, 차송진이 있었던 자리에는 모래로 더미를 만들어 놓자는 거였으니까. 차송진이 쓰고 있는 가면까지 씌워 놓으면 이불을 들추기 전까지는 들키지 않을 수 있겠지.
━그냥 평범하게 데리고 오면 안 되는 거냐?
‘갑자기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거든요.’
우리의 퇴장 자체를 미스터리하게 만들 생각이다. 음, 그러면 지금 시달리고 있는 에드워드의 사건을 조금은 묻을 수 있겠지.
우리에게 끼어 있는 거품으로 에드워드한테 튄 똥물을 조금이나마 닦아 낼 수 있다면야, 어떻게든 이용해 주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음, 물론 그 똥물을 닦아 내는 건 내 몫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비유가 너무 더럽구나.
‘그만큼 확실하지 않습니까?’
나는 주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차송진의 병실로 향했다.
차송진의 병실에 있는 간병인을 본 나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지만 내 인사에도 간병인의 반응은 영 떨떠름했다.
왜지? 아차차, 지금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건 영 투박한 얼굴이었지. 하마터면 미남계가 아니라, 그냥 남계만 쓸 뻔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남계를 쓰면 어떻게 되는데?
‘신고당하죠, 보통은.’
큼, 큼. 속으로 헛기침을 내뱉은 나는 간병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친구는 자고 있는 것 같네요.]
[네, 막 잠이 드셨어요. 아무래도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아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나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리고 이제야 눈치챘다는 듯, 뒤늦게 간병인에게 음료수병을 건넸다.
[괜찮으시다면,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바깥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 친구가 자는 데에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아서요.]
[아, 네.]
자기 용병대의 상태를 걱정하는 자상한 용병대장 콘셉트다! 어떠냐! 넘어올 수밖에 없겠지!
━고작해야 보호자 면회를 신청하면서 그렇게까지 야비하게 말할 필요가 있는 거냐고.
‘하지만 이렇게 말해야 뭔가 더 박진감 있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막 신이 난다고요.’
나는 차분히 간병인과 말을 나누며 시간을 끌었다. 처음에는 나를 낯설어하고 경계하던 간병인도 곧 긴장을 풀었다.
간병인의 이름은 새라. 간병 일을 한 지는 7년 차가 된 나름 베테랑이란다. 음, 그렇군. 얼마 전에 결혼한 여동생이 결혼 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 같아 이쪽 일을 추천했다던 새라는, 이 일에 엄청나게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음, 그렇구만! 오늘 저녁은 라구 라자냐로, 비건인 남편을 따라 채식을 하려고 하지만 라구 라자냐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나. 삼대를 이어 내려온 특제 레시피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때, 레이의 말이 끼어들었다.
━시간을 끄는 것 치고는 엄청나게 대화를 잘 이어가고 있잖으냐! 이러다가 저 집 수저 개수가 몇 개인지까지 듣겠다! 아주 대놓고 꼬시질 그러냐!
레이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무슨 오해를 하는 겁니까.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라고요.’
━꼭 바람둥이들이 그런 말을 하지!
‘참나, 제대로 연애나 해 봤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네요.’
내 말에 레이가 말했다.
━잠깐 네가 죽었을 때가 서른하나라고 하지 않았냐? 그때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했다고?
이건 참을 수 없다.
‘……그러는 자기는 몸뚱어리도 없는 아티팩트면서.’
━…….
서로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는 대화였다.
어쨌거나 충분히 시간은 끈 것 같으니 대화는 이만할까. 인사를 건네는 내게 새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눠요.]
생긋 웃으며 병실 안으로 향하는 새라를 보며 나는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속 좁은 아티팩트의 원한이란!
아니, 진짜 내 손끝이 얼어붙고 있잖아!
‘마력 마음대로 움직이지 말라니까요!’
━얄미운 놈!
나는 레이를 달래 줘야만 했다. 정말 누굴 닮아서 이렇게 속이 좁은 건지. 그렇게 레이를 달래며 병실로 돌아온 나는 안의 풍경에 깜짝 놀라야만 했다.
“쟤 꼴이 왜 저래?”
병원복이 반쯤 벗겨진 차송진이 울먹거리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도 곱슬기가 있어 조금 방방 떠 있던 머리카락은 마치 누군가에게 쥐어뜯긴 것처럼 엉망이었고.
“으, 으엉, 으어어.”
차송진은 마치 좀비처럼 어기적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차송진을 보며 외쳤다.
“무슨 짓을 했길래, 얘, 얘가 이래?”
범인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딱 한 사람만 내 눈을 피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거든.
“서, 서현아?”
내 부름에 한서현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게, 저는 급, 급한 줄 알고!”
“갑, 갑자기 들이닥쳐서! 모래가, 막 몸을 휘감고!”
“말 안 했어?”
“말할 시간도 안 줬잖아요. 게다가 저 사람은 자고 있었고요. 그래서 그냥 자는 채로 옮기면 될까 했는데, 중간에 깨서는 몸부림을 치잖아요.”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없는 공중이었다고요!”
“모래가 받치고 있었다니까요?”
“까매서 안 보였다고!”
음. 기겁할 만하군. 자고 일어났는데 공중에 둥둥 뜬 상태였다니 말이야. 가뜩이나 겁이 많은 차송진이었으니 기겁할 만하다.
“그래서 저 꼴이 된 거군…….”
“겨우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예요. 공중에서 몸부림치는 걸 받아 주는 게 쉬운 줄 알아요?”
“나, 나는 뭐 쉬웠는 줄 알아? 진짜 주, 죽는 줄 알았다고!”
겨우 사이가 좋아졌다 했더니……. 다시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나는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쨌거나 무사히 왔으면 됐어.”
내가 말한 ‘무사히’라는 단어에 차송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내 손짓에 이내 입을 닫았다.
“일단 재호도 나와 볼래?”
내 말에 그림자에서 쑤욱 재호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차송진이 기겁했다. 왜냐? 한서현의 옆에는 재호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에드워드가 있었거든.
“그, 그림자 분신술?”
그렇다고 해도 이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림자 분신술이라니!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
[잠깐 가면 좀 벗지, 우리 용병대원이 그쪽 얼굴을 보고 싶다는데.]
내 말에 에드워드는 투덜거리면서도 가면을 벗었다.
“에드워드 시헬리스다.”
내 소개에 에드워드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미, 미친! 저, 저건 누구예요?”
“재호가 주워 왔어.”
“아냐! 자기가 따라온 거라고. 난 안 주워 왔어.”
재호의 말에 나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차송진이 패닉 상태인 얼굴로 말했다.
“세, 세상에. 저, 저 사람은 그래서 뭔데요? 인질?”
생각하는 게 왜 이렇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나온 단어가 인질이라니.
“아니, 저 친구는 임시 영어 교사다.”
“영어를 가르치자고 잡아 온 거예요, 사람을?”
차송진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안 잡아 왔다니까! 제 발로 걸어왔다고.”
“아! 협박이구나.”
저 차송진의 흔들림 없는 믿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군. 정말로 내가 나쁜 짓만 했을 거라고 믿고 있구나!
어쨌거나 새로운 멤버도 소개했겠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할 때였다.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언제까지 그쪽을 ‘임시’ 멤버로 두기가 좀 그래. 아니, 원할 때까지 ‘임시’로 둘 생각이 있긴 하지만…….”
나는 한서현과 김재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송진이 오기 전에 두 사람에게는 대충 의견을 구해 놨다. 답은 하나.
차송진 본인에게 맡기겠다는 거였다.
“벨츠머츠에 들어올 생각 있어? 없다면 대답은 전과 동일해. 나는 최선을 다해 그쪽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 줄 거야.”
전과 똑같은 제안이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그래도 나 개인으로서는 그쪽이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음, 어, 이번에는 고마웠고. 어, 덕분에 우리 모두 살았으니까. 응, 고마웠어.”
내 감사 인사에 차송진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차송진은 부산하게 눈을 굴렸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대답을 강요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은데.
그러게, 갑자기 자다 깨서 공중을 걷다가 이런 질문을 들으면 당황하기 마련이지. 나는 차송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충분히 생각하고 말해 봐.”
“어, 네!”
“그 전에 뭐 물어보고 싶은 거나 이런 게 있으면 말하고. 음, 요구 사항 같은 것도.”
그동안 차송진을 너무 막대하긴 했지. 그래도 정식 멤버로 받으려면 뭔가 전과 달라져야 하는 게 있지 않을까.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차송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 만약 제가 그 조직에 들어간다면 말이죠! 아니, 지금부터라도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바로 이렇게 말을 꺼내다니. 그동안 마음에 걸린 게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바로 차송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연상인 걸로 아는데 왜, 자, 자꾸 반말이신지…….”
차송진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겨우 그거? 내 표정을 읽은 차송진이 말했다.
“아니! 분명 내가 연상이고, 그, 그쪽은 스물두 살이고! 나는 스물, 스물다섯 쌀, 쌀인데.”
내 눈빛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발음이 이상해졌다.
그래, 확실히 내 육신의 나이는 아직 스물둘! 하지만 몸은 어려졌어도 정신은 그대로! 내 정신적 나이는 서른이 넘는단 말이다! 겨우 이십 대 중반의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존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라고 말하면 정신병원에 나를 넣으려 하겠지. 어디 적당한 말 없으려나. 어린 주제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랑 맞먹어도 괜찮을 듯한 그런 멋진 변명이.
“내가 정신연령이 좀 높아서 그래.”
하지만 적당한 변명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건 이런 식의 형편없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내 형편없는 변명에 한서현은 순수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와, 내가 트랜스젠더는 들어 봤어도 트랜스올더는 처음 보네.”
나는 한서현을 노려보았다. 쟤는 보스 편은 안 들고!
“말은 서로 놓기로 하지, 그러면 공평한 거잖아?”
“그, 그럼 호칭은…….”
젠장! 이게 또 남았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뭐, 내가 나름 보스! 그래, 보스 위치가 있는데 형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나는 필사적으로 괜찮은 호칭을 생각해 냈다. 뭐라고 하냐! 뭐라고! 도와줘요, 지식의 샘!
━뭐, 나도 별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데.
젠장, 지식의 샘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나는 필사적인 생각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차씨?”
━세상에.
고심 끝에 나온 내 발언은 모두의 비난을 샀다.
“와, 그것참…….”
한서현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으며, 차송진은 경악하며 내게 “그게 최선이에요?”라고 물었고 김재호는…….
아니, 관심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이 모든 상황을 알아듣지 못하는 에드워드와 똑같은 표정이라니.
심드렁한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기운이 쑥 빠졌다.
“어쨌거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빨리 여기에서 나가야 해!”
필살 주제 돌리기!
일단 차송진에 대한 호칭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