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96화 (196/352)

제196화

#56 한 걸음 앞으로 (4)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나에게 첫 번째 제안을 했던 사람을 찾을 수 있었어.”

박철완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죽었더군.”

그 말에 도채희는 숨을 들이 삼켰다. 박철완의 말이 이어졌다.

“그다음으로 왔던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는 내게 세 번째로 온 사람을 붙잡았어. 그리고 물었지. 도대체 누굴 위해 일하는 거냐고. 이대로 나가면 당신은 죽는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아니,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했지. 마치,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대신 내게 편지를 건넸어.”

박철완은 떨리는 손으로 남자가 건넨 편지를 펼쳐 보았다.

「내 뒤를 캐는 일이 재밌었길 빕니다.

나는 아주 재밌었거든요.

이번에도 제안을 거절할 생각인가요?」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남자는 나를 밀치고 사라졌어. 그리고 내가 찾았을 때는…….”

박철완의 몸이 덜덜 떨렸다. 듣지 않아도 그 대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채희는 박철완이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이었다.

죽었겠지. 죽은 채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나한테 왔던 사람들 말이야. 모두가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어. 그날 전까지 그 어떤 이상한 행적도 보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알아? 그냥 평범하게 출근하던 회사원, 식당 주인, 아르바이트생, 대학생…….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

그렇게 말한 박철완이 도채희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박철완의 질문에 답한 건 도채희가 아니었다. 충격에 쉬이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박철완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그 제안을 보낸 이가 누구든,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하게 살던 사람을 이런 일에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지. 그리고 겨우 ‘말 한마디’를 전하는 데 사람의 목숨을 날려 버릴 만큼 잔인한 놈이라는 뜻도 되고.”

도채희는 떨리는 눈으로 박철완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겨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요?”

“그래.”

차라리 그들이 모두 범죄자, 그러니까 ‘이런 일에 쓰이고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범죄자들이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자기도 모르게 든 생각에 구역질이 다 나올 정도였지만, 확실히 ‘평범한 사람’까지 이런 일에 끌어들인 것에 대해 더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겨우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이는가. 그리고 어떻게…….

“완벽한 살인이었어, 채희야. 나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와서 직접 말을 건네고 편지까지 건넨 사람들이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나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어. 아무 증거도 없었다고.”

“살해당한 거라면…….”

“경찰은 사고사로 결론을 내렸어. 혹은 자살이거나. 주변 지인들마저 단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깔끔하게 인정할 만큼 깔끔한 사건들이었지.”

그 모든 살인은 정황을 알고 있는 박철완만이 살인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처리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범죄와 얽힐 일이 없이 살던 사람이 이런 일에 엮이는 것도 이상한데, 그들이 죽기까지 하고 그 모든 살인 사건 또한 사고로 깔끔하게 끝이 난다니.”

차라리 신이라는 존재가 박철완을 가지고 노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빨랐다. 그 정도로 그 모든 일련의 사건은 박철완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이 도착했다.

곱게 접힌 편지지를 들고, 해맑게 웃는 얼굴과 함께.

떨리는 손으로 박철완은 편지지부터 펴 보았다.

「슬슬 지겨워지는데 우리 이번을 마지막으로 할까요?」

그 쪽지로 알았다.

‘제안’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는 걸. 이제는 정말로 확실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걸.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학생을 바라보며 박철완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안을 거절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박철완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소름이 돋았다.

확실히 박철완은 제안을 건넨 자가 말하던 진실에 닿았다.

박철완은 이 제안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어떻게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어.”

박철완의 말에 도채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구겨진 얼굴을 한 그를. 도채희는 감정을 덜어 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싫으면?”

죽는 수밖에는 없다. 제안을 건넨 자가 누구든, 그는 그 점을 확실하게 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도 이런 진창으로 끌어들여 이 세상 누구도 모르게 치워 버릴 수 있는 자다.

“채희야.”

박철완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도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박철완 또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의롭게 나쁜 놈들을 잡으며,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싶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 많은 길을 두고 일부러 이런 험한 곳에 왔을 만큼. 이 세계를 좀먹는 나쁜 놈들을 잡아, 이 세상을 조금은 좋게 만드는 일에 힘을 써야지.

하지만 현실은, 그가 아는 현실은 그를 그렇게 살게 두지 않았다.

그의 목에는 누가 쥐고 있을지도 모르는 목줄이 걸렸고, 그 목줄의 주인은 박철완에게 명령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 진창을 걸으라고 말이다.

그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박철완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그래서 박철완은 자신이 원하던 모든 걸 포기하기로 했다.

“도저히 용기가 안 나더라. 좋은 사람이 될 용기.”

이상했다. 나쁜 사람이 되는 데에는 조금의 용기도 필요하지 않은데,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게.

“난 살고 싶었으니까. 나쁜 사람으로라도, 살고 싶었으니까.”

이하나는 좋은 사람이다. 그 사람 하나를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오늘 박철완은 깨달았다. 그 좋은 사람에게, 자신은 더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도채희는 박철완이 애써 묻어 둔 사실을 꺼내어 헤집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철완은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너는 책임질 수 있겠냐, 채희야?”

그 질문에 도채희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잘못되면 말이야.”

“예?”

“나는 이 일에 내 목숨을 걸었다. 아니, 내가 건 게 아니지. 그쪽에서 걸어 버렸어, 내 목숨을. 내게 주어진 건 그냥 꼼짝없이 나쁜 놈이 되는 선택지 하나뿐이었거든. 아니면 죽든가.”

“아저씨.”

도채희의 부름에 박철완이 말했다.

“너는 책임질 수 있겠어, 내 목숨을?”

상대방은 박철완의 목숨을 걸었는데, 도채희는 과연 진실에 닿기 위한 노력에 무엇을 걸 수 있을까.

박철완의 질문을 이해한 도채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그러니 내게 정의를 위해서 협조해 달라는 말은 하지 말자, 채희야.”

정의라는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에 박철완은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었다.

도채희는 그제야 박철완이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 거다. 네가 나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나를 협박하고, 하나에게 내가 형편없는 쓰레기라고 말해도 말이야.”

얼굴을 구긴 박철완이 말했다.

“뭐든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래, 뭐든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픈 아내를 두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을 두고 죽을 순 없으니까.

박철완 또한 자신의 선택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기적이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흑과 백을 나누자면, 자신은 분명 흑에 서 있다고.

“게다가 말이야. 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정보 같은 거 모르거든.”

그렇게 털어놓은 박철완이 덧붙였다.

“그래, 나도 몰라. 누가 나에게 그런 제안을 보냈는지. 누가 나한테 명령을 하는 건지 말이야. 단 한 번도 직접 나를 만나러 온 적은 없으니까.”

박철완이 그의 수족이 된 지 몇 년째. 하지만 박철완은 제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 국회의원이든, 뭐든. 우리 각범부를 완전히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가라.”

박철완은 도채희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채희야.”

박철완은 도채희의 목도리를 고쳐 매어 주는 척 그녀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청 과장.”

두려운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킨 박철완이 말했다.

“나라면 거기서부터 시작할 거다.”

청 과장, 심부름센터. 겨우 그것뿐이었지만, 엄청난 소득이었다. 그 정보의 출처가 박철완이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전처럼 이 정보를 반길 수 없었다.

그녀의 목도리를 붙잡은 박철완의 손이 애처롭게 떨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절대 말할 생각 없다면서.

박철완은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도채희에게 속삭였다.

“이건 네가 책임질 일 없는, 그냥, 내 마지막 양심이나, 내 마지막 호의 같은 거야.”

박철완은 이미 오래전 정의를 포기했다.

여전히 그에게 가장 우선인 건 그와 그의 가족을 지키는 일이었고,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 이 비밀을 흘렸다고, 앞으로 도채희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각범부로 돌아가면 난 네 앞을 막아설 거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할 거고, 때로는 널 고발하고 벌주겠지. 그래야 내가 사니까. 그래, 채희야.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앞으로 무슨 짓이든 할 거다.”

박철완은 도채희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너도 언젠가는 선택해야 할 거야. 지금처럼 나를 협박하든, 뭘 하든. 그 선택에 따라 네 몸에도 검댕이 묻게 되겠지.”

단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박철완이 도채희를 아꼈던 건 진심이니까. 그녀가 끝까지 진실을 모르길 바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진실을 아는 순간, 도채희가 이렇게 반응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네 귀에는 나쁜 놈이 하는 지독한 합리화나, 자기변명 같은 걸로 들리겠지만…….”

박철완을 바라보는 도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어떤 말도 쉬이 꺼낼 수가 없었다.

“나도 이 목줄이 더럽게 싫거든, 채희야. 정말로 더럽게. 그래도 말이야. 이미 묶여 버린 걸 어떡하겠냐.”

박철완은 비겁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살아남고자 다른 이를 떠미는 선택을 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기 위해.

그 선택이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와 자신을 멀어지게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이 목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잘 가라, 채희야. 여기서 또 보자는 말은 못 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박철완은 도채희를 배웅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도채희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의 말대로 박철완은 현실과 비겁하게 타협한 사람이다.

그러니 도채희는 박철완을 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시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나쁜 사람.

흑과 백으로 나뉘어 있는 도채희의 세상에서 박철완은 분명 어두운 곳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누군가에 의해 그림자가 진 곳으로 떠밀린 사람을, 스스로 어둠으로 걸어 들어 간 사람들과 똑같이 봐야 할까.

그는 오늘 도채희의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고, 빛으로 살짝 나왔다.

물론 단 한 걸음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앞으로 내디딘 한 걸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목숨을 건 한 걸음.

차라리 박철완이 자신을 단호하게 내쳤다면, 그래서 그를 계속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책임질 자신 있다고 아직 대답 못 했는데…….’

차가운 버스의 창에 머리를 기대며 도채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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