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56 한 걸음 앞으로 (3)
박철완의 인사에 도채희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박철완은 그 미소에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자신과 그렇게 갈라선 도채희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으니까. 박철완은 뼈가 있는 질문을 도채희에게 던졌다.
“말도 없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야.”
“어머, 말을 왜 그렇게 해. 채희가 언제 그런 약속이 필요한 사이였다고.”
박철완의 말을 들은 그의 부인, 이하나는 눈을 흘겼다. 그 말에 도채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제가 정직당한 일로 아직 화가 나셨나 봐요.”
“뭐라고? 정직당했어?”
“예, 말하자면 길어요.”
도채희의 말에 박철완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설마하니, 이하나에게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전부 말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일단 얘기는 이따 하고, 자기는 손이나 씻고 와.”
자신의 말에도 꼼짝도 하지 않는 박철완을 보며 이하나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보?”
“어, 어어!”
“손 씻고 오라고. 겉옷도 잘 걸어 두고.”
“알겠어.”
얼결에 그리 대답하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박철완의 신경은 모두 뒤에 쏠려 있었다.
“채희는 수저 좀 놔 줄래?”
“저녁 먹고 간대?”
깜짝 놀라 묻는 말에 이하나가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럼 오랜만에 온 애를 밥도 안 먹이고 보내? 손이나 씻고 오라니까.”
이하나의 채근에 박철완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손을 씻고 나온 박철완은 표정을 굳히고 식당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먹음직스러운 상이 차려져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하지만 식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박철완은 억지로 첫술을 떴다.
“경찰관이 돼서 바쁜 건 알겠지만, 자주 좀 와. 이러다가 얼굴 다 까먹겠다.”
“죄송해요.”
“죄송할 정도는 아닌데, 네가 없으니까 적적해서 그래. 예전에는 이렇게 매일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었는데.”
“언제 적 이야기를 해.”
박철완의 말에도 이하나는 멈추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아주 옛날얘기를 하는 줄 알겠다. 채희가 우리 옆집에서 이사 나간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거든요, 아저씨?”
그렇게 박철완에게 퉁을 놓은 이하나가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이 못생긴 남자랑 결혼하기로 한 것도 다 채희 덕이야.”
못생긴 남자, 그 단어에 박철완의 어깨가 떨렸다. 도채희는 이하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때문이라고요?”
“그래. 너를 책임지겠다고 애를 쓰는 이 사람을 보면서 느꼈거든. 아, 생긴 거랑 재력은 몰라도 인성은 제대로 된 사람이구나.”
박철완은 그 말에 허, 하고 숨을 내뱉었다. 듣자 듣자 하니 이어지는 말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채희 또한 당황한 얼굴로 박철완을 바라보았다.
“왜요, 박철완 씨. 꼬우세요?”
그렇게 말하며 이하나는 가볍게 웃었고, 박철완도 덩달아 웃음을 흘렸다.
도채희와 박철완, 둘 사이를 가로막던 두꺼운 벽을 이하나는 순식간에 허물어 버렸다. 도채희는 둘 사이를 곁눈질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언니 결혼에 내가 폐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뒷바라지 하느라 결혼도 늦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도채희의 말에 이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 아니야. 나 때문이지. 내가 건강하지를 못해서.”
이하나의 말대로 이하나는 늘 아팠다. 지금에야 건강을 되찾아 일상적인 생활이 무리 없을 정도였지만, 예전에는 툭하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고는 했다.
“그 와중에 저까지 폐가 돼서 죄송했어요.”
도채희의 말에 이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말이야, 네가 나를, 우리를 찾아 주는 게 고마웠어. 내 남편 흉보긴 좀 그렇지만, 저 박철완 씨가 영 재미가 없잖으냐. 툭하면 현장 출동이다, 출장이다, 이 가련하고 연약한 구내 최강 미인인 나를 두고 바깥으로 나돌고 말이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구내 최강 미인으로 일컫는 이하나의 뻔뻔한 말에 도채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도채희는 이하나가 좋았다. 곁에 있기만 해도 웃음을 주는 사람이라서. 도채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말했다.
“확실히. 언니가 아까운 결혼이죠.”
“내 욕하자고 오늘 모인 거야?”
“저 봐, 또 삐지려고 하는 거.”
하, 짧게 숨을 내뱉은 박철완은 물을 들이켰다.
“그래도 기특하기는 해. 어떻게든 이 세상 지키겠다고 노력하는 걸 보면.”
그 말에 박철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채희의 앞에서는 이하나의 그 말을 도저히 기껍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박철완의 딱딱한 반응에 이상함을 눈치챈 이하나가 눈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 말에 박철완이 잔뜩 긴장했을 때였다. 도채희가 끼어들었다.
“언니가 이해해요. 제가 정직당한 일로 아직 화가 나 계실 거거든요.”
“맞아, 정직.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정직을 당했어?”
이하나의 말에 박철완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좋지도 않은 얘기를 굳이 뭐 듣겠다고.”
박철완의 만류에도 도채희는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아저씨 말을 안 듣고 또 사고를 쳤거든요.”
“무슨 사고?”
“뻔하죠, 뭐. 가지 말란 데에 가고 하지 말라는 짓하고.”
“끙.”
대충 상황을 짐작한 이하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범죄자에게 가족을 잃었기 때문일까. 도채희는 유난히 범죄자들에게 거칠게 굴었다. 그 때문에 현장에 있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징계를 받았다.
그래도 이젠 내근직으로 옮겼다고 해서 좀 나아진 줄 알았더니. 여전한가 보네, 속으로 혀를 찬 이하나가 도채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옳은 일이었지?”
이하나의 질문에 도채희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거면 됐어.”
와하하, 웃음을 터트린 이하나가 박철완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자기는 좀 애가 옳은 일 하겠다고 그러는데, 봐주지는 못할망정.”
박철완은 주먹을 꽉 쥔 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이하나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식탁 위에는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조금 전까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렸다.
“여기에는 왜 온 거냐.”
“제가 못 올 데를 왔나요.”
도채희는 여상히 그 말을 받았다.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도채희와는 달리 박철완은 아까부터 제대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우습게도 두려웠다, 도채희가.
정확히는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가.
그래서 박철완은 도저히 자신의 앞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도채희를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언니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네요.”
“너…….”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언니는 꿈에도 모르겠죠. 언니에게 아저씨는 정말로 존경할 만한 남편이었잖아요.”
도채희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박철완의 속을 찌르는 아주 날카로운 뼈가. 도채희에게서 찔린 상처가 너무나도 아팠다. 박철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입 다물어.”
“지금도 봐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무서워 죽겠잖아. 그렇잖아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박철완을 보며 도채희는 쓰게 웃었다.
“어머, 분위기 왜 이래. 무슨 말을 했기에 이래?”
“아니에요, 언니.”
분위기는 다시 달아올랐다. 이하나는 오랜만에 들른 도채희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동안 박철완은 불안함을 꾸역꾸역 삼켜 내며 억지로 행복을 연기했다.
그 뒤로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박철완은 불안에 떨며 이 시간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왔다.
“좀 더 있질 않고.”
“내일 출근 때문에요. 오랜만에 가는 거니까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정신을 차리니 식사는 끝이 났고, 도채희가 가야 할 시간이 됐다. 박철완은 그제야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차 끌고 왔어?”
“버스 타고 왔어요.”
“세상에. 안 되겠다. 여보, 채희 저 앞까지만 데려다줘요.”
마침 도채희와 할 이야기가 있던 박철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채희도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날도 어두운데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이하나의 걱정에 도채희는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 6성급 헌터거든요?”
“그래도 나는 영 걱정이 돼서 말이야.”
이하나는 어디에선가 가지고 온 목도리를 도채희의 목에 걸어 주었다.
“괘, 괜찮아요!”
“괜찮긴. 밖에 추워.”
“감사합니다…….”
도채희는 마지못해 이하나의 목도리를 받아 들었다.
“바쁘겠지만, 자주 들러.”
이하나의 걱정에 도채희는 미소를 지었다.
“언니도 잘 지내세요.”
“나야, 맨날 집에 있는데 못 지낼 일이 있나.”
그렇게 말하는 이하나의 얼굴에는 오직 행복이라는 감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도채희는 황급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왠지 자신을 바라보는 이하나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도채희와 박철완은 바깥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내려가는 동안에도 둘 사이에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박철완이 입을 연 것은, 아파트를 완전히 벗어나고 난 다음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부장님은 나쁜 놈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하.”
“나도 내가 누구랑 싸우는지 정도는 알고 싸우고 싶어서요.”
박철완은 인상을 썼다.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우리 집에 이런 식으로 또 찾아올 생각이냐?”
그 질문에 도채희는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네.”
그 말에 박철완은 얼굴을 구겼다.
“언제까지 나를 협박할 건데.”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오늘. 그냥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식사를 한 것뿐이죠. 부장님을 괴롭게 한 건, 부장님 본인이죠. 부장님도 알잖아요. 오늘 왜 식탁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는지.”
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박철완을 보며 도채희가 작게 덧붙였다.
“난 차라리 아저씨가 뻔뻔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도채희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하는 박철완을 보면서 도채희는 깨달았다. 박철완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다는걸.
그래서 너무나도 두려워한다는 걸.
“그렇게 자신이 한 일이 떳떳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런 선택을 했어요.”
“비겁하게라도 사는 게 나으니까.”
“사랑하는 사람한테까지 솔직하지 못하면서?”
도채희의 말에 이하나의 얼굴이 박철완의 머리를 스쳤다.
‘옳은 일이었지?’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도.
이하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맑고, 밝고, 빛나는 사람이었다.
이하나가 박철완을 기꺼이 사랑했던 것은 그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박철완은 얼굴을 구겼다. 차라리 도채희가 자신을 비난하고, 욕할 때가 나았다.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진 않았다고.”
처음에는 분명 박철완도 정의로운 경찰이었다. 이 세상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았던.
“나에게 첫 제안이 왔을 때,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어.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건 돈 때문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에게 감히 이런 제안을 한 사람을 캐내 보려고 했지. 감히 이 박철완을 회유하려고 한 놈이 누군지.”
이때의 박철완은 열정이 넘치는 경찰이었다. 자신을 회유하려고 든 사람의 뒤를 쫓아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찾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오더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어. 남자는 내가 묻는 말에는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누군가의 제안을 말해 주었어. 조건이 바뀌어 있더군. 내게 주겠다는 금액도 달라졌지만, 제안하는 직위도 달라졌어. 제안을 거절하는 내게 남자가 편지를 건네더군.”
“그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계속 뒤를 캐 보라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 진실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박철완이 말했다.
“그때 그만두어야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