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56 한 걸음 앞으로 (2)
가방 안에서 가위를 꺼낸 강이신은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여자애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차에 치이는 것보다는 이게 낫잖아!”
여자애는 싹둑 잘려 나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강이신의 돌발 행동에 아이들은 모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저, 저런…….”
강이신은 재빨리 손을 놀려 여자애의 머리카락을 마저 잘라 냈다. 강이신의 머릿속에는 차가 이곳에 오기 전에 여자애를 구해 내야 한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자동차는 아이들이 있는 골목으로 오지 않고 바로 앞에서 핸들을 꺾어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잔뜩 긴장했던 아이들은 그대로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가. 강이신의 돌발 행동에 굳어 있던 아이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이, 이신아. 아무리 그래도 머리를 저렇게 만든 건…….”
누군가 꺼낸 말에 여자애가 자신의 머리를 더듬거렸다. 탐스럽게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은 어디로 가고, 그녀의 손끝에 걸리는 건 들쑥날쑥 엉망으로 잘린 짧은 머리뿐이었다.
“어, 어떡해…….”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에, 그리고 손끝에 걸리는 끔찍한 촉감에 여자아이는 그대로 눈물을 터트렸다.
“너어어!”
여자애는 그대로 강이신에게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머리를 잘라서!”
아이는 곧장 강이신에게 원망을 쏟아 냈다. 강이신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자동차가 여기로 올 줄…….”
“안 왔잖아! 안 왔다고! 내 머리만 이렇게 망쳐 놓고! 너 미워! 너 싫어!”
여자아이는 그대로 강이신을 냅다 떠밀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여자애보다 체구가 작았던 강이신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윽.”
그 누구도 강이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모두가 머리카락이 엉망이 된 여자애를 위로하느라 바빴다. 여자애가 넘어진 강이신을 뒤로 둔 채로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강이신과 여자아이 사이를 힐끔거리던 아이들은 여자애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정호산 또한 그날에는 여자애를 위로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강이신은 혼자 남았다.
여기까지 말한 정호산이 눈을 굴리며 도채희에게 덧붙였다.
“이때까지는 이신이랑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았거든요.”
“머리카락을 그냥 댕강 잘라 버렸다고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 아까 강이신 씨가 그 여자애를 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도채희의 경악에 정호산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 그래서 기꺼이 나선 거죠. 그 여자애를 구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요. 여자애는 그날 이후로 이신이만 보면 치를 떨었어요. 여자애와 친하던 모든 애가 이신이를 무시하기 시작했죠. 솔직히 그때엔 저도 이신이가 조금 심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심지어 이신이는 사과도 하지 않았거든요.”
“사과도 안 했다고요?”
“내가 그 여자애한테 사과하라고 했더니, 이신이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그랬는데요?”
“다시 그 일이 일어나도 똑같은 짓을 할 거라면서, 자기는 사과를 못 하겠대요. 자기가 후회하는 일에만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사과를 해 놓고 또 똑같은 실수를 하면 그게 더 나쁜 거라면서. 그러니까 사과 못 하겠대요.”
그렇게 말한 강이신의 얼굴은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이미 어디에서 크게 울고 온 듯 퉁퉁 부어 있는 눈가를 보자마자 정호산은 알 수 있었다.
“이신이는 그런 애예요. 문제가 생기면, 뒤도 볼 것 없이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죠. 그로 인해 미움을 받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요. 늘 그랬어요. 결과가 좋든, 안 좋든. 늘 제일 먼저 나서는 애였고, 늘 가장 확실하고 위험한 방법을 택하는 애였죠.”
“……자동차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머리카락을 잘랐던 것처럼요.”
“예.”
그로 인해 미움을 받더라도, 여자애와의 사이가 영원히 망가져 버렸어도 강이신은 그 일 자체를 후회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여자애를 구했으니까.
“그런 주제에 입에 발린 말 하나 못하는 애라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데요. 나중에 ‘거짓말’이라는 재능을 각성한 걸 보면, 그런 아이러니가 없다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왜 해야 하냐며. 자신에게 따져 묻는 강이신을 보며 어렸던 정호산은 이마를 쳤다. 정말로 이 답답한 녀석을 어쩔까 싶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자신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녀석을 보며,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자신을 살피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더라고요.”
“신경이 쓰이는 타입이네요.”
결국, 그런 면이 마음에 밟혔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딜 가든 내가 그 녀석을 챙기고 있더라고요.”
보육원에서 정호산은 강이신의 대변인을 자처했다. ‘이신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네가 싫어서 그런 짓을 한 게 아니야.’, ‘다 좋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거라니까.’ 정호산은 늘 강이신의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눈을 흘기며 입을 삐쭉거리고 있는 강이신을 본 사람들은 정호산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정호산이 자신의 못난 친구를 변호하기 위해 애를 쓴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오해가 깊어질수록 더더욱 정호산은 강이신을 감싸기 바빴다.
“그래서였을까요. 이신이에게는 늘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늘 챙겨야 하는 친구라고 생각했죠.”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강이신이 갑자기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을 떠나기 전까지는.
“지금도 이신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신이가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고, 자신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한 방법을 선택한 거죠.”
“그게 벨츠머츠에 들어간 거로군요.”
“예. 덤불에 걸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빼내느니, 가위로 잘라 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그 어릴 때처럼요.”
강이신은 똑같았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이신이는 내 도움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렇게 안 보여도 이신이는 외로움을 무진장 타거든요. 상처도 엄청나게 잘 받고요.”
하지만 강이신은 정호산을 지나칠 정도로 단호하게 끊어 내는 방법을 택했다.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그냥 사라지려고 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이신이 보냈던 말을 곱씹을수록 강이신의 생각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난 아직도 이신이를 어린애로만 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방향을 정해 주고, 참견해야 하는 어린애요.”
넌 서투니까, 그래서 늘 실수하니까. 내가 널 도와야 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틀린 거잖아요. 이신이는 누군가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여태까지 난 이신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게 옳으니까, 하는 마음으로요. 그래서 이신이의 선택을 무시하고, 그 녀석을 잡아 데리고 오려고만 한 거죠.”
“하지만 저라도 정호산 씨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은데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범죄자가 됐다는 걸 알았다면 말이에요.”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은 쓰게 웃었다.
“그래도 전에 제가 했던 행동은 잘못됐어요. 이신이가 저한테 말하고 싶었던 것도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자기도 이제 어른이라고,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러니 너는 너대로 네 인생을 살라고.”
“강이신 씨가 보낸 메시지를 그렇게 해석한 거예요?”
도채희의 질문에 정호산이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말재주가 더럽게 없는 녀석이라고.”
“정말 말재주가 더럽게 없나 봐요.”
도채희의 반응에 정호산은 웃음을 터트렸다.
“예.”
큼큼, 웃음기를 정리한 정호산이 말했다.
“어쨌거나 이번 일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저질러 버렸겠죠.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강이신이 뭘 하려고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일단 내 일에 집중하려고요.”
그리고 그 일이라는 건, 이 빌어먹을 게이트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 * *
교대 시간이 지났음에도 게이트에는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도채희의 정직이 끝나는 날까지 게이트를 지켜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아마 게이트 안에 있던 사람들과 미리 암호를 정해 두고, 암호가 닿지 않으면 이 게이트를 버리라는 명령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두 사람은 잠복근무를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채희는 김용원의 도움을 받아 정보를 확인했다.
“주소록에 있던 전화번호를 모두 검색해 봤는데, 전부 실종자로 나오더라고요. 아마도 불법 게이트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명의를 이용한 것 같아요.”
말이 실종자지, 그들이 어떻게 됐을지도 뻔하다. 안타깝게도 이쪽으로는 추적한다고 더 나올 게 없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었을 관리자들 또한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기에, 수사는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에요.”
연락처는 꽝이었지만, 휴대폰에 미처 지우지 못한 메시지가 하나 남아 있었다.
“청과장. 분명 청과장이라고 했어요.”
“청 씨는 흔치 않은데요.”
“예. 다행이죠. 김 씨나, 박 씨나, 이 씨가 아니라서.”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은 미소를 지었다. 몇 주간을 고생해 얻은 정보라기엔 허접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다.
“내일부터, 각범부에 다시 출근하십니까?”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직도 오늘로 끝이었다.
“정호산 씨는 다음 주에 각범부로 들어오겠다고 했죠?”
“예.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정호산 씨를 떨어트릴 리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각범부에서는 상시 채용으로 각성자들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정호산이라면 어렵지 않게 시험을 통과해 들어올 수 있을 거다. 침을 꿀꺽 삼킨 도채희가 정호산을 향해 말했다.
“전에 말했던 대로 각범부 안에 들어가면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해요.”
“진심입니까?”
“말했잖아요. 각범부에 있는 사람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그녀가 반평생을 믿고 따랐던 박철완의 실체를 깨달은 날, 도채희는 끔찍한 배신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배신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젠 도저히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어요.”
“같은 팀원으로 일했던 사람도 있잖아요.”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김용원이라든가. 하지만 이미 그와 만나지 못한 지도 한참이다. 그가 주는 정보를 신뢰할 수는 있어도 역으로 그 정보를 신뢰해 자신의 생각을 모두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채희를 본 정호산이 슬쩍 말을 던졌다.
“저녁이라도 같이 하실래요?”
도채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해야 할 일이요?”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각범부로 돌아가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 * *
저녁 시간, 집으로 돌아온 박철완은 두꺼운 코트부터 벗어 팔뚝에 걸쳤다. 코끝을 간질이는 맛있는 냄새에 박철완은 미소를 지었다.
“여보, 나 왔어. 뭘 했길래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
“응, 손님이 왔거든. 누가 왔는지 봐봐!”
“응? 손님?”
거실로 들어선 박철완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랜만이구나, 채희야.”
도저히 반길 수 없는 손님이 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