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93화 (193/352)

제193화

#56 한 걸음 앞으로 (1)

불법 게이트를 발견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도채희와 정호산은 이제야 비로소 무언가 소득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안으로 진입해 그곳의 관리자라는 역겨운 인간들을 구속하고 피해자들을 구조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이 일의 배후자를 찾아낼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미처 제대로 된 취조를 시작하기도 전 손에 끼고 있던 반지에 숨겨져 있던 독침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이런!”

피거품을 무는 관리자들의 모습에 놀란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갔을 땐, 이미 그들의 숨이 끊어진 뒤였다.

“대체 무슨 협박을 받았기에 이렇게 주저 없이 목숨을 끊은 거죠?”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도채희와 정호산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당장 구조가 필요한 피해자가 있는 이상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어떡할까요?”

그들의 뒤에는 이 불법 게이트에서 혹사당하던 스물 남짓의 사람들이 간절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채희의 질문에 정호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범부에 연락하는 건…….”

“우리의 활동을 적들에게 그대로 알려 주는 꼴이 될 테죠. 말했잖아요. 아직은 각범부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맞아, 그랬죠.”

기껏 비밀스럽게 시간을 내서 이곳을 덮쳤는데, 각범부에 보고를 하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들을 모르는 척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그때, 정호산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정호산은 고민 끝에 김명철에게 연락했다.

오랜만에 연락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내뱉은 정호산에게, 김명철은 기꺼이 손을 빌려 주었다. 아니, 손을 빌려 준 정도가 아니다. 곧바로 이곳으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날아왔으니.

김명철의 등장에 정호산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직접 오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요.”

“아니, 직접 와야지. 이런 일인데.”

김명철은 정호산의 얼굴을 보며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아닙니다.”

“아니긴! 아주 반쪽이 됐는데.”

김명철의 걱정 섞인 말에 정호산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참고로 정호산의 몸무게는 전혀 줄지 않았다.

한참이나 정호산의 얼굴을 살피며 김명철의 시선은 정호산의 뒤에 숨어 있는 한 여자에게로 향했다.

“거기 경찰관님이 내 귀한 길드원을 빼간, 그…….”

그 부름에 김명철을 보자마자 잔뜩 굳어 있던 도채희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가 있나. 다 이 녀석 고집인 걸 내가 모를까 봐요.”

그렇게 말한 김명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래, 아주 황소고집이지…….”

그 아련한 표정에 도채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김명철의 인도 아래 무사히 구출되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마나 중독을 앓고 있는 이상 그들의 미래는 뻔했지만, 그래도 게이트에서 최후를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끝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 사건은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가 불법 게이트를 보고 신고한 시민의 제보를 받은 김명철이 해결한 것으로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을 보호해 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불법 게이트 사건은 위험해. 개인의 이름이 끼어들기엔 말이지. 네가 원하는 걸 이루려면 일단은 오래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냐.”

김명철은 그 말로 정호산을 설득했다.

“형님께 폐가 되진 않을까요?”

정호산의 말에 김명철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폐가 된다니? 나 김명철이야! 그리고 여기가 어딘데. 붉은개 길드야. 우리를 건드리면 말이지, 그쪽도 성치는 못할 거다. 왜냐, 나는 한 번 문 걸 끝까지 놓지 않는 불붙은 미친개거든!”

그 말에 도채희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한때는 그녀 또한 미친개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으니까.

김명철은 정호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그 말에 정호산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너만을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야. 나도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놈들이 꼭 잡혔으면 좋겠거든.”

김명철은 길드 마스터였다. 범죄 조직을 쫓는 건 그의 일이 아니었다. 당장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브레이크 되어 몬스터를 쏟아 낼 게이트가 존재하는 이때,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언제나 게이트 공략이 되어야 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눈앞에서 뻔히 일어나고 있는 범죄를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를 지원하는 것만으로 그 범죄를 처리하는 데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야, 정말 기쁜 일이 아니냐.”

김명철의 말에 정호산은 가슴에 쌓였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김명철이 떠난 뒤, 도채희와 정호산은 다시 불법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놓친 정보가 또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는 시체를 보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시체의 앞에 다시 섰다.

“혹시 모르니 이 사람들의 짐을 뒤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작은 주머니까지 모두 뒤졌지만, 유의미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신분증마저도. 도채희는 그들의 지문을 살폈지만, 손가락을 모두 지져 버려 지문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지져진 손끝을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관리자들이 머물던 천막에서도 중요한 게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건진 건 휴대폰 몇 개와 근무 일지로 보이는 책 한 권뿐이었다.

불법 게이트를 관리하던 이들은 마치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했듯, 깔끔하게 현장을 정리해 두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네요.”

“휴대폰 쪽은 어떻습니까?”

휴대폰을 살핀 도채희가 말했다.

“아무래도 대포폰 같아요. 이렇게까지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했는데, 주소록을 멀쩡히 남겨 둔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일단 주소록에 있는 연락처는 따로 데이터베이스에 조회해 보도록 할게요. 혹시 모르죠, 이 중에 걸릴 만한 사람이 있을지.”

주고받은 것은 모두 통화뿐. 메시지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근무 일지에 주목했다.

“가명을 썼네요.”

모두가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관리자는 총 열 명, 다섯 명씩 한 조를 이루고 이틀마다 한 번씩 교대했다.

“다음 교대조가 올 때까지는 대기할 만할지도요.”

두 사람은 다음 교대조가 올 때까지 게이트에 머물기로 했다. 혹시나 다음 관리자조가 올 수도 있으니까.

이틀간을 이 황량한 곳에서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가까스로 잡은 끈을 이대로 놓을 순 없었다.

두 사람은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눈앞에서 목숨을 끊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이 눈을 찌푸렸다.

“아마도 지독한 협박을 받은 게 아닐까요.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라면, 간절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 사람들도 단순히 돈을 위해서 여기에서 일하던 게 아니라는 뜻인가요.”

“어쩌면요.”

정호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은 전부 추측에 불과하지만요.”

저들의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는 이상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저나 지독하네요. 이렇게까지 모든 흔적을 지워놨을 줄은…….”

“불법 게이트를, 한 번 턴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아.”

강이신 이전에는 그 누구도 불법 게이트 사건을 물 위로 끄집어내지 못했다.

“그 사건이 꽤나 뜨겁긴 했죠.”

“제대로 된 수사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다시는 그런 빈틈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우리만 공치게 되었네요.”

“아직 희망을 놓기엔 이릅니다. 연락처도 남았고, 일지도 남았으니까요. 거기에서 정보를 더 캐내 봐야죠.”

정호산의 눈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 불꽃은 크지 않았지만, 잔불처럼 은은하게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도채희 또한 다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이 길이 험난하고, 가시밭길처럼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빤히 정호산을 바라보던 중, 전에 보지 못하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손가락에 그건 뭐예요? 못 보던 것 같은데.”

“아, 이, 이거 말입니까.”

정호산은 황급히 손을 뒤로 숨겼다.

“그렇게 숨기니까 더 의심스러운데요. 뭔데 그래요?”

“……흡혈왕의 반지입니다.”

“예에?”

그 이름을 어찌 잊으랴! 도채희에게 끔찍한 잔업을 선사했던 벨츠머츠의 데뷔전에 도난당한 물건인데! 저 반지까지 도난당하는 바람에 보고서를 다섯 장은 더 써야 했다고!

도채희의 시선에 정호산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반납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랬다간 벨츠머츠와는 무슨 관계냐는 추궁을 들을 것 같아서요.”

“물론 그렇죠! 그건 공식적으로 벨츠머츠한테 도난당한 물건이니까. 그럼 혹시…….”

“예. 이신이가 준 거예요. 최후통첩 뒤에 이걸 보내더라고요.”

“오.”

도채희는 눈을 굴렸다. 잔뜩 우울해하던 정호산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도채희의 표정을 살핀 정호산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이신이의 길을 존중하기로 했거든요.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부터 이신이는 그런 녀석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소꿉친구 사이였지. 강이신의 어린 시절이라니. 강이신하면 그가 저질렀던 범죄부터 떠올리는 그녀에게 ‘어린 시절의 강이신’이라는 키워드는 참으로 낯설기 짝이 없었다.

정호산은 추억에 젖은 눈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일이에요.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나. 학교가 끝나고 보육원 친구들이랑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죠.”

갑자기 시작된 어린 시절 이야기에도 도채희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때 이신이는 한 여자애를 좋아했어요.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길게 기른 곱슬머리가 참 예뻤던 아이였죠. 그 여자애는 이신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이는 별로 나쁘지 않았어요. 티격태격하면서도 꽤나 잘 지냈거든요. 평범한 날이었어요. 그 여자애의 머리카락이 가시덤불에 걸리기 전까진.”

가시덤불에 머리카락이 걸린 여자애는 비명을 질렀다. 여자애는 가시덤불에서 머리카락을 빼내려고 했지만, 덤불에 걸린 머리카락은 잘 빠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여자애를 도와 머리카락을 덤불에서 떼어 내려고 했지만, 어린아이의 서툰 손놀림은 오히려 덤불에 머리를 더 엉키게 했을 뿐이었다.

“어, 어떡해!”

“아파! 아프다고!”

“어, 어떡하지?”

모두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정호산은 무서워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애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때 골목길 끝에 자동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떡해! 여기로 오나 봐!”

“서, 설마! 멈춰 주겠지.”

“그래, 우리가 보일 거야!”

“하, 하지만 안 보이면 어떡해? 우리라도 도망갈까?”

비겁한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호산이 얼굴을 구겼다.

“도망가긴! 다 같이 있어야지!”

아이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강이신이 나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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