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55 시련, 시련, 시련 (9)
김재호는 왜 보스를 만나러 가지 않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에디의 옆구리를 찔러 댔다.
[나도 그쪽 보스가 더럽게 보고 싶다고! 근데 방법이 없잖아. 젠장, 그쪽이 협조만 했어도 바로 만날 수 있었다고!]
에디의 말은 김재호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재호를 보며 에디는 한숨을 쉬었다.
‘말이 통했으면 진작 해결됐을 일인데.’
에디는 죄도 없는 번역기를 탓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동안 에디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거머리 같은 놈을 떼어 내고자 최선을 다해 골든데이의 정보를 얻어 냈다.
문제는…….
‘그 망할 놈의 테이카 쿠퍼가 바깥으로 골든데이의 정보가 새는 걸 철저하게 막고 있다는 거겠지.’
골든데이에게 지금 현상에 대한 설명을 듣겠다며 병원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테이카 쿠퍼의 에이전시가 상황을 정리하자 완벽하게 사라졌다.
게이트 통제에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에이전시들은 물론, 과학자들까지 이 통제에 불쾌감을 드러냈으나 감히 테이카 쿠퍼의 앞에서 불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골든데이를 맡았다던 노먼 베이런이라는 에이전시도 완전히 철벽이었다. 사람들의 접근을 피해 아예 어디론가 떠나 버린 그는 아예 만날 수조차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밖으로 드러난 골든데이와 연결점이 확실한 사람은 테이카 쿠퍼뿐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병원에 들러 골든데이 용병대 사람들을 면회했으니 말이다.
‘듣기로는 아직 두 사람 다 혼수상태라는데 지극정성이 따로 없어.’
아니면, 혼수상태라는 게 모두 거짓말이라거나.
골든데이 용병대를 붙잡아 두고 정보를 캐려는 속셈이든, 아니면 그들을 영입할 생각이든. 테이카 쿠퍼의 생각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냥 에디는 이 짐 덩어리를 떼어 놓고 싶을 뿐이었다.
그쪽에서도 사라진 용병대원을 찾고 있을 테니, 자신이 용병대원을 데려다주면 고마워하겠지.
하필이면 ‘그’ 테이카 쿠퍼를 통해야 한다는 점이 찜찜하긴 해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한 법이었다.
에디는 자신이 테이카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방적인 열등감이다. 막상 테이카 쿠퍼는 자신의 존재를 알지도 못할 테지만, 에디로서는 7년 전부터 그 녀석의 이름을 볼 때마다 이를 갈아 댔으니까.
언젠가 테이카 쿠퍼보다 더 성공한 헌터가 되어 테이카 쿠퍼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는 게 에디의 꿈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 녀석과 첫 만남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림자 안에 숨은 이놈을 떼어 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제 그림자 속에 낯선 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툭하면 제 다리를 붙잡고 잡아당기는 통에 넘어질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마치 구멍 난 댐이라도 되는 듯, 녀석의 위장에는 한계가 없었다. 몇 달간 제대로 된 용병대에 소속되지 못했던 에디에게는 이 녀석의 식비조차 부담이 되었다.
[그냥 네가 안에 들어가면 끝났을 거라고.]
에디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저놈이 무언가를 해 주길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에디는 지난 며칠 간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테이카 쿠퍼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그림자 괴물을 떼어 내고 자신의 삶을 살 수가 있겠지.
처음 골든데이에게 느꼈던 호기심과 호감은 어느새 뚝 하고 떨어진 지 오래였다.
당분간은 금으로 된 액세서리도 착용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골드라는 단어 자체에 알레르기가 생길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놈이 협조할까 하는 거였다. 아니, 협조는 됐다.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우리는 테이카 쿠퍼를 보러 갈 거야.]
“테이카 쿠퍼?”
[그래, 테이카 쿠퍼. 너도 알지? 알겠지, 젠장. 그렇게 유명한 헌터를 모를 수가 없지.]
아는 영어 단어라고는 ‘보스’밖에 없는 무식한 놈이지만, 테이카 쿠퍼는 아는 모양이었다.
왠지 배알이 꼴렸다.
에디는 차분히 번역기에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우리는 테이카 쿠퍼를 보러 간다. 그 녀석이 네 보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번역기에 떠오른 문장에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설명한 에디가 김재호를 향해 말했다.
[내가 맡을 때니까 너는 끼어들지 마.]
에디의 말은 번역기를 거쳐 김재호에게 문제없이 전달되었다. 김재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에디를 노려보았다.
“너보다는 내가 센 것 같은데.”
에디는 번역기를 내밀었다.
“여기에 써도 제대로 알아먹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김재호는 순순히 손가락을 움직여 번역기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적었다.
‘내가 더 새. 너는 야가다.(내가 더 세. 너는 약하다.)’
그리고 그 말은 이렇게 번역되었다.
I'm more of a bird. You're a night owl.
그 말을 본 에디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지금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서.
[내가 더 새다. 너는 부엉이? 도대체 뭐라는 건데! 갑자기 새라니? 그리고 난 알바트로스거든? 부엉이가 아니라고!]
에디는 여전히 알아먹지 못할 김재호의 말에 가슴을 퍽퍽 쳤다. 그 모습에 김재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렇게 억울해하다니. 그래도 자기가 보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하긴 여태까지 자기한테 밥도 주고, 열심히 작전을 짜는 걸 보니 보스와 하는 게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보스도 매번 누굴 치러 가기 전에 이렇게 작전을 설명해 주었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김재호에게 작전을 설명해 주려고 하는 태도가 제법 기특했다.
밥도 많이 줬으니, 한 번쯤은 보스 취급을 해 줄까.
음, 밥.
“그거 내놔, 샌드위치 내놔.”
[아까 줬잖아!]
“모자라.”
[젠장!]
에디가 사다 준 샌드위치를 뜯으며, 김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해 빠진 놈이지만, 밥을 줬으니 아주 나쁜 놈은 아니었다. 약한 만큼 어떻게든 작전을 짜서 만회하려는 게, 정말로 우리 보스가 떠오르기도 했고.
“음, 좋아. 말해 봐.”
배가 불러 평온해진 김재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에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놈에게 작전을 설명할 때가 됐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는 그냥 얘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어.]
번역기로 에디의 말을 전달받은 김재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기습작전이로군.’
가만히 있다가 덮치는 것만큼 좋은 수는 없지. 강이신은 언제나 김재호에게 선빵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했다. 테이카 쿠퍼는 무척이나 강한 헌터니, 빈틈을 노려 한 번에 찌르는 게 중요하겠지.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배때기에 단검 하나가 박히면 아픈 건 똑같다고 그랬어.’
누가? 강이신이.
강이신은 늘 김재호에게 말했다. 너는 어둠 속에서 가장 날카롭게 빛나는 검이다. 그러니 기회를 재다가, 그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고 검을 날려. 그렇다면 너는 누구든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거다.
에디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번역기에 자신의 작전을 적어 내려갔다.
[좋아, 이해했어?]
사실상 김재호의 역할은 하나였다. 에디가 알아서 할 동안 그림자 속에 가만히 있는 것.
그리고 그 말을 김재호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좋아, 좋아. 가만히 그림자에 숨어 있으라 그거잖아. 네가 시선을 끌고.”
그렇게 중얼거린 김재호는 에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 완전히 이해한 거 맞아? 그림자 안에 숨어서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으면 돼. 알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사람들 앞에서는 나오라고 아무리 빌어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툭하면 단검을 꺼내 드는 이 남자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만 그러는 거면 괜찮지만, 테이카 앞에서 그랬다간 정말 참사가 일어날 테니.
[제발 가만히 있어라.]
거기에서 단검을 꺼내면 진짜 주옥 된다. 정말로 큰일이 난다고.
에디는 몰랐다.
“걱정하지 마. 나한테 맡겨, 내가 이런 일에는 아주 전문이거든.”
김재호가 자신의 말을 단 한 톨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 * *
차송진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우리는 곧바로 중환자실로 향했다. 병실로 들어가기 전, 내 뒤를 따르는 한서현이 유난히 머뭇거렸다.
“왜?”
“그냥, 그냥요…….”
한서현이 눈을 굴렸다.
“정말 그 사람이 나를 구하러 온 거, 맞아요?”
“그래.”
한서현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했다. 하긴 나도 그 겁이 많은 차송진이 우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줄은 몰랐으니.
하지만 차송진은 우리를 구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온몸의 마나가 폭주했지.
“그러니까 확실하게 고맙다고 해.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나 거기에서 너 못 찾았을 거야.”
차송진과 한서현의 사이가 껄끄럽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야참’ 대화 이후 전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둘 사이는 서먹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는 차송진에게 빚을 졌다.
“들어가면 꼭 고맙다고 하는 거다?”
내 말에 한서현은 볼을 붉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인 줄 알아요? 아, 빨리 가기나 해요!”
버럭 소리를 지른 한서현이 뚝딱거리는 걸음으로 나를 스쳐 앞으로 나갔다.
큭, 나는 한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겨우 웃음을 삼켰다. 지금 오른발이랑, 오른팔이 같이 나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
늘 어른스럽게 굴던 녀석이 이렇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렇다고 너무 놀리면, 나를 원망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모르는 척을 해야겠다.
나와 한서현은 중환자실의 문을 열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온갖 기계를 몸에 단 채 눈을 감고 있었던 차송진이 두 눈을 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오셨, 오셨군요.”
뚝딱거리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군.
나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요?”
“그러는 그쪽은요? 너는, 너는 괜찮은 거야?”
차송진은 한서현을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서현의 옷을 잡은 차송진이 꺼이꺼이 울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 사과에 한서현이 깜짝 놀라 말했다.
“대체 그쪽이 뭘 잘못했다고…….”
“내가 거기에서 능력을 써서, 네가 이틀이나 거기에 혼자 있었다고. 그래서, 그래서 나는 네가 잘못될까 봐…….”
제 앞에서 그렇게 펑펑 눈물을 터트리는 차송진을 보며 한서현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굴렸다.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울 필요 없어요. 그쪽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고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훌쩍이던 차송진은 금세 다시 잠들었다. 우리는 차송진이 곤히 잠들 때까지 옆자리를 지키다가 병실을 빠져나왔다.
내 병실로 돌아가며 나는 한서현에게 슬쩍 물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나?”
“뭐요.”
“네가 싫다고 하면 누구도 우리로 받아 주지 않을 거라고 했던 거. 아직도 똑같은 생각이야?”
내 말에 한서현의 볼이 붉어졌다. 한서현의 눈동자는 정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누구를 들이든 결국 결정은 보스 몫이라고 생각해요, 전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한서현을 보며 나는 웃었다.
━차송진, 그 녀석을 들이려고?
‘뭐, 본인이 남고 싶다고 하면요. 현장에는 절대 들이지 않는다든가, 하는 조건을 단다면 괜찮을 것도 같아서.’
원래는 본인도 우리를 꺼리고, 한서현도 차송진을 반가워하지 않아 영입 생각을 접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말이다.
━저 녀석은 좋다고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진짜 싫었으면 단번에 싫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러니 저건 오케이나 다름없었다.
차송진도 깨어났겠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단 하나.
“김재호 걔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는 김재호를 찾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