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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87화 (187/352)

제187화

#55 시련, 시련, 시련 (8)

내 표정을 읽은 테이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끝이 오기 마련이잖아요. 안 그래요?]

설록진을 향한 복수를 끝내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나쁜 놈들을 싹 쓸어버린 뒤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일이지만, 확실히 언젠가는 테이카의 말처럼 그 끝이 오겠지.

‘그 끝이 오면…….’

그동안 저지른 죄를 모두 사해 주고, 미국의 국민으로 살 수 있다는 테이카의 제안은 확실히 솔깃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테이카를 멀리하는 대신 최대한 가까이 둬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부침개를 뒤집듯이 바꿔도 되는 거냐?

‘우리를 신고할 생각도 없고, 우리에게 호의적이죠. 저 생각이 언제 바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없는 상대입니다.’

음, 그렇고말고. 게다가 미래의 든든한 보험이 되어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생각을 정리한 내가 테이카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도 그 제안은 유효한 겁니까?]

내 말에 테이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요!]

[아직은 그 미래가 언제 올지 감도 오지 않지만 말이죠.]

설록진을 해치운 미래라. 지금으로서는 마치 꿈과 같은 미래다. 내 말에 테이카가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빨리 그 미래가 왔으면 좋겠네요. 그쪽이랑 같이 돌아다니면 진짜 재밌을 것 같거든요.]

[제가 아니라, 우리 용병대요.]

나는 테이카의 말을 정정했다. 어디서 나만 데리고 가려고 해? 딸린 애가 많은 입장에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나랑 우리 용병대는 한 몸이라서요.]

내 말에 테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카의 생각이 길게 이어지기 전, 내가 말을 던졌다.

[그 미래가 오기 전까지 가끔이라면 이렇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내 말에 테이카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우리랑 하고 싶은 게 게이트 공략이라고 했죠? 뭐, 그런 거라면 같이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침 우리도 게이트를 공략해야 할 참이다. 이번에야 마수 수급과 실전 경험을 쌓는 걸 중점으로 해 낮은 등급의 게이트를 들쑤시고 다녔지만, 낮은 등급의 게이트에서는 얻을 게 별로 없었다.

테이카 쿠퍼와 함께라면 고등급의 게이트를 골라서 공략할 수 있을 터. 든든한 백을 두고 활동할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좋아요! 당장 다음에 공략할 게이트부터 알아볼까요?]

[너무 서두르진 말자고요. 아직 우리 쪽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나는 산책 가자는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신이 난 테이카를 겨우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서현이 얼굴을 구기며 내게 물었다.

“대체 저 녀석한테 뭐라고 했기에 쟤가 저렇게 신이 나서 날뛰는 거예요?”

나는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야, 솔직하게 말하면 테이카의 앞에서 멱살을 잡힐 것 같거든.

━이게 그 빌어먹을 ‘이신 없는 이신팀’ 작전이냐?

‘아티팩트 주제에 왜 이렇게 눈치가 빨라요?’

━누가 들어도 저 녀석에게 네 팀을 떠넘기려는 말투였으니 그렇지.

‘그냥 미래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 끝이 왔을 때 내가 어떤 상태일지 모르는 거 아니냐. 기껏 미국행 티켓을 끊어 놨는데, 나 때문에 한국에 발이 잡히면 안 되지.

━하, 네 녀석이 없는데. 네 애들이 잘도 테이카에게 붙겠구나.

‘말했잖습니까. 미래를 대비하는 것뿐이라니까요.’

레이가 무어라 내게 투덜거리기 전, 테이카가 말했다.

[맞아요, 일단은 그쪽이 회복하는 게 우선이죠!]

그렇게 말한 테이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번 내 휴가 동안 말동무라도 해 주는 건 어때요?]

[말동무라고요?]

[네! 마침 나도 휴가고, 그쪽도 여기 안에만 있어야 하니까. 심심하잖아요, 그렇죠?]

사실 별로 심심하진 않은데, 그렇게 말했다간 잔뜩 실망한 얼굴을 하겠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동무로 삼기엔 난 그리 재밌는 사람이 아닌데…….]

[그냥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말이에요.]

혹시 친구가 없나. 순간 그런 질문이 떠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제아무리 세계 최강의 헌터라도 친구가 없을 수도 있지. 암, 우리 벨츠머츠를 봐라. 무려 세 명 중, 세 명이나 친구가 없지 않은가. 물어본 적이 없긴 하지만, 친구가 없는 건 차송진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 이쯤 되면. 사실 친구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닐까?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구나.

갑자기 테이카 쿠퍼가 측은해 보였다. 그래, 쟤도 얼마나 친구가 없으면 나 같은 사람한테 놀아달라고 오는 거겠나.

‘나중에는 우리한테 놀아달라고 했던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지금에야 우리를 좋게 보고 있지만, 몇 번 만나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우리에게 느꼈던 신선함이 모두 사라지고, 그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말이지.

확실히 테이카는 매력적이었지만,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은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테이카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미국에 이런 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손해는 아니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내 말에 테이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대체 저 녀석하고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이냐니까요.”

아, 맞다. 한서현이 옆에 있었지. 나는 한서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 얼굴을 구긴 한서현에게 내가 말했다.

“앞으로 저 친구랑 같이 게이트를 공략하러 다닐 거야.”

“예? 말이 왜 그렇게 됐어요?”

“어, 그게 우리 병원비도 내줬고, 음, 말을 하다 보니 확실히 저쪽이랑 같이 다녀서 나쁠 게 없겠더라고.”

나는 테이카를 향해 말했다.

[웃어요, 친절하게.]

[안녕!]

그 얼굴을 보고 나서도 한서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제정신이에요? 저 인간이랑 친하게 지내겠다고요?”

“음, 앞으로 게이트를 공략할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우리만으로는 모자라요?”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느낌이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냥, 여러 가지 편의성의 문제가 있는 거지. 이번만 해도 봐. S급 게이트를 하나 해결했다고 우리한테 이 많은 시선이 쏠려 버리잖아. 저 친구한테 묻어 다니면 적어도 이럴 일은 없을 거야.”

그제야 한서현의 입이 닫혔다.

나는 그날 테이카를 잘 달래서 보냈다. 웬만해서는 나가려 하지 않는 그를 내보내며 나는 말했다.

[내일도 오면 되잖아요.]

[내일! 내일 와도 됩니까?]

[당분간 말동무를 해 달라면서요?]

내 등 뒤에서 나를 노려보는 한서현 때문에라도 빨리 내보내야겠다. 무사히 테이카를 내보내는 데 성공한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야차처럼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한서현이 거기에 있었다.

“보스는 참 영어 잘해서 좋겠어요.”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였다. 으으, 테이카를 상대하느라 한참을 버려뒀기 때문인가. 평상시보다 훨씬 날이 서 있었다.

“그냥, 뭐, 의례적인 손님맞이였지.”

“의례적인 손님맞이는 무슨! 아주 좋아 죽던데요!”

“으음, 너희한테도 좋은 얘기야. S급 게이트도 공략해 보고 그래야 실력도 늘고, 아이템도 늘고, 어, 많이 늘지.”

“하필이면 저놈이랑 같이 다녀야 하냐고요.”

“실력만큼은 확실하니까.”

내 말에 한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데.”

“뭐가?”

“아무리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만으로 보스가 동행을 결정했을 것 같지 않아서요.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단 말이죠.”

“뭐가 있기는. 그런 거 없어.”

한서현은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영어를 못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테이카와 나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알아들었다면, 그게 무슨 의미냐고 나를 탈탈 털려고 들었을 테니까.

━네가 미래에 자기를 미국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널 죽이려 들 것 같은데.

‘예, 그러니까 영어를 못하는 게 정말 다행이죠.’

실제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건 테이카와 나만의 비밀로 해 둬야겠다.

“진짜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막 그렇게 따지는 한서현에게 내가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였다.

똑똑.

또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에 한서현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그 바깥에 서 있던 간호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죄, 죄송.]

놀란 표정을 지은 한서현이 곧장 간호사에게 사과했다. 한서현의 어깨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내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내 질문에 간호사가 말했다.

[아! 미스터 차가 깨어나셨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 * *

에드워드 시헬리스는 그날 컨테이너의 문을 두드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정말로 엄청나게 무진장 후회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에디가 말했다.

[제발, 나가라. 제발…….]

그날 이 거머리를 붙여 올 줄 알았다면! 이 거머리가 자신을 뒤지게 괴롭힐 줄 알았다면! 절대로 그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텐데.

과거의 자신을 보며 ‘멈춰! 제발!’이라고 소리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이틀간, 에디는 이 망할 놈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일단 이놈에게는 몇 개의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문제.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그림자 속의 그놈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에디가 애걸복걸 부탁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번역기로 ‘당신이 그림자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나오지 않는 이유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은 있었다. 도저히 알아먹지 못할 거라 그렇지.

‘보수주의자는 나에게 사치스럽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고?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는 김재호의 형편없는 맞춤법 때문에 번역기가 오류를 일으켰기 때문이었지만, 에디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참고로 김재호가 쓴 문장은 ‘보수가 호자서 다니지 마랫음’이었다.

그 이후에도 에디는 끊임없이 그림자 속의 남자와 소통을 시도했지만, 소통은 일방향이었다.

아니! 일방향도 되지 못했다.

에디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단검을 꺼냈던 것처럼, 에디의 말을 들은 김재호는 그때마다 제 단검을 만지작거렸으니까.

도대체 자신이 한 말이 뭐가 잘못이라 이런 결론에 다다르는지, 에디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젠장,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니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잖아. 공격하자거나, 덮치자는 말로 알아들을 만한 단어라도 있었나?’

에디는 번역기와 스스로를 탓했지만, 문제는 그가 아니었다.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이 딱 하나라고 생각하는 김재호가 범인이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움? 단검으로 쓱싹 도와주지.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이 단검의 이름이 바로 대화지.

어떤 수치를 입력해도 나오는 값은 똑같았다.

거기에 손은 얼마나 많이 가는지. 에디가 푸드 트럭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아니, 에디는 푸드 트럭 앞을 도통 지나갈 수가 없었다. 왜냐? 그림자에서 툭 튀어나온 손이 발을 꼭 붙들었으니까!

넘어질 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에디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그림자 사이에서 튀어나온 손을 찰싹 두들겼다.

[알았으니까,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오지 말라고!]

공원 벤치에 주저앉은 에디는 발밑으로 샌드위치를 던졌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손이 재빨리 샌드위치를 낚아챘다.

김재호는 식사조차 그림자 안에서 했다. 자신의 그림자를 우울하게 바라보며 에디는 욕을 내뱉었다.

[젠장.]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놈한테 샌드위치나 사 줘야 하냐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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