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55 시련, 시련, 시련 (7)
[정말이지,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야겠어요?]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테이카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이렇게 숨어서 게이트를 공략하러 다닐 바에야 나랑 다니는 건 어떨까 물어보려고 했죠.]
그리고 테이카의 ‘본론’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전혀 반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왜?’다. 저 잘난 SS급 잠재력의 슈퍼 루키, 아니, 미국의 전략 병기가 어째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빌런 조직에 목을 매냐는 거지.
[우리랑 같이 게이트 공략을 다니고 싶다고요?]
내 떨떠름한 반응에도 테이카의 표정은 여전했다.
[그냥, 그때 되게 재밌었거든요.]
예브리카를 공략한 일이, 테이카 쿠퍼에게는 그 기억이 무척이나 좋은 추억으로 남은 모양이다.
━너한테는 아주 별로였냐?
‘나도 좋았습니다. 그다음에 우리를 쫓는 사람들을 피해서 보름 동안이나 노상을 떠돌며 개고생을 해서 그렇지.’
그 부분만 삭제해도 내게도 제법 괜찮았던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테이카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할 줄이야. S급 게이트에 밥 먹듯이 들어가는 헌터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 줄 알았는데.
[몇 달이나 지난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즐거웠던 건 처음이라서, 그 뒤에도 게이트 공략을 할 때마다 그쪽 생각이 났어요.]
[그건, 그때 상황이 특별했기 때문일 겁니다.]
테이카가 우리와의 공략을 특별히 재밌다고 생각한 이유는, 정석적인 게이트 공략과는 달리 어리바리 우당탕 돌아갔던 우리의 상황이 신선했기 때문일 거다.
[장담하건대, 다시 우리랑 공략을 나가게 되면 그때만큼 즐겁지 않을 겁니다.]
내 말에 테이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평소 어떤 방식으로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 그 생각이 바뀔걸요?]
대체 어떻길래? 내 눈빛에 테이카가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냥 나를 미사일을 발사하는 버튼 정도로 취급해요. 안전한 데 처박아 뒀다가 위험한 게 나타나면 미사일 발사 버튼을 꾹 누르는 거죠. 그럼 나는 후방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듯이 블랙홀을 던지고요. 이게 내가 아는 공략 전부예요.]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테이카는 귀한 몸이었다. 게이트 안이든, 밖이든 신주 대감 모시듯이 귀하게 취급했겠지.
저 철딱서니 없는 테이카는 그 모든 과정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테이카를 관리해야 할 길드 입장에서는 테이카라는 고급 인재를 잘 관리한다고 하는 일이었을 터.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을 귀한 전략 병기 취급에, 테이카는 질릴 대로 질린 모양이다.
끄응.
‘이래서 온실 속 화초가 양아치한테 반하는 로맨스 소설이 세상에 판을 치는 겁니다.’
너무 애지중지해도 이런 부작용이 생긴다니까?
━네가 양아치라는 자각은 있구나.
‘문제는 현실은 로맨스 소설과 아주 거리가 멀다는 거죠.’
━오호, 하긴. 온실 속 화초와 양아치라. 보통은 화초가 짓밟히면서 끝나기 마련인 조합 아니냐. 너도 설마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아뇨, 말했잖습니까. 현실은 로맨스 소설과 다르다고. 저 온실 속 화초는 맨몸으로 산을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르다고 말한 거냐!
그러니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저 온실 속 화초는 나를 손짓 한 번에 짓이겨 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지.
[우리를 좋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곤란한데요. 어쨌거나 우리는 범죄자고, 어, 쿠퍼 씨와 엮일수록, 뭐냐, 위험해지거든요.]
괜히 C급 용병대로 가정해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한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우리가 범죄자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죠? 신고하지 않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와 어울리는 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요.]
테이카는 내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알아요, 알아. 아까부터 말했잖아요. 그쪽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서 직접 찾아보기까지 했다고. 빌런 잡지까지 사 봤다니까요.]
[그래요, 그 빌런 잡지. 그 잡지만으로 우리를 판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우리는 어, 그, 상당히 위험한 범죄자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위험한 범죄자의 체면이 반은 날아간 것 같다만.
나도 지금 이 앞에서 내가 위험한 범죄자라고 떠들어대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저 녀석에게 제대로 된 경고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이 경고에도 여전히 테이카는 속이 없는 얼굴로 헤헤 웃고만 있었다.
[글쎄요, 한국에 퍼진 정보를 봐도 그렇게 나쁘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 같던데. 난 당신이 범죄자라면, 최악의 범죄자일 거라는 데에 동의하거든요. 아! 그러니까 범죄자로서 최악이라는 거지,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은 아닌데!]
또 한 번 말을 쏟아 내려는 테이카를 나는 손을 휘저어 진정시켰다.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됐어요,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그쪽은 빌런 쪽에서도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루키니까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그 빌런 잡지만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라니까요. 그나저나 도대체 그 잡지는 어디에서 얻은 겁니까?]
세계 최강의 헌터한테 누가 저런 잡스러운 황색 언론을 가져다 바친 건데! 오승우는 대체 저런 걸 잡지 않고 뭘 했냔 말이다! 내 외침에 테이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그 잡지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 제가 판매처를 알려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니, 진짜 됐으니까 휴대폰 집어넣어요!]
내 거절에 테이카는 아쉽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세상에, 정말이지. 아차하면 그대로 이놈한테 휩쓸려 버리겠다.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우리가 빌런이라는 겁니다. 당신 같은 헌터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그 말에 소파에 등을 묻은 테이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로 헌터와 빌런이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는 테이카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도 어느새 종적을 감춘 뒤였다.
[이 헌터계에는 당신보다 못한 인간들이 넘쳐나요. 왜냐, 미국은 철저히 능력제 위주거든. 여기에서 법이라는 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요? 정말 유연하기 그지없어. 저번에 가정부를 ‘실수로’ 얼려 죽인 A급 헌터 하나는 집행유예도 받지 않고 그냥 무죄 판결이 났어요. 참고로 그놈이 저지른 ‘실수’는 다섯 번째였죠.]
테이카는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다. 인재가 많은 나라긴 했지만, 이 넓은 땅덩어리를 모두 커버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였을까. 헌터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고, 헌터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변호사들을 고용했다.
가뜩이나 헌터를 상대로는 유해지는 법에,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변호인단까지.
[끔찍한 죄를 짓고도 멀쩡히 걸어 나가는 헌터들이 수두룩해요. 응, 우리 길드에도 그런 녀석이 몇 명이나 있어요. 헌터들을 벌하자! 그런 시위는 늘 일어나지만, 제대로 된 처벌을 받는 헌터는 몇 없죠.]
이건 내가 알던 사실과 달랐다.
[미국에서는 각성자 범죄자에게 가차없이 사형을 선고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거야, 다 힘없고 잠재력이 낮은 헌터들 얘기죠. B급 이상의 헌터가 사형된 일은, 글쎄, 극히 적어요. 어떤 짓을 저지르든,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테이카가 덧붙였다.
[법은 낡았어요. 게다가 이 나라에서는 로비가 합법이라고요. 알겠어요? 로비가 합법이라고요.]
내 생각보다 미국도 부패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나쁠지도.
[그리고 그런 나쁜 놈들은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도 않죠. 각성자는 우월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 몇을 죽인 게 뭐가 잘못이냐고 그러던데요.]
말을 내뱉은 테이카는 그 모든 일에 경멸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밝게만 보였던 테이카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 모습도 잠시, 테이카는 다시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니 난 그쪽이 얼마나 못된 짓을 저질렀든 신경 안 써요. 적어도 내가 봐 온 인간쓰레기보다는 그쪽이 훨씬 괜찮은 사람이니까!]
[예에…….]
이런, 그냥 생각 없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다는 건가. 이편이 더 상대하기는 어려운데.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내게, 테이카가 덧붙였다.
[그쪽이 저질렀다는 범죄가 정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미국으로 이주하는 건 어때요?]
[이주요?]
[미국은 해외에서 죄를 지은 헌터라도, 기꺼이 받아 주는 제도가 있거든요. 그동안 저질렀던 모든 죄를 사면해 주고 영주권을 주죠. 뭐, 이걸로 욕도 많이 들어 먹었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이잖아요. 감히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죠.]
나는 그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만 깜빡였다.
[내가 알아보니까 그 나라에서 벨츠머츠라는 빌런은 끔찍한 대상으로 묘사되더라고요. 하지만 여기로 오면 깨끗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정체를 감추면서 C급 게이트나 전전할 필요 없이, 그 두꺼운 가면을 쓸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요.]
허어. 확실히 솔깃한 제안이기는 했다.
오승우 때와는 달리, 내 인생을 깨끗하게 세탁까지 해 준다는 제안도 함께였으니 혹여 정체를 들킬까 노심초사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내가 범죄자를 자처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게 문제다.
테이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난 착실한 미국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물론, 뒤로 더러운 짓을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런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양지에 서는 순간, 나는 내가 누려 왔던 모든 자유를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 아무리 테이카 쿠퍼를 등에 업고 있어도, 아니, 오히려 테이카 쿠퍼를 등에 업고 있기에 더 조심해야 할 거다.
게다가 이곳으로 온다면, 내가 대한민국에서 했던 짓은 모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 돼 버린다. 아직 모든 게 시작 단계에 불과했으니까. 내가 이 일로 끌어들인 사람들도 모두 붕 뜨게 되겠지.
내가 구하려던 사람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올 수는 있겠지만……. 아니, 없겠구나. 내 말을 죽어라 듣지 않을 몇 사람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결론은 하나다. 문제를 회피하는 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에서 힘을 얻어서 돌아가는 방법도 있지.
‘성공한 헌터가 돼서 돌아간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그 사이에 대한민국은 설록진이 완전히 장악할 텐데.’
설록진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세뇌가 아니더라도, 설록진의 말에는 힘이 있다. 몇 년만 지나면, 설록진은 그 대한민국에서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 돼 버린다.
제아무리 유명한 헌터라도 그런 설록진을 대놓고 적대할 수는 없다. 설록진의 수법을 아는 난 안다. 양지에서 설록진을 상대하려고 하는 순간, 설록진이 어떤 지옥을 보여 줄지.
괜히 내가 그림자에 숨어 설록진을 상대하는 방법을 택한 게 아니지. 아니, 이런 나도 아직까지는 설록진을 제대로 상대하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조용히 힘을 기르고, 사람을 모으고,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에 한 번에 덮칠 생각이다.
설록진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아니, 죽여 버리기 위해서는 그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테이카 쿠퍼에게 저 나쁜 놈 좀 죽여달라고 빌 수도 없고요.’
음, 잠깐. 좀 끌리는데. 진짜 해 달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테이카의 반짝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됐다, 내가 무슨 끔찍한 생각을.
설록진을 처리하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전생에서 그를 막지 못했던, 아니, 오히려 그에 동조했던 내가 처리해야 하는 죄라는 뜻이다.
내게 주어진 탈출 티켓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이 탈출 티켓을 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요.]
[그럼 그 할 일이 모두 끝나면요?]
돌아온 질문에 나는 굳어 버렸다. 내 할 일이 모두 끝나면? 그다음을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