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55 시련, 시련, 시련 (5)
한서현에게 전해 들은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컨테이너 안이 엉망이라고?”
“예, 마치 거기에서 전투라도 벌어진 것 같았어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왜 내가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컨테이너가 박살이 나 있느냔 말이다!
“혹시 이런 건 아닐까? 재호가 일어났는데 자기가 혼자인 걸 알아채고 우리가 자길 버리고 갔다고 생각해서 화를 낸 다음 다 부순 거지.”
내 말에 한서현이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재호 형이 가끔 생각이라는 걸 하는 건가 싶게 무식한 데다가 야생 동물처럼 사납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듣다 보니 말이 이상하다만…….
그러게. 너 지금 실드를 치는 거냐, 김재호의 뒤통수를 치는 거냐. 어쨌거나 결론은 ‘아무리 김재호라도 컨테이너를 아무 이유 없이 부쉈을 리 없다’로 향했다.
“큼큼, 그렇지. 재호가 좀 사나워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근데,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컨테이너가 왜 개 박살이 나느냔 말이다!
“혹시 우리 정체가 밝혀졌다거나……. 아니, 그러면 여기부터 난리가 났겠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을 김재호는 행방불명이었다.
고로 김재호를 찾는 게 급선무다.
“일단은 재호부터 찾아봐.”
“네.”
차송진의 상태는 확인했으니, 김재호만 찾고 나면 여기에서 나갈 수 있겠지.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녀석이 어디서 다칠 녀석이냐.
‘하긴,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했지. 어디서 얻어맞고 올 애가 아니긴 하죠.’
그래도 기만자의 시련이 녀석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지 모르니 걱정이 됐다. 우리 중 가장 정신연령이 어린 김재호이니만큼, 어쩌면 트라우마가 생겼을지도 모르고…….
‘설마 그 트라우마 때문에 몸부림을 치다가 그렇게 된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당장 네가 바깥으로 나가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성적인 레이의 말에 나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끄응.”
일단은 한서현이 김재호를 찾아내는 걸 기다리는 수밖엔 없나. 그래도 한서현이 나섰으니 곧 김재호를 찾을 수 있겠지.
그 전에 우리 병실에 찾아온 불청객부터 처리해야겠다. 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한서현은 얼굴부터 찌푸렸다.
“그냥 쫓아내면 안 돼요?”
“그래도 손님인데 그럴 수야 없지.”
“하아…….”
한숨을 내쉰 한서현은 못마땅하단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나 또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밖에는 예상대로 오승우와 테이카가 서 있었다. 성큼 안으로 들어선 오승우가 나를 보며 말했다.
[베이런 씨와 이야기는 끝났나 해서요.]
[예에.]
━완벽한 사기였지, 그거.
‘사기라니요. 나중에 저한테 고마워할 겁니다.’
━고마워한다고? 세상에! 널 닮은 저주 인형을 만들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양심의 폭격을 무시하며, 나는 오승우를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앉아서 얘기할까요, 우리.]
고급스러운 1인 병실에는 무려 손님들을 위한 소파와 테이블까지 구비돼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이제 제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자신의 제안이 걷어차일 거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안타깝지만, 이미 대답은 오승우가 이 방에서 나가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좋은 제안을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답은 거절입니다.]
내 말에 오승우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여전히 웃는 낯이긴 했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하긴, 설마하니 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당장은 베이런 씨의 케어 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낄 수 없어서요.]
[……그렇군요.]
할 말이 많다는 얼굴로 오승우는 입을 닫았다.
당장에라도 ‘그런 형편없는 에이전시의 케어에 만족한다니. 말이 되냐?’하고 나를 닦달하고 싶겠지만, 체면이 있는데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
숨을 고른 오승우가 내게 말했다.
[혹시 위약금이 걱정된다거나, 다른 특약이 있다면 말해 줘요. 그 어떤 조건이든 맞춰 줄 수 있으니…….]
[조건 같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베이런 씨가 마음에 들어서요.]
‘나보다도?’ 이번에는 오승우의 속이 시원하게 보였다. 그 얼굴을 옆에서 빤히 바라보던 테이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배까지 잡고 웃는 게 아주 얄미웠다. 오승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만…….]
[그만 웃으려고 해도 웃음이 계속 나와서 말이죠, 크흡. 미스터 오가 이런 취급을 받는 걸 보는 것도 정말로 오랜만이다 싶어서요.]
[하. 하. 그래요, 계속 비웃어요.]
오승우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테이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낄낄거리던 테이카가 말했다.
[어째 여기서는 미스터 오의 행운이 따르지 않는 것 같네요.]
테이카의 말에 오승우가 한숨을 쉬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놀리는 테이카를 흘겨본 오승우가 내게 말했다.
[이미 마음을 굳게 먹으신 듯하니, 제가 무어라 말해도 소용없겠군요. 아쉽긴 하군요. 장래에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도 오승우는 프로였다. 옆에서 테이카가 세상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를 놀리고 있는데도 곧장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저런 말을 덧붙일 수 있다니 말이다.
오승우와 해야 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오승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오승우는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그 명함으로 연락해요.]
오승우의 이름과 연락처만 적혀 있는 명함은 그 자체만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음,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빛이 났다. 명함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명함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나는 웃었다.
[예, 생각이 바뀌면 꼭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자리에서 일어난 오승우는 테이카를 향해 눈짓했다. 하지만 그 눈짓에도 테이카의 엉덩이는 의자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테이카?]
오승우의 부름에 테이카가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스터 오가 거절당한 거지, 날 거절한 건 아니잖아요?]
[뭐라고요?]
오승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테이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도 테이카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미스터 오는 할 일 하러 가요. 나는 여기에서 좀 놀다가 갈 테니까.]
테이카의 말에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테이카 본인과 영어 미숙자 한서현뿐이었다.
[잠깐, 여기에서 놀다 온다고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오승우가 대신 물었다. 그래, 여기에서 놀다 간다니! 네가 왜? 대체 뭘 하면서?
[예. 묻고 싶은 것도 많고요. 미스터 오도 그랬잖아요. S급 게이트를 어떻게 이 사람들만으로 공략했는지 궁금하다고.]
[그거야,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지……. 아니, 그런 민감한 정보를 이렇게 말하는 게 어디에 있어요?]
[내가 못 할 말 했나?]
테이카는 여전히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나는 더 있다 갈래요.]
그렇게 말한 테이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있어도 되죠, 그렇죠? 혹시 곤란한 질문이었으면, 그건 안 할 테니까!]
[어, 저 그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러운 테이카의 변화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솔직히 쉬고 싶…….]
[오! 그럼 조용히 있을게요.]
겨우 꺼낸 말은 끝나기도 전에 반박당했다. 조용히 있는다고 그게 되겠냐! 너는 존재 자체가 시끄럽다고! 나는 간절한 눈으로 오승우를 바라보았지만, 오승우 또한 나와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얼굴이었냐고?
‘모르겠다, 님이 어떻게든 해 보세요.’
아니, 이봐요! 당신 헌터입니다. 내 애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님 애는 님이 알아서 봐야죠.
그 사이, 오승우와 나는 필사적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네? 제발요!]
파리처럼 싹싹 앞발, 아니, 손을 비벼대는 테이카의 모습에 나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댁 애가 지금 저렇게 떼를 쓰는데, 내버려 둘 생각입니까?’
내 시선에 오승우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마치 나에게 ‘제가 왜 책임져야 합니까? 우리는 남남인데.’라고 말하는 듯이.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치밀어 오른 불안함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긴, 테이카는 지금 휴가 중이었죠. 휴가 중인데, 제 의견이 뭐가 중요합니까.]
아니, 잠깐. 내 의견은? 우리 의견은 안 물어보는 거냐고.
내가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 오승우가 선수를 쳤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 저기…….]
내빼는 거냐! 오승우의 퇴장에 나는 다급해졌다.
[오승우 에이전시님!]
나는 급하게 그를 붙잡았지만, 구렁이 같은 오승우는 그사이 양복을 걷어 시계를 보는 체를 하며 온갖 바쁜 척을 다 하기 시작했다.
[아아, 죄송하지만 제 다음 일정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말이지요. 이만 가 봐야겠네요.]
야! 어딜 뻔뻔하게 저걸 내맡기고 튀는 건데!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올 뻔했다.
[하하! 잘 다녀와요.]
그 뒤에 이어지는 테이카의 말에 어이라는 놈이 증발했다. 잘 다녀오기는. 여기가 너희 집이라도 되냐? 내가 어이를 잃은 사이, 오승우는 재빨리 이곳을 빠져나갔다.
‘크윽! 이건 저의 패배입니다! 적의 수가 뻔히 보였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보스 실격입니다.’
━……그렇게 비장하게 말할 일이냐, 이게?
‘역시 세계 최고의 에이전시라고 불리는 사람답군요.’
━아니, 별로 그렇게 느껴지진 않는데…….
‘크, 저도 반성해야겠습니다. 절 위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철저한 자기비판만이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니까 말이죠.’
내 자기반성에 감복한 레이는 침묵을 택했다. 후우, 나는 숨을 내쉬고 방긋 미소를 짓고 있는 테이카를 바라보았다.
오승우가 떠넘긴 짐 덩어리를 해결해야 할 참이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한서현이 물었다.
“쟤는 왜 안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됐다.”
“아니, ‘그렇게 됐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소리를 지른 한서현이 갑자기 테이카를 향해 외쳤다.
[이봐! 꼬죠! 꼬죠!]
다행히 발음이 좋지 않아선지 테이카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너무나도 정직한 ‘겟 아웃’이어서 다행이군.
[하하, 저한테 지금 꺼져라는 건가요?]
아니, 알아들었잖아! 나는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착각입니다.]
나는 재빨리 한서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세계 최강 헌터한테 꺼져라니. 이건 너무 심했다.
“그냥 우리한테 궁금한 게 있어서 남은 거래. 호기심만 채워 주면 저쪽도 나갈 거야.”
“진짜요?”
한서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테이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닌데, 완전 눌러앉을 것 같은 얼굴인데.”
대체 왜 이렇게 눈치가 늘어난 거냐!
━그거야, 너처럼 늘 뒤통수를 치는 보스를 두면 늘 수밖에 없는 생존 기술이랄까.
젠장, 결국 내 잘못이라는 거냐.
큼큼, 나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저분께서 그냥,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상황을 수습하는 내게 테이카가 폭탄선언을 내던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계속 궁금해했거든요. 그도 그럴 게 우리 진짜 오랜만이잖아요!]
젠장, ‘오랜만’이라니. 테이카를 볼 때마다 느껴졌던 불길함이 실체를 드러냈다.
내 속도 모르고 테이카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