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55 시련, 시련, 시련 (4)
그림자 사이에서 멋대로 튀어나오는 김재호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자신의 사각을 노리고 주먹이나 단검 따위가 날아들었으니까.
에디는 상대방의 힘을 흩어 버릴 수 있었지만, 그것도 시야 안에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다.
에디의 지각 바깥에서 날아드는 주먹에 반응할 수는 없었다.
벌써 몇 대나 얻어맞았다.
김재호의 주먹이 튀어나올 때 힘을 흩어 놓긴 했지만, 김재호의 주먹은 그래도 강했다.
아슬아슬하게 에디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은 그대로 컨테이너 벽에 박혔다.
콰앙!
인간의 주먹과 금속제 컨테이너가 맞닿은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뻥 뚫린 컨테이너의 벽을 바라보며 에디는 헛웃음을 지었다.
[육체 강화계도 아닌데 이 정도라고?]
철을 뚫고 나간 주먹이 아플 법도 하건만, 김재호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잠깐!]
길게 늘어선 앞머리 속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동공을 본 순간 에디는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김재호의 몸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에디는 눈을 깜빡였다.
그림자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다가, 빈틈이 보이는 순간 습격. 간단한 전략이지만, 효과는 좋았다.
에디는 조심스레 숨을 쉬었다.
[하아, 이거 좋지 않은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식은땀이 에디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됐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일단은 사각을 줄여야지.’
에디는 전후방을 훑어보며 조심스레 걸음을 뒤로 옮겼다.
컨테이너 벽에 기대선 에디는 숨을 골랐다. 자신의 후방을 막고, 기다리는 거다. 저 남자가 자신의 시야에 나타나길.
그리고 마침내.
김재호가 그림자 사이에서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그 단검은 에디의 재능 앞에 힘을 잃고 추락했다. 단검에 실렸던 모든 운동에너지를 빨아들인 에디는 그림자 바깥으로 반쯤 모습을 드러낸 김재호의 몸을 속박했다.
“크.”
김재호는 이를 악물었다. 에디의 동공이 붉게 물들 때마다 몸에 깃든 힘이 빠졌다. 아무리 힘을 써도 힘이 나질 않는다. 그러니 피한다. 에디의 주먹은 김재호의 몸을 뚫고 사라졌다.
허상처럼 자신의 앞에서 사라진 김재호의 모습을 보며 에디 또한 얼굴을 구겼다.
두 사람의 상성은 극히 좋지 않았다. 둘 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타격은 주지 못한 채, 자잘한 상처만 늘어갔다.
벙커 침대를 받치던 다리가 우그러지고, 벽이 뚫렸다. 한서현이 아끼던 책이 구겨지고, 찢겼다.
[하아, 하아…….]
에디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대로 싸워 댔다가는 끝이 없겠다.
사나이 에드워드 시헬리스.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가 모토지만, 얻을 것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건 머저리나 할 짓이다.
그래, 그렇고말고. 난 머저리가 아니야!
[잠깐,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응?]
에디는 김재호의 주먹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난 네 적이 아니야. 알아들어? 지금 그쪽 친구들이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와서 그 소식을 알려 주러 온 것뿐이라니까!]
하지만 이미 불이 붙은 김재호를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젠장, 에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게이트 공략을 마치고 나온 골든데이에 안 보이는 사람이 있기에 혹시나 하고 컨테이너를 찾은 건데, 이런 싸움에 말려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진심으로 상대할 수도 없고.’
골든데이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왔는데, 그 골든데이 소속 용병이랑 이렇게 싸우게 되다니.
그래, 애초에 왜 싸워야 하냐고! 싸움이 힘드니, 집을 나갔던 이성이 돌아왔다.
에디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쪽 보스가 지금 많이 다쳤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니까?]
보스.
그 말에 김재호는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에디는 필사적으로 몸짓으로 말을 전했다.
[그래! 알겠어? 나는!! 네!! 적이!! 아니야!!]
그 간절한 몸짓에 김재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좋아, 못 알아듣는군. 침묵이 길어지자 김재호가 다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잠깐!]
아니, 조금 전에는 왜 멈춰 섰지? 천천히 에디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되짚었다.
[보스?]
그 단어에 김재호가 반응했다. 에디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래, 그쪽 보스한테 가자고! 보스! 당신! 보스!]
손짓과 발짓을 섞어 전한 에디의 진심이 닿았기 때문일까.
[그래! 보스! 보스!]
드디어 말이 통한 걸까? 멍든 얼굴로 활짝 웃는 에디를 바라보며 김재호는 단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제야 비로소 에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보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김재호의 말에 에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청한 놈, 말할 줄도 모르다니. 그 나이 먹고 말하는 법도 못 배우고 어떻게 산 거야?”
김재호가 자신의 욕을 하고 있다고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에디는 그저 활짝 웃기만 했다.
[그쪽도 보스가 보고 싶지?]
“그래, 우리 보스.”
[보스! 안다니까, 그쪽 보스가 어디에 있는지.]
김재호는 가만히 서서 에디를 노려보았다.
저 인간을 믿을 수 있나? 답은 모른다.
저 인간 없이 보스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
김재호는 강이신이 남겼던 쪽지를 떠올렸다.
재호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충분히 기다렸음.
혼자서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혼자는 아님.
그래, 이미 김재호는 보스를 충분히 기다렸다. ‘조금만’이 몇십 번이 지나갈 동안 오지 않은 보스가 잘못한 거다.
게다가 저 녀석을 따라가면 ‘혼자’가 아니니 괜찮지 않은가.
생각을 끝낸 김재호는 에디에게 말했다.
“보스한테 데려다줘. 이상한 짓을 하면 죽일 거다.”
그렇게 말한 김재호는 그대로 에디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잠깐, 내 그림자에 숨으라는 말은 안 했는데!]
에디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좋아, 어서 당신 보스를 만나러 가자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디는 발을 옮겼다.
* * *
김재호를 그림자에 품은 에디는 곧장 헌터 전문 병원으로 향했다.
[당신 보스는 저 병원 안에 있어. 게이트 안에서 중상을 입은 것 같았거든. 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중간중간 그림자를 향해 말을 걸기도 했다. 대답은 전혀 없었지만.
[거기 아직 있어?]
발을 멈출 때마다 그림자 사이에서 튀어나온 손이 바지를 잡아끌었다.
[깜, 짝이야!]
수줍음이 많은 건지, 뭔지. 도통 그림자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김재호를 보며 에디가 투덜거렸다.
[사람을 탈것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걷기도 싫다 이거야?]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병원 앞이었다. 병원 앞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게이트 앞 컨테이너에 대기했던 인원에 어디에선가 소식을 듣고 온 기자단까지 합세했다.
그들의 관심을 받던 S급 게이트를 공략한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묻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이 번들거렸다.
[젠장, C급 게이트가 어떻게 S급이 된 건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말이죠. 이런 일이 또 일어날까 봐 주변 게이트를 공략하지도 못하고 있다니까요.]
특히 게이트를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에이전시들이 몸이 달았다.
[회복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요. 간단하게라도 회견을 열어서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을 텐데!]
[지금 C급 이하 게이트도 전부 공략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고요. S급 게이트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너무 위험하다나!]
왜 이렇게 병원 앞에 사람이 모였나 했더니.
[좀 지나갑시다.]
에디는 그들의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에디의 말을 들었음에도 자리를 비키는 대신 에디를 밀쳐 냈다.
[병원 좀 갑시다! 예? 나 환자라고!]
김재호에게 얻어맞은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관자놀이에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진 에디를 본 사람들이 그제야 화들짝 놀란 얼굴로 길을 비켜 주었으니까.
덕분에 에디는 겨우 병원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림자 속 남자에게 유일하게 고마워진 순간이었다.
‘아니, 고맙지 않아.’
하마터면 날 두들겨 패 줘서 고맙다고 생각할 뻔하다니. 에디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겨우 들어선 병원이건만, 이곳에서도 분위기는 살벌했다. 평소에는 얼굴도 잘 볼 수 없던 보안 요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에디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진료 보실 분은 여기로 와 주시면 됩니다!]
멍때리고 있는 에디의 앞에서 한 남자가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에디는 그 남자의 뒤에 눈치껏 줄을 섰다.
[제가 진료를 보러 온 건 아니고요, 친구 면회를 보러 왔는데…….]
[그래서 그 친구분 성함하고, 병실이 어떻게 되죠?]
[젠장!]
간호사의 눈짓에 보안 요원이 들이닥쳐 남자를 끌고 나갔다.
[아, 진짜!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 왔는데!]
질질 끌려 나가는 남자를 보며 에디는 입을 벌렸다. 여기에서 저렇게 끌고 나간다고? 그동안 깽판을 친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접수처에 앉은 간호사도, 로비를 지키고 있는 보안 요원도 잔뜩 악에 받쳐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을 보는 순간 에디는 느꼈다. 이거 까딱하면, 자신도 쫓겨날 수 있겠다고.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여기저기 터진 에디의 얼굴을 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온화했던 간호사의 얼굴은 이어지는 에디의 말에 야차처럼 구겨졌다.
[면, 면회를 왔는데요.]
[몇 호 병실이신데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에디에게도 같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게 말이죠, 골든데이 용병대를 보러 왔는데…….]
에디의 말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간호사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외부인의 면회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 저 외부인 아니라니까요! 그 골든데이 용병대 소속 용병이랑 같이 왔단 말입니다.]
그때,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진짜 얼굴만 보고 온다니까! 진짜, 딱 얼굴만 보고 온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골든데이 용병대가 그렇게 대단하냐고옥!]
그렇게 외치던 남자는 보안 요원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 남자를 바라본 간호사가 에디를 향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무언의 추궁에 에디는 당황했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지금 내 그림자 안에 골든데이 소속 용병이 있다고.]
에디는 자신의 그림자에 발을 굴렀다.
[저기요, 나와 보세요! 잠깐만, 나와 보라니까?]
당장 골든데이의 일원인 이 남자만 나와 준다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하지만 에디의 간절한 부탁에도 그림자 속 김재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어이가 없단 얼굴로 에디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에디의 얼굴이 벌게졌다.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 여기에 사람이 있는데…….]
환장할 노릇이다. 에디는 제 그림자 위에서 요란하게 탭댄스를 췄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 간호사가 말했다.
[보안 요원을 부를까요?]
젠장. 에디는 벌게진 얼굴로 입을 꾹 닫았다.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를 깨달으니,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제가 나가죠.]
에디는 결국 병원 바깥으로 쫓겨나듯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도대체가! 속으로 욕을 내뱉은 에디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병원 바깥 벤치에 주저앉았다.
[젠장, 이렇게까지 보안이 빡셀 줄이야.]
하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저기에 몰린 사람들을 전부 받아 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니면,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거거나.’
확실히 그날 본 리더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중상자로 분류되어 바로 이곳으로 옮겨졌으랴.
‘그래도 그렇지…….’
아니, 애초에 보안이 문제가 아니다.
[저기, 좀 나와 보라고요!]
주변에 사람이 있어선가?
에디는 사람들이 없는 골목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그림자 바깥으로 김재호가 슬쩍 기어 나왔다.
[아까 나오라고 할 땐 더럽게 안 나오더니!]
에디는 억울함과 답답함에 가슴을 팍팍 쳤다. 가만히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던 녀석이 손가락으로 건물을 가리켰다.
[못 들어간다고! 당신이 옆에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니까?]
그 말에 김재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그래, 내 말을 못 알아듣지! 젠장, 말만 통했어도.]
그렇게 중얼거리던 에디의 머릿속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번역기라는 좋은 게 있지 않은가. 뒤늦게 그 생각이 떠오른 에디는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냈다.
[한국 사람이라고 했지.]
영어와 한국어를 설정한 에디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었다.
[저 안에 너희 보스가 있어. 네가 도와줘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리고 해석된 걸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그 말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알겠어.”
단검부터 꺼내 드는 김재호에게 에디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도움이 아니라고! 젠장, 단검 안 집어넣어?]
그날 에디는 깨달았다.
김재호와 자신 사이에는 언어보다 더한 장벽이 놓여 있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