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55 시련, 시련, 시련 (2)
두 사람이 병실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나는 노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개중 가장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음, 고생하셨습니다.]
━두 번 고생했다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것 같은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대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뜩이나 피곤해 보이던 인상이 이젠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파리해져 있었다.
[하하, 고생하긴 했죠.]
그렇게 말한 노먼이 한숨을 내뱉곤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저 사람들을 물리고 저와 이야기를 하자 하셔서…….]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 에이전시는 당신인데요.]
노먼은 내 말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
[게다가 저 때문에 고생한 게 눈에 훤히 보이는 사람을 무시할 만큼 제가 뻔뻔한 사람이 못 돼서요.]
[하하, 그렇죠. 하지만 이 업계에서는 신의를 휴지 조각 취급하는 사람이 많아서 말입니다.]
확실히 눈을 떴을 때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테이카 쿠퍼와 그의 에이전시가 있으면 기절초풍할 일이겠지만……. 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라, 음, 아무래도 빌런이니까. 응, 세계 최강의 헌터라고 막 발바닥 핥는 것도 좀 그래……. 괜히 우리가 한겨울에도 코트를 입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물론 싸우자고 그러면 곧바로 항복할 거긴 한데…….
큼큼,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샜다. 나는 다시 노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라도 테이카 쿠퍼와 그 미스터 오가 있으면 저 같은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 때문에 고생한 건 당신이잖습니까.]
[그, 그래도요.]
이 사람 보기보다 속 안이 말랑말랑하구만. 처음 볼 때는 타성에 젖은 직장인 NPC 1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유기견 같아 보인달까.
꼬질꼬질한 모습이 더욱 그런 생각을 부추겼다.
[어쨌거나 제가 노먼 씨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 건, 바깥의 상황에 대해 듣기 위해서입니다.]
평소라면 이런 정보 수집은 한서현에게 맡겨 두었겠지만, 영어 패치가 되지 않은 한서현은 영 무능, 아니, 우리 애한테 무능이라니! 다소 정보 수집에 미흡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노먼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내 질문에 노먼은 차근차근 바깥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흠,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내가 한 생각은 이거다.
‘빨리 튀어야겠는데…….’
단순히 오승우와 테이카 쿠퍼가 우리에게 접근했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 아니다.
[과학자들과 기자들이 잔뜩 몰려들어서는 저한테 정보를 털어놓으라고 들들 볶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아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노먼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나는 눈물을 훌쩍이는 노먼의 어깨를 다독였다. 수염이 숭숭 난 아저씨를 이런 식으로 달래기는 싫었지만, 그동안 우리를 대신해 시달린 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퐁퐁 솟아난달까.
훌쩍이던 노먼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용병대에 차를 도둑맞았다고 길길이 날뛰는 사람까지 저를 찾아와서는……. 아, 부서진 유리창은 일단 제 사비로 처리했습니다.]
훔친 차?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 일이 있었지? 정말 양심도 없는 놈이로구나.
‘여러모로 일이 많았잖습니까. 까먹을 만도 하죠.’
길길이 날뛰면서 고소를 하네 마네 떠들었던 남자를 겨우 달래 돌려보냈다는 노먼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떠올랐다.
음, 정말로 고생을 많이 했군…….
[외부에는 제 상태가 어떻게 알려진 겁니까?]
[일단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을 때 중상이시기도 했고, 테이카 쿠퍼가 온갖 요란을 떨면서 이곳으로 이송했던 덕분에 바깥에는 상태가 심각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아직까지 한 분은 혼수상태기도 하고…….]
[아직은 시간이 있단 뜻이네요.]
C급 게이트가 갑자기 S급 게이트로 변모한 사건이니,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대답이 필요할 거다. 문제는 내가 그 대답을 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거다.
‘아, 그거요. 게이트 안에 웬 기생충 같은 몬스터가 있었는데 저희 A급 대마도사의 마력을 쭉쭉 빨아먹더니 게이트가 S급으로 변했지 뭡니까. 하하!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허접이시잖아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일곱 살배기 어린애도 이렇게는 말 안 하겠다. 이거보다는 나은 말이 있지 않겠냐.
‘어떻게 포장해도 소용없습니다. 결국 우리 쪽의 전력이 C급 용병대가 아니었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질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이런 말들이 나오겠지. 왜 C급 용병대로 굳이 신분을 속인 것이냐. 혹시 뒤가 구려서가 아니냐!
타당한 의심에 정확한 추측이다. 어설픈 선동과 날조로는 회피 기동이 불가능하겠지. 그럼 답은 뭐다? 아예 저 질문이 나에게 들어올 일이 없게 하는 거다.
답을 최대한 미루다가 차송진과 김재호를 들고 튄다.
그게 내 계획이다.
나는 내가 사라진 뒤 그 모든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노먼을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노먼 씨…….’
나는 노먼의 떨리는 어깨를 진심을 담아 토닥였다.
[제 용병대원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만, 대답을 미뤄 주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저로 되겠습니까? 그 에이전시 오가 당신을 맡고 싶다고 말했는데…….]
[제가 은혜도 모르고 저쪽으로 갈아탈 줄 알았습니까?]
절대로 오승우 쪽과는 계약할 생각이 없다. 그야 그쪽에 원한을 샀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거든.
━그러니까 이용해 먹기 좋은 소시민 쪽을 이용하겠다는 거냐. 정말 악당 같은 생각이로구나.
음, 내 양심의 상태는 오늘도 양호하군. 확실히 레이의 말대로 이건 노먼에게 너무 못할 짓이다. 그러니 나로서도 최대한 할 수 있는 보상을 해야겠지.
[이번 게이트 공략, S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내 질문에 노먼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곧 정신을 차린 노먼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거기에 있던 과학자들이 S급 게이트가 틀림없다고 말한 내용이 있으니, 그걸 토대로 내용증명을 보내면 S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긴 할 겁니다.]
S급 게이트 공략 보상이 얼마나 되려나. 잘은 모르겠지만, C급 몇십 개를 합친 것보다 대단할 게 분명했다.
[저희 계약서에는 S급 게이트 공략에 대한 문항이 없었죠.]
[예, 그야…….]
[계약서를 다시 써야겠네요.]
내 말에 노먼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어, 따로 계약서를 준비해 오지 않았는데요.]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 갑에서 휴지를 뽑아낸 나는, 노먼의 양복 주머니에 꽂힌 펜을 잡아 들었다.
[여기에서 쓰면 되지 않습니까?]
설록진을 따라다니며 이런 ‘임시 계약서’는 지긋지긋하게 작성해 본 나다. 영어로 써야 한다는 점이 조금 까다롭지만, 뭐, 대충 뜻만 통하면 되겠지.
[그동안 공략했던 게이트의 수익은 모두 노먼 베이런, 당신에게 귀속되는 걸로 합시다.]
[예?]
[S급 게이트를 포함해서요.]
차송진과 김재호를 들고 튀려면, 정산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어차피 우리가 찾을 수도 없는 돈, 그 모든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노먼에게 주는 게 맞겠지.
[모, 모든 수익이요? 그건 정말로 엄청난 돈일 텐데요.]
[우리 때문에 베이런 씨가 한 고생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돈이겠죠. 게다가 앞으로도 나 때문에 고생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내가 노먼에게 눈을 찡긋했다.
[당장은 내가 베이런 씨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는 없으니까.]
[허어억.]
나는 휴지 계약서를 노먼에게 건넸다. 노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사인해요.]
[저, 정말로 이걸 어떻게 받아야 할지…….]
[고생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했던, 그리고 앞으로 할.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려고 하다니.
‘돈이라도 주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 잘했다. 어차피 네 놈이 저 녀석한테 줄 수 있는 건 돈뿐이니까. 그래, 개고생을 할 바에야 돈이라도 잔뜩 받는 편이 낫겠지.
오랜만에 레이와 내 생각이 일치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지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노먼을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계약서 받고 내빼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골든데이의 에이전시는 당신이에요.]
응, 그러니까 우리가 싼 똥을 치워 주렴. 노먼은 눈물을 도르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일단은 푹 쉬고 와요.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내 말에 레이가 곧바로 토를 달았다.
━괜한 걱정을 하지 말라고?
‘잠시나마 마음이 편한 편이 나을 거 아닙니까. 게다가 저 꼴을 봐요. 이런 말이라도 해야겠다니까요.’
[감사합니다.]
내 검은 속내를 모르는 노먼은 내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으아, 양심이 좀 찔리는걸. 하지만 나는 그 아픔을 빌런 조직의 수장답게 의연히 참아 냈다.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대체 뭘 했기에 저 사람이 줄줄 울면서 나가는 거예요?”
“돈으로 사람을 좀 샀어.”
“그렇게 노예 상인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요?”
“돈으로 매수했다?”
“으음, 그것도 좀…….”
“앞으로 저 사람이 우리 일을 대신 수습해 줄 거야.”
내 말에 한서현이 슬쩍 물었다.
“돈 많이 줬어요?”
“응…….”
그동안 번 돈 전부를 줬다고 하면 뭐라고 하려나? 눈치를 보는 내게 한서현이 말했다.
“딱히 혼낼 생각 없어요. 그냥 앞으로 우리 일을 수습할 사람이라니까 괜히 불쌍해져서…….”
생각보다 반응이 유했다. 그래도 동병상련이라는 걸까.
그나저나 ‘혼낼’ 생각이었구나. 어느새 한서현에게는 혼나는 게 당연해졌단 말이지. 그래도 내가 명색이 보스인데…….
큼큼, 어쨌거나 보스로서 해야 할 일은 확실하다.
‘이 일을 수습하고 얼른 튀어 버리는 거죠.’
지금부터 시간은 곧 금이다. 시간을 질질 끌수록 빠져나갈 구멍이 작아질 테니까.
“차송진부터 보러 갈까?”
차송진의 상태부터 확인해 둬야겠다.
* * *
노먼 베이런은 정신이 나간 얼굴로 병실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도 저 안에서 있었던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 손에 쥔 휴지 계약서를 보는 순간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
휴지 위에 쓰인 계약서. 하지만 그 가치는 말도 못 할 정도로 높다. 무려 S급 게이트를 공략한 수익마저 포함되었으니까.
‘그 수익을 모두 나에게 주겠다고.’
솔직히 오승우와 테이카 쿠퍼가 골든데이를 입원실로 옮긴 순간,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전해 줄 정보가 있다는 말로 고집을 부려 같이 들어가기로 했지만, 솔직히 비참한 꼴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자신과 계약한 용병대를 빼앗기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그래도 S급 게이트를 공략했던 신비의 용병대를 한 번이나마 에이전시 해 봤다는 걸 평생의 자랑으로 삼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구석에 박혀 있을 때였다.
그가 노먼을 불렀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 에이전시는 당신인데요.’
수많은 용병대를 에이전시해 보았지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노먼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몇 년째, 이곳에서 온갖 인간 말종을 봐 온 그에게 골든데이의 이산호는 처음 보는 인간형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뼈를 묻어야지.’
절대로 이 용병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
에이전시가 되고 난 뒤 처음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용병대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