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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80화 (180/352)

제180화

#55 시련, 시련, 시련 (1)

테이카 쿠퍼. 한서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손에 장을 지진다고 말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게 지금 이 상황에 할 말이냐?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그 인간이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사실 그 사람이 보스를 이곳에 입원시켜 준 거예요.”

“날? 왜?”

“모르겠어요.”

한서현은 눈을 찌푸렸다.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그쪽 사람이 접근하더라고요. 그때에는 보스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승낙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해요.”

“왜?”

“1시간 만에 보스가 멀쩡해졌거든요. 수술방에 들어갔다가 바로 그냥 나온 거 알아요?”

“그래?”

“예, 그쪽에서 보스를 괴물 보듯이 봤다고요.”

“음…….”

초재생을 들켜서 좋을 게 없는데. 아니,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다. 우리 정체를 들킨 건 아니니까.

“뭐라 말을 걸어왔는데, 일단 정신이 없단 이유로 돌려보내긴 했어요.”

“뭔가 이상한 건 없었고?”

한서현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한서현답지 않게 기운이 없는 얼굴이었다.

“쥐돌이를 붙여 봤는데, 영어라서 무슨 말인지 영…….”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볼이 붉었다. 크핫!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의 만능 해결사가 이런 모습이라니.

“비웃지 마요.”

“비웃은 게 아니라, 그냥 새삼…….”

귀엽다고 말하면 화를 내겠지?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말했다. 한서현은 은근히 자존심이 센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번 기회에 영어 공부 시작하는 건 어때? 배워 두면 다 살이 되고 피가 된다니까.”

━차라리 대놓고 놀리는 게 낫겠는데.

레이의 말대로 한서현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파삭 구겨지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찔끔할 정도였다. 하지만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던 것도 잠시,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싫다고 하고 싶지만, 필요할 것 같긴 하네요. 답답해 미치겠거든요.”

으드득,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굴렸다. 이거 괜찮은 거겠지. 크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그쪽 생각은 아직 모른다는 거지?”

“예, 그래도 그 테이카 쿠퍼잖아요. ……설마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죠.”

“무슨 이상한 생각?”

아직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꼭 내 마음을 읽은 것 같군. 나는 한서현의 의심 섞인 눈동자를 피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냥, 한 번쯤 만나서 그쪽 생각을 들어 보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는 생각을 한 것뿐이야.”

“그 사람들을 만나겠다고요?”

“네가 그랬잖아. 그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은 모르겠다고. 이런 상황에 괜히 우리가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지.”

“과민 반응이 아니라, 그 테이카 쿠퍼라니까요!”

“그래, 그 테이카 쿠퍼가 왜 우리에게 지금 관심을 갖겠냐. 우리가 자기 뒤통수를 치고 나른 벨츠머츠라는 걸 알아서? 아니, 그보다는 우리가 C급 용병대인 주제에 S급 게이트를 공략했다고 소문이 나서일 거다.”

“S급 게이트?”

하긴, 한서현은 게이트 안에 있느라 상황을 몰랐겠지. 나는 한서현에게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테이카 쿠퍼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걔가 우리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는 거지.”

C급 용병대 주제에 S급 게이트를 공략해?! 어쩌면 ‘대단한 루키가 나왔군!’이라는 생각이겠지.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설마하니 우리가 범죄자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우리가 도망가면?”

완전 ‘우리는 뒤가 구린 사람들이에요’하고 붉은 깃발을 흔드는 셈이다. 내 설명에도 한서현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래도 그 사람이 우리를 알아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뭐, 그럴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긴 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낮춰 한서현에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당장 우리가 여기서 도망갈 수 있기는 해?”

“네?”

내가 들어가기 전 게이트 주변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렸다. 테이카 쿠퍼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사라질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나빴다.

“재호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차송진은 혼수상태로 입원해 있는 중이라며.”

대답 없는 한서현에게 내가 말했다.

“너도 알 거 아니야. 차송진은 너를 구하려다 저 꼴이 된 거야.”

아무리 우리가 빌런이어도, 우리를 위해 그 개고생을 한 사람을 버리고 갈 순 없다.

‘나쁜 놈들을 좀 죽이긴 해도, 우리가 쓰레기는 아니잖아요.’

━앞 문장과 뒤 문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레이의 꼬장을 뒤로 넘기며 나는 한서현에게 말했다.

“차송진까지 데리고 갈 거야.”

우리를 위해 저 꼴이 됐는데, 버리고 갈 수는 없지. 그러니까 우리의 작전이 뭐든, 차송진을 안전하게 데리고 가는 것까지 포함이다. 내 말에 한서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를 노려본 한서현이 퉁명스레 덧붙였다.

“나도…… 버리고 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들고 가려고 했는데…….”

“혼수상태라며. 무슨 이상으로 혼수상태가 됐는지도 모르는데, 대뜸 들고 갔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냐?”

“그 생각은 못 했네요.”

차송진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기 전까진, 차송진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혹여 잘못되면 우리로서는 차송진을 치료할 수 없으니까 말이지.

‘흐, 이럴 때마다 치유 술사의 빈자리가 크단 말이죠.’

포션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건 외상뿐이다. 그것도 정도가 심한 외상은 치유 포션으로는 역부족인 경우가 허다하다. 나를 수술실에 넣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나야 초재생으로 어떻게든 회복해 냈다지만, 그게 안 되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남을 치유할 수 있는 재능은 전 세계적으로도 몇 명 발견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희귀하다. 미래에 활동하게 되는 치유 술사를 하나 알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재능을 각성하지 않았을 때지.’

언젠가 그 녀석을 만나러 가긴 가야겠지만, 지금 할 생각은 아니다. 능력을 각성하기 전에 그 녀석이 어딜 떠돌아다니고 있었는지 모르기도 하고……. 그보다는 나를 노려보고 있는 한서현을 설득하는 게 먼저다.

“일단 테이카가 우리한테 무슨 용건인지부터 알아보는 게 먼저야. 우린 지금 C급 용병대의 이름으로 S급 게이트를 공략했어. 그쪽에서 보이는 호의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제일 크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진 건 단순한 호기심일 가능성이 컸다. 입원까지 도와준 건, 그 호기심을 채우기 전에 보이는 호의일 수도.

내 말에 한서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쪽이 수상하게 굴면 바로 도망칠 거예요.”

“일단은 무슨 말을 할지 들어나 보자고.”

* * *

누군가 병실로 오는 걸 알아챈 한서현은 스켈레톤을 돌려보냈다. 스켈레톤은 마치 할 말이 있다는 듯 손을 휘저었지만, 안타깝게도 성대가 없는 스켈레톤이 할 수 있는 것은 헛손질밖엔 없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형.”

한서현은 제법 애틋한 인사와 함께 스켈레톤을 돌려보냈다. 흠, 살갗도 없는 스켈레톤이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건 착각일까. 음, 착각이겠지…….

다음에 스켈레톤을 소환할 때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다. 내 정수리 건강은 아주 소중하거든.

한서현이 스켈레톤을 돌려보낸 직후, 병실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은 테이카와 오승우, 그리고…….

[노먼?]

골든데이 용병대의 에이전시를 맡고 있는 노먼 베이런이었다.

솔직히 노먼이라는 것도 겨우 알아봤다. 며칠 사이에 상태가 무척이나 안 좋아져서.

[깨어나셨군요.]

노먼은 내게 조심스럽게 눈짓했다.

[좋아 보이네요.]

노먼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예, 그쪽은 아주…… 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새삼 노먼에게 협박을 하고 갔던 게 미안해지기도 했고, 며칠 만에 저렇게 낡아 버린 사람을 보고 있으니 괜한 죄책감이 들기도 해서.

[어쨌거나 이렇게 살아서 얼굴을 보니까 좋네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장은 노먼을 챙겨 주는 것보다 할 일이 많다.

나는 오승우와 테이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가 봐도 쪼그라들어 있는 노먼과 달리 저쪽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값비싼 수제 양복에, 몇천만 원은 하는 시계. 오, 저 브랜드 나도 좋아했는데…….

━지금 그런 거나 볼 때냐.

‘아, 나도 모르게.’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쪽은…….]

적당히 말을 던지자 오승우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는 처음 뵙네요. 골든데이의 이산호 씨?]

[예, 그쪽은 오승우 에이전시죠. 유명한 분이라서 알고 있었습니다.]

[흐음, 이거 영광이네요. 요새 제일 핫한 분께서 저를 알고 계시다니.]

내가 요새 제일 핫한 분이라면, 당신은 전 헌터계에서 핫한 에이전시잖냐. 나는 애써 웃었다.

[뭐, 저를 아실 정도니 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계시겠죠.]

[예…….]

테이카 쿠퍼. 그를 모를 리가. 나는 한서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한서현의 얼굴 가죽은 비록 두껍지 않지만, 가면을 쓰고 있어 다행이었다. 한서현을 살핀 나는 다시 테이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테이카 쿠퍼는 방긋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원래 저렇게 미소가 헤픈 놈이던가?

‘글쎄요, 저도 사실 테이카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라서 말이죠.’

미국의 최강 전력! SS급 잠재력을 타고 태어난 전략 병기! 이런 소리는 들었어도 테이카 쿠퍼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진작 가십지 같은 걸 읽어 둘 걸 그랬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 이 친구에게 그쪽에서 입원을 도와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내가 슬쩍 오승우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솔직히 기대하지 못한 도움이어서 의아하긴 하더군요. 대단하신 두 분께서 우리 용병대에는 어떤 용건이신지.]

내 말에 오승우는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나 같은 놈이 바로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이쪽은 시간이 금이라서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골든데이 용병대와 계약하고 싶습니다.]

나는 당황했지만, 곧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저희가 S급 게이트를 공략했기 때문이겠죠.]

[예, 그렇죠.]

뒤에 걸어 다니는 오승우 표 후광이나 다름없는 테이카 쿠퍼까지 달고 왔으니, 보통의 용병대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이런 곳에서 임시 에이전시와 계약해 C급 게이트나 전전하고 있던 C급 용병대에게 무려 ‘그’ 오승우와 ‘그’ 테이카 쿠퍼가 찾아와 계약하자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말이다.

[일단 제 에이전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그 말에 노먼의 어깨가 떨렸다. 내 말에 오승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쪽 에이전시요?]

[예, 아직 미스터 베이런이 제 에이전시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제 에이전시를 빼놓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말한 내가 오승우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괜찮다면 이 대화는 우리끼리만 하고 싶군요.]

내 말에 오승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러시죠! 이거 제가 무례했네요. 아직까지 골든데이 용병대의 에이전시는 이 친구가 맞는데 말이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승우는 툭 하고 테이카 쿠퍼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여태까지 진득하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테이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 좋으니 어디 도망가지만 말아 줘요. 그쪽하고는 하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거든요.]

뒤통수에 손깍지를 낀 채로 싱글벙글 웃는 테이카를 보며 나는 눈을 찌푸렸다.

‘대체 뭐…….’

━불길한데, 저건.

상큼한 미소를 보고 할 말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랬다.

대체 나랑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건지.

‘어쩌면 이거 나를 도와준 게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는데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등에 땀 한 방울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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