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54 기만의 시련 (6)
다행히 이번에도 죽지는 않았나 보군. 눈을 뜨고 내가 제일 처음 한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용케 이번에도 죽진 않았다고.
“보스! 정신이 들어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한서현이었다. 멀쩡한 녀석을 보니 긴장이 훅하고 풀렸다.
“너야말로 정신이 들어? 날 막 죽이고 싶진 않지?”
내 말에 한서현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떨궜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울라고 한 소리는 아닌데. 농, 농담이었다고!
━세상 제일 형편없는 농담이었다.
젠장, 그런가? 확실히 정신 지배를 당해서 나를 공격하던 애한테 하기에는 그리 좋은 말이 아니었을지도. 아니, 이런 감히 내가 또 실수를.
나는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린 한서현을 보며 손만 들썩였다.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 낸 한서현이 쓱쓱 제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죄송해요.”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서현과 눈을 맞추며 내가 말했다.
“미안하긴, 나도 이상한 말 해서 미안하다. 나름 농담이라고 한 건데…….”
“세상 최악의 농담이었거든요?”
아무래도 한서현과 레이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게 아닐까? 내 뒤에서 나 몰래 둘이 막 신호를 주고받는 거 아니냐고.
어쨌거나 저런 말까지 던지는 걸 보니 그래도 좀 마음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렇게 돌아와 줬으면 됐어. 너도 무사하고, 나도 무사하고. 그거면 된 거야. 그러니까 그만 좀 울어라, 기껏 이렇게 살아왔는데 울지 말고 웃어야지.”
그렇게 말한 나는 툭툭 한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서현은 내 말에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붉어진 게 안쓰러웠다. 쩝, 내가 기절했던 동안 저 녀석이 얼마나 마음이 졸였을지.
“어쨌거나 무사히 게이트를 나왔으면 됐…….”
잠깐만, 중요한 무언가 잊은 것 같은데. 나는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경악했다.
“도토리!”
이런, 차송진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고 기절해 버렸다.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도토리요?”
아, 너무 당황해서 머릿속에 있던 단어가 그대로 튀어나왔다.
“차, 차송진은?”
━그놈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저 녀석이 챙겼으니까.
레이의 말과 동시에 한서현이 내게 설명해 주었다.
“형이 알려 줘서 데리고 왔어요.”
“형이?”
내 질문에 한서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한서현이 바라본 허공에 흰색 스켈레톤이 나타났다.
“허어…….”
마지막으로 본 게 확실히 피가 부족한 내 머리가 만들어 낸 환상은 아니었구만.
“형이라고 부르게 된 거냐.”
“확실히 저희 형…… 처럼 굴긴 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한조희의 시체를 재료로 만들어졌다지만, 저 스켈레톤과 한조희는 다르다. 하지만 최근 나도 느꼈듯이, 저 스켈레톤에는 분명 다른 이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나를 두들겨 팬 것만 봐도 그렇지. 누가 봐도 동생을 나쁜 길로 끌어들인 악당을 응징하려는 의지가 가득한 손짓이었다고. 게다가 저 녀석이 특별한 건 한서현의 의지 없이도 자율 행동을 한다는 거겠지.
지금도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영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네가 소환해도…… 저렇게, 뭐냐, 자아가 있는 거냐?”
원래 저 스켈레톤이 다른 모습을 보였던 건 한서현이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뿐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게이트 안에서 무얼 봤든, 차송진처럼 한서현도 성장을 한 것 같았다.
음, 솔직히 말하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지만…….
“궁금한 건 다 물어봐도 돼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한서현이 내게 말했다.
“차송진은 내게 그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봤다고 했어. 그리고 그건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말했지.”
그 때문에 차송진은 도망치듯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 기억에서 너무나도 도망치고 싶었으니까.
혹여 한서현도 비슷한 기억에 시달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내 질문에 한서현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말했다.
“제 경우에는 그리 끔찍한 기억이 아니었어요.”
“끔찍한 기억이 아니었다고?”
“예, 그보다는 그리운 기억이었죠. 형이 나왔거든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서현에게 형이란 여러모로 복잡한 존재였으니까.
“난 조금도 괴롭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뻤어요. 형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다 할 수 있어서.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무슨 표정?”
“나한테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요.”
윽,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나.
“하나도 안 미안한데. 네가 미안해하면 몰라, 내가 왜? 내가 널 구한 거잖아. 뭐, 저 스켈레톤이, 그러니까 네 형의 도움이 있었지만.”
나는 애써 농담으로 말을 넘기려고 했지만, 한서현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날 이 일에 끌어들였다고 생각하잖아요. 날 나쁜 놈으로 만들어서 미안하다, 늘 그렇게 생각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어…….”
“송진…… 이 형이랑 둘이 야참 사러 갔던 날. 정말 둘만 보낸 줄 알았어요?”
“그 말을 다 들었단 말이야?”
이제는 내 얼굴이 벌게질 차례다. 젠장, 이렇게 쪽팔릴 데가!
“내가 벨츠머츠가 되기로 한 건 내 선택이에요. 보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요.”
“하, 잘못이 없긴. 넌 겨우 미성년자고…….”
“보스가 아니었더라도 난 형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캐려고 했을 거예요. 보스를 만나서 이 정도지, 아니면 더한 짓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때 잠자코 있던 스켈레톤이 주먹을 들어 올려 내 정수리와 한서현의 정수리에 연달아 꿀밤을 날렸다.
“아!”
“악!”
우리 둘은 동시에 정수리에 손을 얹고, 그냥 푸스스 웃어 버렸다.
“네 형 손 진짜 맵지 않냐?”
“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스켈레톤은 우리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숨을 쉬는 티를 팍팍 냈다. 그 모습에 우리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한조희든, 아니든 상관없다. 누가 됐든 저 친구는 한서현을 아꼈고, 한서현에게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어 주었으니까. 거기다가 우리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기까지 했다.
비록 툭하면 우리의 머리통을 갈기는 주먹이 너무 맵기는 하지만.
스켈레톤 쪽으로 시선을 돌린 한서현이 말했다.
“형은 나를 제대로 된 헌터로 만들기 위해서 늘 희생했어요. 형은 나를 위해 돈을 벌었고, 나를 위해 인생을 걸었어요. 그런데 난 그랬던 형의 의지를 저버리고 지금 여기에 있죠. 그래서 늘 미안했어요. 형의 희생을 아무런 가치도 없게 만들었으니까.”
한서현의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냥 단순히 한조희가 그렇게 돼서, 형을 제 손으로 직접 스켈레톤으로 만든 일 때문에 악몽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보스처럼 나도 벨츠머츠가 된 걸 절대로 후회 안 해요.”
그 말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제 동생에게 빛나는 인생을 선물해 주고 싶었을 한조희가 알면 화가 날 이야기지만, 이 말을 듣게 되어 정말로…….
기뻤다.
흠흠, 그렇다고 너무 헤벌쭉 웃을 수는 없지.
자, 이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마지막에 본 건 스켈레톤이 한서현에게 다가가 정신 차리라는 듯 한서현의 머리를 내리치는 모습이었다.
“내가 기절한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내 질문에 한서현은 더듬더듬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녀석을 해치운 게 한서현의 스켈레톤이었다고…….
“……기만의 시련이라.”
저 스켈레톤이 기만자를 죽이는 순간, 한서현에게는 기만의 시련을 통과했다는 안내창이 떴다고 했다.
‘시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이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등급에 비해 난도가 있고, 특수한 몬스터가 나온다는 말뿐이었다. 애초에 시련 게이트를 통과한 이도 얼마 없다. 나도 설록진 옆에서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게 아니었더라면 아예 알지 못하고 넘어갔을 거다.
그만큼 희귀한 게이트 형식이었으니.
그래도 시련 게이트에 대해 한 가지 공통된 말이 있다면, 그건 시련을 통과한 자에게 특별한 보상을 준다는 거였다.
“보상은?”
“패시브가 하나 생기긴 했어요. 시련의 통과자라는. 하지만 ‘1/5’로 표시되더라고요.”
“흠.”
나는 속으로 슬쩍 상태 창을 불러 살펴보았지만, 내게는 시련의 통과자라는 패시브는 따로 생기지 않았다. 이번 게이트에서 그야말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이가 없네.’
애초에 시련에 걸려들지 않았으니, 통과도 하지 않았다는 판정인가. 젠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른쪽 팔뚝이랑 배때기에 구멍까지 났는데 나만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후, 그래도 차송진과 한서현이 얻은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 분의 일만 얻은 패시브 스킬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당장 자신의 재능을 조금 더 잘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패시브 스킬을 쪼개서 주는 건 너무하지, 너무해! 시련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도도 엄청났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난도가 그 지경이었던 건, 너희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인 것 같은데 말이다. 평범한 파티였더라면, C급 게이트에 맞는 헌터였을 테니까.
확실히, C급 게이트에 맞는 인원으로 들어갔더라면 나처럼 개고생하진 않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기만자의 정신 지배가 그토록 강해진 이유도, S급 게이트로 승격한 이유도 모두 한서현의 마력을 빨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고 말이지.
윽, C급 게이트에 데리고 들어가기엔 너무 센 녀석들이어서 이런 문제가 터졌다는 거냐.
게다가 모두 멘탈이 약한 편이기도 했으니.
“내 잘못이다. 진작 정신계 방어 아티팩트를 준비해 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세뇌 능력자인 설록진도 있는데 너무 방비가 없긴 했다. 물론 설록진의 세뇌는 웬만한 아티팩트 따위로는 막을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아예 대비하지 않은 건 심했다. 으응, 심하고말고.
여기에서 나가면 곧바로 정신계 스킬을 막아 줄 아티팩트를 구해 봐야겠다.
문제는 김재호의 단검이 다른 아티팩트를 죄다 거부한다는 건데……. 그거는 어떻게든 나중에 처리를 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재호는 어디에 있지? 컨테이너에 있나?”
내 말에 한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잠깐 짬을 내서 그쪽에 염탐을 보내 봤는데, 컨테이너에는 아무도 없던걸요.”
젠장, 걔는 또 어디에 간 거야. 내가 분명 거기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일부러 쪽지까지 남겨 뒀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죄다 보스 말 듣기를 우습게 안다니까.
“일단 최선을 다해 찾아봐. 차송진은?”
“그 사람은 상태가 심각해서 집중 치료실에 있어요. 마나 회로가 다 뒤틀렸다던가. 내상을 입은 거라 포션으로도 치료가 안 돼서 당분간은 거기에 있어야 한대요.”
“뭐?”
하긴, 피를 토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다. 쿨 타임도 채 되지 않은 기술을, 자신에게 적대적인 마력이 가득한 곳에서, 정신 지배를 막아 가며 썼으니…….
초재생을 지닌 나만 해도 이틀간은 꼼짝도 없이 기절했다고 했지. 이번의 경우에는 리바운드를 모두 차송진의 몸으로 받았으니 더욱 심할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상황이 나빴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졌던 나보다 회복이 느리다니.
초재생을 쓸 수 있는 나와 달리 차송진은 깡으로 부상을 치료해야 하기에 속도가 더딘 모양이다.
“그보다 큰일이 났어요.”
“큰일?”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요.”
“으응?”
왜? 병원비가 걱정돼선가. 내 중얼거림에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본 한서현이 속삭였다.
“테이카 쿠퍼가 여기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