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54 기만의 시련 (3)
시야를 가리던 검은 모래를 모두 걷어 내고 나니 주변의 참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덤벼들었다가 얼음 창에 꿰인 마수들과 스켈레톤의 사체들은 물론이고, 뼈 폭탄이 터졌던 부분은 사람 몇이 들어가도 될 만큼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마력에 그을린 잿빛의 땅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보니 전쟁터 한가운데에 떨어진 기분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겨우 각성자 둘이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하긴, 한서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아낌없이 마력을 부어 기술들을 써댔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이 주변은 다시 모래로 뒤덮일 거다. 그리고 한서현은 또 숨어 버리겠지.
그러니 시야가 걷힌 지금, 한서현을 찾아내야 한다.
“크흑.”
하지만 내 몸은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내게 레이가 재빨리 물었다.
━괜찮냐.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괜찮을 리가. 출력을 올린 대가는 언제나 그렇듯 확실했다. 가뜩이나 멀쩡하지 못한 몸으로 마나석의 마나를 끌어다 쓴 것 때문인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너, 너어!
레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 나는 뜨끈한 게 흐르는 인중을 훑었다. 아까는 피를 토했는데, 지금은 코피라니. 과하게 마나를 당겨 쓴 탓에 마나 회로가 과열되기라도 한 것인지, 온몸이 열로 절절 끓었다.
‘나중에 벨츠머츠를 그만두고 은퇴하면, 헌터 아카데미라도 세울까 봐요.’
한서현을 봐라. 처음에 나한테 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기껏해야 쥐 몇 마리를 겨우 부르던 애가, 지금은 이렇게 대단한 헌터가 되지 않았나.
나 제법 사람을 키우는 데에 재능이 있을지도?
━농담이나 할 때냐!
‘하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몸에서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똑 떼 어디론가 보내 버리고 싶을 정도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하긴, 제가 아니더라도 서현이라면 어떻게든 강해졌을 겁니다. 그래도 제가 선물한 스태프에 당하는 건 좀 모양이 빠지는데.’
━그래, 모양이 빠지지.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집중해라. 네가 애지중지하던 부하한테 죽기 싫으면.
‘그렇죠, 정신 차려야죠.’
지나친 고통에 이성이 깜빡였다. 그냥 이대로 헛소리나 늘어놓다가 드러눕고 싶지만, 그럴 순 없지.
일단은 한서현을 찾아야 한다. 나는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크게 끔뻑였다.
여기저기 늘어선 사체들, 뼈 무더기, 구덩이, 검게 물든 나무들을 지나 바위 옆.
한서현은 그 바위 옆에 있었다.
이곳에 와서 녀석과 한참을 싸운 끝에, 나는 비로소 한서현을 마주 볼 수 있었다.
한서현과 나의 거리는 불과 몇십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한서현의 모습을 보자마자 숨을 삼켰다.
“서현아.”
내 부름에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나 또한 대답을 기대하고 내뱉은 말이 아니다. 다만 한서현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신음처럼 그 이름이 새어 나왔을 뿐이다.
눈을 감은 채 스태프를 앞쪽으로 내민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서현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스태프에서 흘러나온 검은 모래에 반쯤 잠겨 있는 한서현의 몸은 척 보기에도 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선명하게 돋아난 핏줄에는 거뭇한 기운이 가득했고, 입술 또한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마나 중독 환자를 보는 것 같았다.
━진짜 마나 중독일 리는 없다. 한서현은 고등급 재능을 지닌 각성자니까.
‘제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능력을 혹사당하면 몸이 망가지기 마련이죠.’
예상대로다. 수일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마력을 뽑아낸 한서현의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한서현의 몸과 동화된 마정석은 한서현의 몸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마력을 쭉쭉 뽑아내고 있었다.
이래서야 마정석에 깃든 마력을 뽑아내는 필터나 다름없는 꼴이다.
눈이 뒤로 돌아갈 만큼 열이 받았다.
감히, 한서현을 저런 식으로 만들어?
다행히 이 일의 원흉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한서현의 뒤에는 투명한 플라나리아처럼 생긴, 기묘한 몬스터가 있었다. 덩치는 유치원생 정도. 희게 빛나는 날개가 달린 녀석은 공중을 부드럽게 유영하며 한서현의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오리를 닮은 얼굴에 달린 두 개의 검은 점은, 가뜩이나 예쁘장하게 생긴 녀석을 제법 귀엽게 보이게 했다.
아이러니했다.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녀석이 저렇게나 깜찍하게 생겼다니.
녀석의 검은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친 순간, 시스템이 내게 녀석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기만자’를 마주합니다.」
이런 사념이 들린다는 건, 녀석의 정체가 무척이나 특별하다는 증거다.
하긴, 각성자의 정신을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놈이 평범하다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기만자라.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요.’
━나도 마찬가지다.
필요할 때마다 쓸데없는 내용을 꺼내 오는 탈착식 기억력을 가진 레이와는 달리 내가 처음 보는 몬스터라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바벨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비록 그곳에서 나의 평가는 최악이었다지만,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
그러나 저런 건 처음이다.
‘뭐든 상관없습니다.’
뭐가 됐든, 죽이면 그만이다.
‘기만자’라. 우리를 기만한 죄는 네놈의 목숨으로 받겠다. 한서현의 뒤에서 작게 날갯짓하는 기만자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녀석을 갈가리 찢어 놓겠다고 결심했지.”
내가 쓰러지기 전에, 어떻게든 저놈을 해치워야 한다.
저놈만 해치울 수 있다면, 바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다.
기만자의 몸이 번쩍임과 동시에 한서현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뭉치기 시작하는 흑마력을 보며 나는 욕을 중얼거렸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내게, 또 한 번 모래 창이라도 날아든다면 그때는 모든 게 끝이다.
“퉤.”
나는 자꾸만 속에서부터 넘어오는 피를 뱉어 냈다. 이미 내 몸은 한계다. 중간중간 초재생으로 몸을 조금씩 회복하지 않았다면, 이미 진작 쓰러져도 쓰러졌을 거다.
하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다. 드디어 이 개짓거리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았는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나석을 집었다. 그 작은 동작 하나만으로도 내가 무얼 할 계획인지를 읽은 레이가 기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이제 다 끝났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거다.
나도 안다. 연달아 고출력을 내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괜히 70퍼센트 이상의 출력을 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연달아 그러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하지만…….
‘바로 눈앞에 있잖아요.’
나는 팔찌에 마나석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팔찌에서부터 퍼져나간 마력이 손끝에서 새하얀 번개가 되어 튀었다.
내 손끝에서 나간 번개는 곧바로 기만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한서현이 스태프를 쿵 바닥에 찍었다.
내가 소환한 번개는 한서현의 모래를 타고 그대로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기만자는 여전히 한서현의 뒤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둥근 두 눈이 왠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지나친 비약일까.
그래, 한 번은, 그리고 아마 두 번쯤은 내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거다.
내 몸이 엉망인 것처럼, 한서현의 몸도 엉망이었다. 아무리 내가 마력을 투자해 주변을 정리했다곤 해도, 이렇게 사방이 깨끗해진 건 한서현 역시 다시 많은 모래를 소환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나는 연달아 번개를 쏘아냈다. 번개의 속도는 빛과 같다. 모래의 움직임은 그보다 무조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번개를 쏘아 낼 때마다 기만자를 보호하고 있는 검은 모래의 양은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래의 양이 눈에 띄게 적어졌을 때. 나는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질 정도로 나는 마력을 끌어모으고 또 끌어모았다. 내게 동화된 마력은 주변의 공기에 깃든 마력의 성질을 순식간에 바꾸었다.
머리카락이 정전기에 의해 붕 뜨는 순간,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번개는 거대한 빛이 되어 기만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내가 불러낸 번개는 곧바로 기만자를 타격했다. 기만자의 몸 주변에 번개가 튀며 기만자의 몸이 뒤틀렸다.
기만자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약해 빠졌다.
이 모든 일을 일으켰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연약하고, 허접한 놈이었다. 놈을 보호하던 모래가 사라지자마자 녀석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함락되었다.
됐다.
기만자가 쓰러지고, 한서현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기만자 또한 방어와 동시에 공격을 준비했다는 거였다.
“쿨럭.”
피를 토해 낸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옆구리에 모래로 된 창이 꽂혀 있었다.
빌어먹을.
그제야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시야가 기운다. 나는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정신, 정신 차려라!
레이의 목소리가 뒤늦게 머리를 울렸다. 긴장감에 들리지 않았던 레이의 목소리가 이제야 들렸다.
‘진작 말해 줬……으면 좀 좋습니까.’
━말했다! 말했어! 네놈이 그걸 들을 만큼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거지!
아, 이건 안 좋다. 시야가 점차 검게 물들고 있었다. 옆구리에서 흐른 피에 옷이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건 내가 즐겨 쓰는 작전이었는데, 저 기만자에게 그대로 당해 버렸다.
흰색의 기만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이번 타격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나와 달리 저 녀석의 몸은 아직 멀쩡했다.
번개에 당한 충격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는 있었으나, 아직 숨이 제대로 붙어 있다는 뜻이다.
‘죽여야만…….’
나는 어떻게든 마나를 짜 올리려고 했지만, 점차 흐려지는 정신으로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하다못해 마력탄이라도, 저 녀석에게 제대로 먹여야 하는데…….
━정신을 놓지 마라. 응? 내 말 듣고는 있냐?
레이의 말이 점차 멀어졌다. 무어라 대답을 하려 했지만,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점차, 고통 또한 희미해졌다.
그냥, 졸렸다.
그때 흐릿한 내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내가 한조희라고 의심했던 흰색의 스켈레톤이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 스켈레톤은 나와 한서현 사이에 홀연히 나타났다.
저걸 부른 건, 적어도 기만자나 한서현은 아닐 거다. 지금 그쪽은 내가 날린 번개로 정신이 없을 테니까.
스켈레톤이 네크로맨서의 명령도 없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원래도 저 스켈레톤은 한서현이 정신을 잃었을 때 종종 튀어나오고는 했던 별종이었다.
대체 왜, 그리고 하필이면 지금. 저게 나타난 걸까.
흰색의 스켈레톤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서현의 앞으로 향한 녀석은 손을 들어 한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먹을 들어 올린 녀석은 그대로 한서현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퍽, 꽤나 아픈 소리를 들으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저거 제법 아프지.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