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75화 (175/352)

제175화

#54 기만의 시련 (2)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우리를 맞은 것은 어둑어둑한 하늘이었다. 처음엔, 밤에 들어온 걸까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엔 여전히 태양이 쨍쨍 빛나고 있었다. 그 말은, 주변을 어둡게 만든 건 다른 놈이라는 뜻이었고…….

그 다른 놈이란, 한서현의 마력이 섞인 검은 모래였다. 사방에 퍼져 있는 검은 모래가 태양 빛을 가릴 정도로 많았던 거다.

━이건 마치, 예브리카 때가 생각나는구나.

주변 몇 km를 완전히 모래로 덮어 버렸던 그 몬스터처럼, 이 게이트 안에 있을 한서현도 제 마력으로 이 게이트를 전부 덮을 만큼의 모래를 불러냈다.

아무리 마력이 방대한 한서현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마력을 낭비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미친 짓이다, 이건.

‘한시라도 빨리 한서현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래, 늦었다간 정말 그 녀석이 마력을 쪽 빨린 미라가 돼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그런 농담 하지 마세요. 진짜 그렇게 돼 있을까 봐 무서워 죽겠으니까.’

내 말에 레이는 입을 닫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두려웠다. 한서현이 잘못되었을까 봐.

“크흐.”

뒤에서 들려온 신음에 나는 곧바로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비틀거리고 있는 차송진을 재빨리 부축했다. 내게 말했던 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정신을 방어하는 중인지, 차송진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는데 말이다.

레이의 말대로 차송진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나는 차송진에게 물었다.

“서현이를 찾을 수 있겠어?”

차송진을 걱정해 주고 싶지만, 지금 우리에게 시간은 곧 금이다.

“마, 마력 간섭이 심해요. 하, 할 수 있을지…….”

파들파들 떨리는 차송진의 손을 잡아챈 나는 차송진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침착해. 당신은 할 수 있어.”

이렇게 타인의 마력이 가득 찬 공간에서, 공간계 재능의 발현은 어려울 거다. 가뜩이나 정신을 파고들려는 몬스터가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해내야 했다.

“할 수 있어.”

내 말에 차송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제 마력을 움직였다. 천천히 차송진의 마력이 내게로 넘어왔다. 순식간에 이동을 마쳤던 전과 달리 차송진의 마력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차송진의 마력이 내 몸을 감싸는 걸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온몸을 감싸는 고무막을 통과하는 감각이 내 온몸을 죄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우리의 앞에 비친 것은 잿빛의 땅이었다.

그나마 햇빛이 조금이나마 들었던 게이트의 초입과는 달리, 이곳은 어둠이 지배한 듯 온통 어둡고 어두웠다.

옆에서 들려온 신음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커헉.”

쿨 타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능력을 쓴 부작용인지 차송진이 검은 피를 토해 냈다. 나는 허물어지는 차송진의 몸을 받았다.

“기절시킬 필요 없을 것 같……. 기, 기절할 것 같아요…….”

거친 기침과 함께 그렇게 말한 차송진은 자신이 했던 말처럼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마력을 움직여 땅을 판 나는 그곳에 차송진의 몸을 묻어 두었다. 숨구멍을 내서 숨 막혀 죽는 일이 없도록 했다.

━다람쥐는 자기가 파묻은 도토리 대부분을 찾지 못한다고 하지.

“왜 하필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너는 꼭 저 녀석을 찾아가라는 말이다.

“걱정 마시죠. 다람쥐보다 못한 사람이 될 생각은 없으니까.”

레이와의 농담으로도 긴장을 다 털어 낼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강한 마력 때문이다.

스스슥, 내 발밑에서 움직이는 모래를 보며 나는 얼굴을 구겼다. 모래의 양도, 그리고 마력의 양도. 게이트의 초입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짙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중심’이라는 것을.

차송진은 성공적으로 나를 한서현에게 데려다주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차송진에게서 멀어지는 게 먼저다. 여기에서 싸워 댔다간, 차송진이 다칠 테니까.

공중에 안개처럼 퍼져 있는 모래를 뚫고 아주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으로만 파악이 가능한 세상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검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도, 그리고 한때는 숲을 이루고 있었을 나무들도.

이 와중에 검지 않은 것은, 까맣게 변해 버린 나무들 사이로 나타난 붉은 눈동자들뿐이었다.

이곳에 살고 있었을 몬스터들은, 누군가에 의해 모두 언데드가 되어 버렸다. 수는 대충 세어도 스물이 훌쩍 넘었다.

나는 허리춤에 매 두었던 주머니에서 꺼낸 마나석을 손으로 굴렸다.

“예상대로 쪽수로 밀어붙일 생각인가 본데요.”

나는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려 얼음 창을 만들었다. 공중에 얼음 창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숲에서 튀어나온 검은 마수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곧바로 손을 휘저어 개를 닮은 마수에게 얼음 창을 꽂아 넣었다.

푹, 푹.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살을 뚫는 소리뿐.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으레 흘릴 고통 섞인 신음은 없었다.

고요하고, 또 고요한 사이. 나는 내게 달려드는 땅개들을 얼음 창으로 처리했다.

그렇게 내가 처리한 수는 총 여덟. 하지만 아직 개는 많았고, 얼음 창은 모두 소모한 뒤다.

짧게 숨을 몰아쉰 나는 땅을 움직였다. 내게 달려들던 마수 셋이 갑자기 솟아난 흙벽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그때 머릿속에 날카로운 레이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조심해라.

그 경고에 나는 재빨리 몸에 실드를 둘렀다. 실드를 보강하기도 전에, 내 옆구리 쪽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큭!”

겨우 2획짜리의 실드는 엄청난 힘의 폭발에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내 몸은 그대로 몇 미터를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커헉.”

옆구리가 죄다 터져 나간 것은 물론이고, 나무에 받힌 속이 엉망이 되었다.

뼈 폭탄.

한서현이 내게 웃는 얼굴로 보여 주었던 그게 내 옆구리에서 터졌다. 그나마 실드를 둘러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 몸이 산산이 조각날 뻔했다. 아니, 이미 산산이 조각났나.

“웨에엑.”

피를 한 사발 토해 낸 나는 손등으로 피를 문질러 닦았다.

“더러, 더럽게 아프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쉴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내 눈앞에서 뭉쳐지기 시작한 검은 모래를 본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에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만 배운다니까.”

나는 성치 않은 몸을 재빨리 앞으로 굴렸다. 내 얼음 창을 그대로 모방한 모래 창이 내가 서 있던 공간에 내리꽂혔다. 모래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한서현의 마력이 깃든 모래는, 마치 쇠처럼 단단했으니까.

푹, 푹, 땅에 박히는 모래를 피해 나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사용법이 무척이나 간단한 기술만 쓴다는 겁니다. 하긴 가짜 녀석이 서현이의 모래 조종 능력을 따라올 수 있을 리 없죠. 진짜 서현이었더라면 지금쯤 저를 갈아 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 그 녀석을 칭찬할 때냐! 정신 차려라! 이러다가 정말 네, 네놈이 죽는 건 아닌가 싶으니까!

레이의 걱정은 타당하다. 이곳에 온 지 불과 오 분도 되지 않아, 내 몸은 엉망진창이 되었으니까.

아직 한서현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나는 마력으로 부른 바람을 이용해 몸을 움직였다. 마치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내 몸이 공중에서 힘없이 나풀거렸다.

“큭.”

공중에서 몸을 내팽개치듯이 움직인 덕에 몸에 가해지는 반동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공중에서 날아드는 창을 피하려면 이 수밖에는 없었다.

겨우 창을 피해 낸 나는 그대로 숲으로 향했다.

퍽, 퍽.

내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뒤에서 쉴 새 없이 나무들이 터져 나가며 나는 소리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시를 인용할 때는 아니지만, 내 상황이 딱 그랬다. 터진 나무의 파편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걸음을 멈추면 내가 저 꼴이 되겠지.

나는 원을 그리며 돌았다. 애석하게도 너무 멀리 도망갈 수도 없다.

결국 내 이 모든 고생은 이 어딘가에 있을 한서현을 찾아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허억, 허억.”

마력을 사용해서 움직인다지만, 결국 내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체력이 필요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단련시켜 둔 몸이지만, 숨 돌릴 새도 없이 연달아 날아드는 공격에 점점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대로 피하기만 하는 건 하수의 방법이라는 걸.

잠시 숨을 돌린 나는 나를 향해 날아드는 모래 창을 똑같은 얼음 창으로 맞받아쳤다.

공중에서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모래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 팔찌가 달아오를 정도로 나는 마력을 팍팍 뿌려 댔다. 얼음 창은 물론이고, 바람 칼날에, 모래에 물을 퍼붓기도 하고 얼음으로 모래를 전부 얼려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바다에서 물 한 컵을 떠낸 듯, 내가 부숴 버린 모래는 금세 다른 모래로 대체되었으니까.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나석을 채워 넣었다.

내가 마나석을 충전하는 이 잠깐의 틈을 노리고 또 한 번 뼈 폭탄이 날아들었다.

“큿!”

이번에는 흙을 불러와 뼈 폭탄을 파묻어 보았다. 하지만 이것도 좋은 수는 아니었다는 걸 나는 뼈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깨달았다.

퍼어엉, 온 사방으로 흙이 튀어 나갔다.

마치 총알처럼 쏘아지는 흙의 잔해에 나는 황급히 실드를 둘러야만 했다.

━이 방법은 쓰지 않는 게 좋겠군.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의 말에 긍정했다.

“허억, 허억…….”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거리를 좁히자니 뼈 폭탄이 날아들었고, 거리를 벌리자니 모래로 만든 창과 마수들이 달려들었다.

마수의 사체가 쌓여 가고 있었지만, 이 또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왜냐? 내게 쓰러졌던 마수는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일어섰거든.

‘시체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지 않는 한, 이래서야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는 그 모든 걸 상대하며 한서현을 찾았지만, 보이는 건 온통 검게 물든 숲뿐.

근처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마나를 읽는 데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다. 땅 깊숙한 곳에 있는 마나석의 위치를 읽을 정도로 내 기감은 예민했으니까. 거기에 레이까지 얻게 된 뒤, 나는 아티팩트의 기운을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마나에 예민해졌다.

문제는 이 주변의 마력이 너무 짙어, 그 예민한 감각으로도 한서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거다.

카앙!

생각을 이을 시간도 없었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마수의 목덜미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수의 목을 발로 걷어차 끊어 놓으며 나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허억, 허억.”

문제는 내가 점점 지쳐 간다는 거였다. 마력으로 움직임을 보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마수를 대신해 나타난 건 검은색의 스켈레톤이었다.

“하.”

스켈레톤의 움직임은 나와 김재호의 것을 반씩 섞어 놓은 것 같았다. 그동안 김재호와 쉴 새 없이 교전한 나다.

움직임이 모두 예측되는 스켈레톤은 오히려 내게 상대하기 가장 쉬운 적이었다. 내게 검을 쥐고 달려드는 스켈레톤의 품으로 파고들어 갈비뼈를 박살 내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내가 최근에 김재호를 제대로 상대해 봤거든.”

그러니 너 같은 열화판은 우스울 정도다, 이거야. 스켈레톤의 정강이뼈를 손에 쥔 마력으로 부수며 나는 나를 향해 날아드는 모래 창을 얼음 창을 불러내 쳐냈다.

뼈 폭탄도, 마수도. 스켈레톤과 모래 창도.

“하아, 하아…….”

큰 거.

큰 거가 필요하다.

육체 강화계가 아닌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점차 내 몸은 한계에 몰렸고, 과열된 몸에서는 미친 듯이 땀이 흘렀다.

내 몸에 있는 마나 회로를 타고 팔찌에서 흐른 마력이 흘렀다. 마나석에서 뽑혀 나온 마나는 내 마나 회로를 뜨겁게 달궜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사방에서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를 무시한 채로 나는 마나를 모았다.

한서현이 부른 모래는, 예브리카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공략법도 비슷했다.

한 번에 눈에 보이는 모든 모래를 갈아 버리면, 네게도 빈틈이 생기겠지.

마수가 내 목덜미를 뜯어 먹기 직전, 나는 온몸에 모았던 마력을 뿜어냈다. 3획, 출력 70%. 온몸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 같은 고통이 퍼지며 내 손끝에서 뻗어 나간 바람이 이윽고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허리케인은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내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던 마수도, 나를 향해 날아들던 모래 창도, 터지기만을 기다렸던 뼈 폭탄도.

그리고 온 시야를 가리던 검은 모래들까지도.

볼에 닿는 찬란한 햇빛을 느끼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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