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54 기만의 시련 (1)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차송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내리눌렀다.
‘해냈다, 해냈어.’
강이신과 함께 차를 타고 게이트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 남자를 설득하고, 이 남자가 자신을 믿어 주었다는 게.
‘다 너 때문이라고, 나를 원망할 줄 알았는데.’
대신 강이신은 이 모든 게 ‘네 잘못은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차송진은 지난 이틀간 머릿속으로만 세웠던 계획을 입 밖으로 낼 용기를 얻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 모든 얘기를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사실, 차송진이라는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
제 목숨이 위험한 일에 끼어들다니. 그것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그 ‘누군가’는 심지어 차송진의 친구도, 뭣도 아니었다!
하지만 차송진은 이들이 싫지 않았다.
그래, 그게 문제다. 싫지 않은 거. 아니,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무척이나, 무척이나 좋았다.
처음에는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끔찍하게 싫었던 사람들인데, 절대로 이들과 섞이지 않겠다고 매일 밤 스스로에게 속삭였을 정도로 싫었는데.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돼 버렸다.
언제부터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진심으로 한서현이 걱정되었다.
언제부터 그 녀석이 귀찮거나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한서현이라는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따지자면 그때부터가 아닐까.
검은 밤하늘에 총총 반짝이는 별이 떴던 날. 서늘한 밤공기를 맡으며 강이신과 함께 야참을 사러 가던 길.
제게 조심스럽게 배려를 부탁하던 강이신의 얼굴을 보면서 처음으로 차송진은 참으로 부럽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부터 슬슬 차송진의 가슴을 긁어 대던 생각은, 어느새 부정할 길 없이 커져 있었다.
그래, 부럽구나. 참으로 부럽다. 어떻게 서로를 저렇게 아껴 줄 수가 있지. 한서현의 허물을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며 제게 조심스럽게 한서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이신의 얼굴을 보면서 차송진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곧 생각했다.
한서현은 참으로 좋겠다고.
참으로 부러운 사람을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그 녀석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것들이 보였다.
늘 툴툴거리면서도 벨츠머츠를 챙기는 한서현의 세심함이라든가, 피곤한 얼굴로도 강이신과 농담을 주고받는 녀석의 유머러스함이라든가.
그리고…….
‘앉을 데 없으면, 여기에 앉아 있든가요. 여기라면 안전하기도 하고, 뭐, 그늘도 대충 있고.’
전투 때마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자신을 신경 써 주는, 무심한 듯 다정한 면이라든가.
끔찍한 범죄자라는 편견을 한 겹 벗겨 내고 나니, 한서현은 그냥 좋은 녀석이었다.
적어도 이 벨츠머츠 안에서의 한서현은 그런 아이였다.
그런 한서현이 게이트에 혼자 있단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기억만을 긁어다 보여 주는, 그 게이트에.
‘구할 거야. 응, 구하러 가야지.’
차송진의 손은 여전히 벌벌 떨렸다.
여전히 게이트 안의 모든 게 두렵고, 자신이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 걱정은 곧 사라졌다.
입을 꾹 닫은 채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차를 몰고 있는 강이신을 본 차송진은 생각했다.
어느새 자신도 한서현이나 김재호처럼, 저 허술한 보스에게 의지하게 돼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고.
* * *
게이트를 향해 달리는 중, 차송진이 내게 말했다.
“맞다, 그, 미리 알아 둬야 할 게 있는데요.”
“뭔데?”
“우리가 들어갔던 게이트요, 분명 우리가 들어갈 때는 C급이었잖아요.”
침을 꿀꺽 삼킨 차송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S급이래요. 그래서 다들 난리가 났더라고요.”
“뭐?”
분명 우리가 들어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게이트는 멀쩡한 C급이었다. 뭐, 까고 보니 멀쩡한 것과는 영 거리가 멀긴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고.
그런데 갑자기 바깥으로 보이는 등급이 바뀌었다고?
“바깥으로 거대한 에너지 파장이 퍼지고, 완전히 S급 게이트로 변했다고 들었어요.”
“그 말은 어디에서 들은 건데?”
우리가 그 게이트에 들어간 지 겨우 이틀 차, 게다가 대상은 벽 바깥의 게이트다. 이런 고급 정보는 인터넷을 뒤적거려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
“주점에 갔다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좀 주워들었죠. 걱정하지 마요. 다른 얼굴을 썼으니까.”
차송진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왜, 왜요!”
“아니, 제법이다 싶어서. 말은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얼굴을 바꿀 생각은 어떻게 한 거고…….”
“말이야, 대충 번역기로……. 게다가 ‘골든데이’니, ‘아시안’이니. 하도 떠들어 대서 영어를 못해도 알아듣겠던데요. 그리고 나도 그동안 본 게 있는데, 맨얼굴로 돌아다니겠어요?”
대견하다! 대견해! 차송진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늘 무섭고, 두렵다고 뒤로 빠지는 것만 할 줄 알던 차송진이!
━아주 훌륭하게 물들었구먼.
레이의 박한 평가에 나는 곧장 레이에게 말했다.
‘왜 차송진 기를 죽이고 그럽니까?’
━그러는 너는 왜 맨날 내 기를 죽이는데? 애초에 저 녀석은 내 말 듣지도 못하거든?
흠, 레이의 헛소리를 들어 주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실, 내가 목적지로 한 게이트는 보이지 않았다.
왜냐, 그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차송진의 말대로 우리가 들어갔던 게이트는 지금 여기에서 제일 뜨거운 감자가 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릴 줄이야.
나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바로 게이트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밀어냈다.
사람들을 험하게 밀치는 내 행동에 사람 몇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험악한 내 표정에 다들 놀라 물러섰다.
그렇게 닿은 게이트의 앞.
검게 물든 채로 험악한 마력을 줄줄 내뿜고 있는 게이트는 불과 이틀 전 내가 들어갔던 게이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들어갔던 게이트가 소멸하고 같은 자리에 다른 게이트가 생겼다고 믿어도 될 정도, 아니, 그게 더 말이 될 정도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들어갔던 게이트가 바로 눈앞의 게이트가 맞는다고 확신했다.
━저건…….
‘서현이의 마력이네요.’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이 안에 한서현이 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게이트의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마력이 변할 정도로, 마력을 풀어내고 있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서현이가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은 저희 중에 가장 많은 수준이죠.’
본래 몸에 품고 있는 마력도 굉장히 방대했지만, 특히 예브리카의 마정석을 갖게 되며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마력을 그놈이 쓰게 되었다면…….
‘젠장.’
과연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거기!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내 뒤에서 말을 거는 인간을 무시한 채로 나는 빠르게 게이트 앞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한 명을 빼놓고는, 다들 누군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내게는 그 한 명만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잘난 용병대라고 하더라도 겨우 C급…….]
그렇게 떠들어 대고 있는 욕심 많은 에이전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노먼.]
나는 바로 내 에이전시에게로 향했다.
[허어억!]
내 얼굴을 확인한 노먼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반응에 주변에 섰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와 노먼 사이로 향했다.
[왜, 왜 그러는 건가?]
옆에서 노먼을 붙잡고 묻는 그 말에도, 노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에 박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뭡니까?]
내 질문에 노먼은 얼굴을 구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환영이나, 유령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확인하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노먼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예, 진짭니다. 진짜 저예요.]
노먼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대체 저기에서 어떻게 나온 겁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내 게이트에 왜 사람들이 이렇게 몰린 겁니까?]
노먼은 내 말에 얼굴을 굳혔다.
[저 게이트는, 골든데이의 것이잖습니까?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안 그래요?]
내 말대로 저 게이트는 우리 용병대의 차지였다. 우리 용병대가 공략을 실패, 그러니까 죽지 않는 한.
노먼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 맙소사.]
[그러니까 다들 여기서 꺼지라고 말해요.]
[자, 잠시만요. 그쪽 용병대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게이트에서 폭발적인 에너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쪽에 인계한 건 C급 게이트지만, 저건 S급 게이트라고요.]
그렇게 속삭인 노먼이 눈을 굴리며 덧붙였다.
[어떻게 바깥으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란 말입니다.]
[그딴 건 상관없어. 그래서 저 게이트는 내 거잖아, 안 그래?]
나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노먼의 멱살을 잡았다. 나와 이마를 맞대게 된 노먼이 몸을 팔딱거렸다. 노먼의 몸을 집어 던지듯이 놓은 나는 모두에게 소리쳤다.
[이 게이트는 우리 골든데이 용병대의 것이야. 그러니까 꺼지라고.]
[겨우 C급 용병대가 S급 게이트에 들어가겠다고? 그건 만용이야.]
[만용이든, 뭐든. 이 게이트는 우리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다 뒈져 버리기 전까지는 이 게이트에 손댈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내 말에 에이전시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나는 내 말을 비웃는 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그들에게 눈빛으로 경고했다.
확실하게 못을 박아 놔야 한다.
한서현이 안에 있다.
만약, 이들이 끼어들어서 한서현을 구하는 데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죽여 버릴 겁니다, 전부.’
나는 다시 노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책임지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만들어.]
나 때문에 구겨진 노먼의 옷깃을 정리해 주며 나는 노먼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내 에이전시잖아, 안 그래요? 그러니 내가 뒈지기 전까진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그래, 일주일. 일주일 동안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소유권을 넘기지. 하지만 그전까지는 우리 거야.]
노먼의 어깨를 두드린 나는 차송진에게 눈짓했다. 내 눈짓을 따라 구석에 처박혀 있던 차송진이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느리긴.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 차송진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게이트로 향했다.
그리고 숨을 한번 내뱉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첫째를 구하러 갈 때다.
* * *
두 사람은 말릴 새도 없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허어…….”
막 S급 게이트를 공략할 공략 팀을 짜려고 했던 에이전시들은 닭 쫓던 개처럼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먼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조금 전 그 사람들은 대체 누군데?”
“고, 골든데이 용병대요.”
“그 친구들은 이틀 전에 여기에 들어갔다면서? 지금쯤이면 죽었을 줄 알았는데…….”
노먼 또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곧 죽지 않을까? 겨우 둘이서 S급 게이트로 들어갔으니…….”
“그래도 그 성질머리를 봐. 일주일 동안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잖아.”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이 일을 수습해야 할 노먼 또한 넋을 놓은 채로 게이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에디는, 황당함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보기보다 성깔 있네.”
막대사탕을 빨며 에디가 눈을 굴렸다.
‘역시 평범한 놈들은 아니야.’
상식적으로 겨우 C급 용병대인 그들이 S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올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 숫자도 겨우 둘. 사실상 두 사람이 모두 7성급 헌터라고 해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왜일까.
“꼭 나올 것 같단 말이지.”
에디는 눈을 빛냈다.
“그럼 그때까지 여기서 캠핑이나 해 볼까.”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올 그 인간을, 제일 먼저 맞아 주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