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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73화 (173/352)

제173화

#53 도망자 (3)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건, 빌어먹을 정도로 낯익은 천장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자마자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나 하고 옆을 살폈지만,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자는 차송진과 침대에 누워 있는 김재호만 눈에 들어올 뿐 한서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드디어 일어났군.

‘어떻게 된 겁니까?’

━차송진이 능력을 썼다. 그러고는 짜-잔. 여기로 날아왔지.

이제야 기억이 났다. 차송진을 잡은 순간 사방이 일그러지며 거친 마력이 내 몸을 엉망으로 헤집었던 것이. 평상시의 순간 이동과 달리 그때의 순간 이동은 내 몸을 찢어 놓을 것처럼 거칠었다. 마나 회로가 전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나는 기절했었다.

그 때문인가.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죠?”

━글쎄다, 적어도 하루는 지난 것 같은데. 솔직히 나도 정신이 든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지.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는걸.

미친, 최소 하루, 최대는 며칠? 하긴 몸 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가뿐했다. 슬쩍 내려다보니 피에 젖어 엉망이었던 옷도 어느새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김재호의 모습 또한 말끔했다.

━저 녀석이 여러모로 고생했지. 기절한 너를 제법 살뜰하게 살피더구나.

“하아.”

벽에 기대 잠든 차송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나를 여기로 날아오게 한 원흉이었지만, 차마 마음 편하게 원망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벽에 기대앉아서 저러고 자다니.

나는 옷을 갈아입고 필요한 물건을 챙겼다.

━뭘 하려고.

‘게이트로 가 봐야죠.’

한서현이 아직 그곳에 있다. 그곳에 혼자 있다. 그 게이트 안에 있는 몬스터가 어떤 빌어먹을 놈인지는 몰라도, 우리를 건들다니 실수한 거다.

갈가리 찢어서 죽여 버릴 거다. 살점 하나 남지 않게, 갈아 버릴 거라고.

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살기를 애써 억누르며 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차송진이 잠에서 깼다.

“이, 일어났어요?”

차송진의 질문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차송진을 피해 나는 재킷에 손을 뻗었다.

“어딜 가려고요?”

“서현이가 아직 그 게이트에 있어.”

누구 때문에. 애써 그 말을 삼켜 냈지만, 내 말에 차송진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차송진이 물었다.

“그대로 가려고요?”

시선이 내 손끝에 있는 걸로 봐서, 빈손으로 가냐는 질문 같았다. 확실히 게이트로 향하기엔 부실한 꼴이긴 하다.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서현은 게이트에 혼자 있을 테고,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잠깐, 내가 짐을 챙겨 놨어요.”

차송진이 주섬주섬 내게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그 가방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차송진의 가방이었다. 게이트 탐사를 위해 마련한 우리의 배낭과 달리 차송진의 가방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었다. 차송진의 개인적인 물건을 담기 위해 준비해 둔 거니까.

차송진은 거기에 나를 위한 물건을 채워 두었다.

“그쪽 카드를 좀 썼어요. 필요한 것들로만 채웠어요. 자,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최선을 다했다고요.”

차송진의 말에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었다. 도망가지 않은 것까지는 겁이 많으니 이해할 만했지만, 이렇게 나를 위한 배낭을 준비한 건 의외였다.

내 시선에 담긴 의문을 읽은 듯 차송진이 말했다.

“나 때문이잖아요.”

내가 무어라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차송진의 말이 이어졌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능력을 쓰지 않았다면 그쪽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거고, 그럼 서현이 혼자 남는 일도 없었을 거고…….”

차송진의 말에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가 죽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였지만, 지금 당장은 차송진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말 한마디 정도는 해 둬야지.

“당신 잘못 아니야.”

분명 정신을 차린 직후에는 그런 원망이 들기도 했다. 하필 차송진의 능력이 이래서, 손도 못 쓰고 게이트에서 추방당하듯이 나와 버렸으니까. 게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귀중한 시간까지 흘려보냈다고? 그동안 한서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를 생각하면 욕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원망을 받아야 할 대상은 차송진이 아니다.

“어떤 빌어먹을 놈의 몬스터 때문이지. 그러니까 그쪽도 괜한 생각 하지 마.”

내 말에 차송진은 눈을 깜빡였다. 차송진의 눈가가 벌게지는 걸 본 나는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가방은 고마워.”

막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려던 나를, 차송진이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차송진의 부름에 나는 얼굴을 구긴 채 뒤를 돌아보았다.

“왜.”

“나도 같이 가요.”

“설마 게이트에 같이 가자는 거야?”

내 말에 차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애석하게도 차송진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이트에 들어가서 뭘 하게.”

당장 정신 지배를 또 당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솔직히 말해 차송진은 게이트 공략에 도움이 되는 전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짐이 됐으면 됐지.

내 말에 차송진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순간 이동을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기준으로 할 수 있다면요.”

“그게 무슨 소리…….”

내 눈짓에 차송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지난 이틀 동안, 어떻게 하면 내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방식으로 능력을 쓸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니까, 안전지대라는 건 공간에 국한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차송진이 더듬더듬 말을 덧붙였다.

“김재호나, 한서현이나 당신 곁이면 어디든 안전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어, 어쩌면 내 재능도 그런 식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손을 들어 길어지는 차송진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말을 정리하자면 이거 아닌가.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예, 그런 생각을 하니까 시스템 창에 뜬 제 스킬도 바뀌더라고요.”

생각의 확장인가. 가끔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얻은 다음, 재능이 확장되는 경우가 있었다. 재능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재능을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한 각성자의 상상력이니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할 수 있겠어?”

내 질문에 차송진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은 저렇게 재능이 확장된 경우, 몇 번이든 실험을 통해 자신의 재능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체크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특히 차송진의 재능은 무려 사흘이라는 어마어마한 쿨 타임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쿨 타임이 사흘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나긴 했는데, 조금 무리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리하면, 이라. 간단하게 말했지만,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서현이를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거 아니에요. 내가 같이 가면 그 시간을 확 줄여 버릴 수 있을 거라니까요.”

볼까지 붉혀 가며 열정적으로 자신이 도움이 될 거라 말하는 차송진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열의가 보였다. 하지만 이 열의가 고맙다고 바로 고개를 끄덕여 줄 수는 없다.

나는 고민했다. 차송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차송진은 내게 무척이나 도움이 될 거다. 그때, 레이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두고 가라.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적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신 지배를 하는 놈이야. 그것도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재능까지 이용할 수 있는 놈이라고.

확실히 이 점이 걸렸다. 나는 차송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적은 정신 지배를 할 수 있어. 나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그쪽이나 김재호는 멋지게 걸려들었지. 다시 게이트에 들어가서 또 정신 지배에 걸리면 어떡할 건데.”

차송진의 제안은 고마웠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만약 그쪽이 또 정신 지배를 당하게 되면, 아니, 그렇게 되겠지. 거기에 대한 대비도 없잖아.”

“안 그래도 관련 정보를 알아봤어요. 마, 마력으로 정신을 보호할 수 있다던데요.”

“관련 정보를 알아봤다고?”

“나도 이틀 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고요.”

차송진은 더듬더듬 내게 알아낸 내용을 말했다. 자신의 몸 주변으로 마력을 뿜어내면, 자신의 몸으로 침투하는 상대방의 정신 공격을 일부나마 흘릴 수 있다던가.

“잠시라면 마력으로 정신 지배를 막을 수 있다고?”

“예, 능력을 쓸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그 애를 찾으면 나를 기절시키면 되죠.”

만약 정신 지배를 버티지 못하더라도, 차송진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기절한 차송진을 보호해 줄 자신은 없지만…….

━흐음, 이 녀석을 정말 데리고 갈 생각이냐?

‘한서현은 네크로맨서잖습니까. 그 녀석이 마음먹고 소환물만으로만 저를 상대한다면,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서현이 못 찾아요.’

한서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나를 상대해 준다는 건, 너무나도 낙관적인 상상이다. 나라면, 그러니까 내가 만약 한서현이라는 패를 쥐었다면…… 나는 절대로 한서현을 내 앞에 던져 놓지 않을 거다.

모래든, 소환수로든, 다른 방식으로 체력을 깎고 또 깎아 더는 쥐어짤 체력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나타나 막타만 칠 거다.

‘그러니까 한서현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제겐 엄청나게 유리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확실히 네 말대로라면 저 녀석이 엄청 큰 도움이 되겠지만…….

‘한번 모험해 볼 만하죠.’

게이트에서 한서현을 바로 찾을 수만 있다면, 차송진을 데리고 갈 리스크는 질 만하다.

“문제는, 그쪽을 지킬 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거야.”

최대한 안전을 보장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한서현이다. 솔직히 나로서도 그 녀석을 제대로 상대할 자신이 없다.

내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단 뜻이다. 기절한 차송진을 챙기면서 싸우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상관없어요.”

차송진이 말했다.

“일단 중요한 건 그 애를 구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내 생각은 말고, 한 가지만 생각하죠.”

도대체 지난 이틀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마웠다. 내 끄덕임에 차송진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도 조금은 신경을 써 줬으면 하긴 하는데…….”

뒤에서 들린 중얼거림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차송진 덕분에 긴장이 한풀 풀렸다.

당장 한서현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상황을 살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달까.

그래, 마음을 조급하게 먹어서는 될 일도 안 된다.

후우, 속으로 숨을 내뱉은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컨테이너에 혼자 남을 김재호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런, 재호를 까먹을 뻔했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짧게 메모라도 남겨야 하나. 나는 컨테이너로 돌아가 김재호를 살폈다.

김재호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깨울 수도 있겠지만, 비상시에 간단하게(?) 제압이 가능한 차송진과는 달리 내게 엄청난 위협이 될 김재호를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김재호가 깨면 볼 수 있도록 메모지를 붙여 두었다.

한시라도 바쁜 때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지만, 김재호가 잠에서 깼을 때 우리를 찾겠다고 날뛰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였으니까.

김재호를 위한 편지까지 야무지게 남긴 나는 차송진과 함께 벽으로 향했다.

노먼을 불러 게이트로 가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게이트에 들어갔던 우리가 게이트를 클리어하지도 않고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당장은 그런 데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차를 구할 거냐.

답은 간단하지.

훔치는 거다. 나는 바깥에 세워진 자동차의 창문을 깼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깨진 창문 틈으로 손을 넣어 운전석의 잠금장치를 푼 나는 차송진을 향해 말했다.

“타.”

“열쇠도 없는데…….”

“마력으로 구동되는 물건은 대충 다룰 수 있거든.”

나는 마력을 움직여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 먹혀들었다.

부아앙, 자동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움직였다.

뒤늦게 자동차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욕설을 내뱉으며 벽에서 뛰쳐나오는 게 보였지만, 나는 무시했다.

“이거 완전 범죄…….”

차송진의 말에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어쩌라고. 난 빌런 맞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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