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72화 (172/352)

제172화

#53 도망자 (2)

“매일 우리 말을 훔쳐 들었지? 그리고 그 인간한테 고자질했잖아!”

“왜? 왜 그랬어? 어차피 너는 우리가 도망가든 말든 상관없었잖아! 넌, 넌 여기서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우린 아니라고! 우린 목숨을 걸었다고, 이 일에!”

“너 때문에 다 망했어.”

그들의 원망이 차송진을 쉴 새 없이 찔렀다.

그전에도 친구가 없던 차송진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차송진은 모두의 적이 되었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에 차송진의 어깨는 점점 축 처졌다.

원래도 차송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렇게 미움을 받지는 않았다.

공장장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더는 전처럼 그를 볼 때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웃을 수 없게 됐으니까. 차송진의 태도가 변하자, 공장장의 태도 또한 변했다.

차송진은 다른 공장으로 보내졌지만, 그곳으로 같이 간 녀석들이 차송진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는 바람에 그곳에서도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차송진은 그곳에서도 전과 똑같이 혼자였다. 사실, 혼자인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괴롭힘이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들리는 뒷담화는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밤에 잠을 잘 때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물세례는 견디기 힘들었다.

차송진은 공장에서 자는 것을 택했다.

자진해서 야근하고, 공장의 구석에서 잠을 청하는 이를 공장의 관계자는 퍽 마음에 들어 했다.

그다음부터는 똑같았다.

아이들은 차송진을 만인의 적으로 생각했고, 차송진은 철저히 혼자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니, 숨이 막힐 것처럼 괴로워졌다.

실제로 누군가 목을 죄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차송진을 노려보던 수많은 눈동자가 차송진의 숨통을 막았다.

네 잘못이야.

전부 다 너 때문이야.

차송진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건 몇 년 전부터 그를 괴롭혔던 악몽이었다.

늘 매일, 눈을 감을 때마다 차송진은 같은 악몽을 꾸었고 일어나면 늘 같은 소망을 되뇌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하게 일을 계속했지만, 사실 차송진은 누구보다 이 지옥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지옥에서 도망칠 자격 같은 게 감히 차송진에게 존재하는 걸까.

「무슨 상관이야, 도망치고 싶잖아?」

누군가 차송진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중요한 건 네가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거지, 안 그래?」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읽은 것처럼, 그 속삭임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 목소리에 차송진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도망치고 싶어.

숨 막힐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피해서.

언제 죽어 나자빠질지 모르는 이 위험한 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어디로?

그 어느 곳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차송진이 알고 있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는 보육원과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공장밖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걸.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차송진의 속삭임을 들은 듯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 넌 도망치는 방법을 알아.」

그 불가능해 보였던 소망은, 생각보다 일찍 이뤄졌다.

늦된 아이였던 차송진은, 누구보다 늦은 나이에 재능을 각성했다.

늘 도망치고 싶다고 속으로 되뇌었기 때문일까.

차송진은 상태 창에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안전지대로의 귀환이라니. 그에게는 안전지대도, 귀환할 곳도 없는데.

하지만 다행히 차송진의 능력을 알아본 곳이 있었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길드인 시리우스의 부길드장이 직접 차송진을 데리러 왔다.

그녀는 차송진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차송진은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원하는 게 있어요? 전부는 어렵지만, 몇 명쯤이라면 거기에서 같이 빼내 줄 수 있는데.”

진연화의 말에 차송진은 고개만 저었다.

“그냥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어요.”

“간단하고 좋네요.”

진연화의 대답에 차송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몇 명이라도 이곳에서 빼낼 수 있다, 그 말은 곧 차송진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누굴? 누굴 골라? 차송진에게는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전부가 다 차송진을 미워했을 뿐이다.

차송진은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차송진이 바라는 건 오로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그의 부탁에 진연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진연화에게 차송진은 자신이 있었던 공장이 어떻게 됐는지 묻지 않았다.

자신을 짓누르던 과거는 싹 지워 내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이제 빛나는 삶이 약속되어 있으니까.

‘거기에 있었던 놈들은, 알 바 아니야. 나도 나만, 내 인생만 생각할 거라고.’

어차피 여기에 있는 애들은 전부 나를 괴롭혔다고. 그런데 내가 왜 구해 줘야 해?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면서.

「맞아.」

가슴속 목소리가 속삭였다.

「괴롭고 아픈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 도망치면 그만이야. 맞서 싸울 필요 없다고.」

싫은 걸 마주할 필요는 없어.

그냥.

도망가.

도망가 버려.

* * *

차송진의 주변으로 마나가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이게 다 뭐냐.

전투 능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차송진 또한 각성자다.

몸속에 흐르는 마력이 있는 한, 위험하지 않다고 백 퍼센트 확신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저 녀석을 붙잡은 놈이 뭘 하는가 본데요.”

차송진의 재능 자체로는 아무런 전투력도 없다. 하지만 저 몸에 흐르는 마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글쎄, 상당히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차송진의 몸에 흐르는 마력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으니까.

그래도 뭐, 김재호만큼 위험하진 않겠지.

“가까이 가서 기절시켜야겠어요.”

나는 천천히 차송진의 근처로 다가갔다.

슬쩍 바라본 차송진의 눈동자는 흐릿하게 물들어 있었다. 동공에서 붉은빛이 깜빡거리다가 사라졌다.

“도마, 도망쳐…….”

“뭐?”

차송진은 작게 무슨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차송진의 몸에 손을 얹는 순간 차송진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젠장.

나는 차송진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재빨리 김재호를 끌어당겼다. 가까스로 김재호의 손목을 잡아챈 순간 시야가 어그러졌다.

* * *

눈을 뜬 순간 차송진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며칠째 차송진이 묵고 있었던 컨테이너였으니까. 하지만 이 컨테이너가 보이면 안 되는 거였다.

차송진의 마지막 기억은 게이트 안에서 강이신의 등을 바라보는 거였다. 그 뒤로 쏟아진 과거의 기억들은 차송진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했다.

도망치라고, 도망치면 된다고.

오로지 머릿속에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 차송진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차송진의 옆에는 흙과 피범벅인 강이신과 김재호가 기절한 채로 누워 있었고 한서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송진은 조심스럽게 옆에 누운 강이신에게로 손을 뻗었다. 강이신의 옷은 피범벅이었다. 차송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뗐다. 차송진의 손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옷을 적신 피는, 모두 강이신이 흘린 걸까.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리면 보통은, 보통은 죽지 않나?

“주, 죽…….”

설마 죽었나? 핏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강이신의 얼굴에 차송진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여태까지 차송진이 봤던 강이신은 언제나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언제나 처리할 수 있단 얼굴로. 물론 그 해결법이라는 게 대부분 허술하고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상한 방식으로 믿음이 가는 남자였다.

강이신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일을 해결할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나보다 어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기절해 누워 있는 강이신은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그 대단한 벨츠머츠의 리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송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강이신을 흔들었다.

“일어나.”

알 수 없는 불안함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봐, 일어나라고.”

강이신의 몸은 차가웠다. 마치 시체처럼.

차송진은 놀란 얼굴로 강이신의 몸을 살폈다. 그제야 강이신의 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특히, 오른팔에 난 상처가 심각했다.

“이게 무슨…….”

오른쪽 팔은 마치 누군가에게 난자당한 것처럼 엉망이었다. 피가 흐르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아물긴 했지만, 여전히 근육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그 끔찍한 모습에 차송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 출혈은 없었지만, 그건 이미 몸속에 있는 피를 다 흘려 내서일지도 모른다.

“죽으면 안 돼, 정신 차리라고.”

차송진은 그렇게 외치며 담요를 끌어왔다. 어떻게든 체온을 올려야 했다. 피, 피를 수혈해야 하나? 어디에서? 바깥에 나가 누군가를 불러와야 하나? 하지만 강이신과 김재호는 벨츠머츠, 그러니까 빌런이다.

만약 정체가 들키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거다. 가면을 써서 쉽게 들키진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 들키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을 부르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도대체 뭐, 뭘 해야 하는데. 뭘…….”

피범벅인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홀로 깨어 있으니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대체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두 사람 모두 이런 꼴로 온 걸까.

아주 끔찍한 꿈을 꾼 것 같다는 느낌뿐,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자신이 ‘능력’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확신할 수는……. 아니, 능력을 썼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강이신과 김재호, 그리고 차송진은 여전히 게이트 안에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한서현은…….

“설마 게이트에 혼자 남은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차송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일단은 강이신을 깨워야 한다. 차송진은 다시 한번 강이신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제발. 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응? 난, 난 몰라. 아무것도!”

하지만 간절한 차송진의 부름에도 강이신은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송진은 고개를 돌려 김재호를 바라보았다. 밧줄로 꽁꽁 묶인 손과 발을 본 차송진은 황급히 배낭에서 단검을 꺼냈다.

일단은 김재호부터 풀어 줄 생각이었다.

차송진은 밧줄을 끊고 김재호를 살폈다. 너덜너덜해졌다는 표현이 딱 맞는 강이신의 몸과는 달리 김재호의 몸에는 커다란 상처가 없었다. 체온 또한 따뜻했다.

차송진은 컨테이너에서 두 사람을 살폈다.

차갑게 식어 있던 강이신의 몸은 다행히 점차 따뜻해졌지만, 강이신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도망쳐…….’

차송진은 알고 있었다.

지금만큼 그가 도망치기에 적절한 때가 없다는 걸.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 사정을 설명하고 보호를 요청하면, 벨츠머츠가 따라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굳이 보호를 요청할 필요도 없다.

강이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강이신의 지갑을 훔쳐서 어디로든 훌쩍 떠나면 그만이니까.

강이신은 차송진이 떠난 것도 모를 거다.

차송진이 벨츠머츠에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길을 택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하아.”

차송진은 그 자리에 몇 시간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로 가다듬으면서.

그리고 마침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전부 정리한 차송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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