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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70화 (170/352)

제170화

#52 잘못된 정류장 (4)

━무슨 방법이든 빨리 찾아야 할 것 같다.

김재호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손끝만 검게 물들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젠 몸 전체가 흐릿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김재호의 동공 또한 점차 뚜렷한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건 좋은 징조가 절대 아닌데요.’

━그래!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저놈은 재능까지 자유자재로 써먹을 거다!

지금도 이렇게 상대하기 힘든데 그림자에 숨어드는 김재호를 상대하라고? 그나마 단검의 궤적이 예상 가능한 지금과는 달리, 그림자 속을 뛰어다니는 김재호를 상대로 단검 피하기 게임을 했다간 난 3분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될 거다.

‘오, 그래선 안 되지.’

━그냥 큰 거 한 방을 쏘라니까.

레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지만, 김재호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얼음 창은…….

‘우리 애를 꼬치로 만들 일 있어요?’

━역시 아무래도 번개가 나은 것 같…….

‘속까지 아주 잘 익은 웰던이 되겠죠.’

젠장, 뭘 생각해도 턱턱 막힌다. 김재호를 죽이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저렇게 날뛰는 애를 기절시키는 건? 쉽지 않다.

내 손이 덜덜 떨리는 건, 단순히 출혈이 많기 때문이 아닐 거다.

주변 공기를 진공으로 만든다거나, 물로 된 헬멧을 씌워서 질식시키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으나 김재호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1분은 묶어 둬야 했는데 얼음 창으로 만든 감옥도, 흙으로 만든 장애물도 순식간에 부숴 버리니 답이 없었다.

이럴 때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 될 때도 있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무식한 짓이요.’

나는 얼음 창을 불러냈다. 직접적으로 김재호를 공격하진 못해도 김재호의 동선을 제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으므로.

얼음 창에 가로막히자 김재호는 장검을 꺼내려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가 내가 노린 타이밍이었다. 김재호의 다리를 흙이 잡아챘다.

장검을 잡은 김재호가 흙을 갈랐지만, 다시 한번 나타난 흙으로 된 장애물이 앞을 가렸다.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흙의 벽을 본 김재호가 화를 내며 장검으로 장애물을 갈랐다.

그러나 흙이 나타나는 게 빨랐다.

마나 팔찌가 달아오르고, 나는 팔찌의 마력을 모두 끄집어내 흙으로 김재호를 파묻었다.

내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든 단검은, 내가 만들어 낸 흙벽에 그대로 박혔다.

김재호가 흙더미를 뚫고 나온 순간 나는 다리를 뻗어 김재호를 넘어트렸다. 김재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나는 발을 뻗어 김재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게 네가 찾은 답이냐? 근접 육탄전?

레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 방법보다 안전한 방법이 없더라고요, 크읏!’

초보자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뭐, 적어도 사람을 바짝 튀겨 버리거나 구워 버리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 아닌가.

팔꿈치를 들어 올린 나는 그대로 김재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큿!”

강하게 얼굴을 가격당하면, 순간적으로 뇌가 흔들린다. 제아무리 개조 인간이더라도 두개골 속에 있는 뇌까지 강화할 수는 없는 법이지. 제아무리 튼튼한 김재호라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다.

과연 내 예상대로 김재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틈을 노려 김재호의 뒤로 돌아간 나는 그대로 오른팔을 김재호의 목에 둘렀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지지대 삼아 김재호의 목을 강하게 조르기 시작했다.

“큭, 크억!”

무식한 방법이지만, 이 수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는걸.

“제발, 제발…….”

김재호의 손짓을 따라 단검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내가 흙으로 벽을 쌓는 게 더 빨랐다.

퍽, 퍼억. 퍽!

내가 쌓아 둔 흙벽의 바깥쪽에 단검이 박혔다. 김재호의 마력을 따라 단검이 덜덜 떨리며 흙 속을 파고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어느새 흙벽의 반대편으로 삐죽 단검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다시 흙벽을 세우든가 해야지. 그때, 김재호의 손톱이 오른팔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으윽.”

고통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정신이 흐트러지며 내가 세우던 흙벽이 허물어졌다.

나는 더욱 강하게 김재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오른팔에서 떨어진 피에 김재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고통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나는 참고 또 참았다.

제발, 제발 기절해라.

흙벽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번쩍이는 걸 느낀 순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내 얼굴이 뚫리는 일은 없었다. 김재호의 몸이 축 하고 늘어짐과 동시에 내게 날아들던 단검은 힘을 잃고 내 옆으로 떨어졌다.

몸에 긴장이 훅 풀렸다.

드디어 김재호를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허억, 허어.”

김재호를 끌어안은 채로 나는 흙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제야 레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네놈은 정말 미친 게 분명해. 그래! 미친 거다, 미친 거야!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놓은 거지.

“하아…….”

━저 녀석이 기절하는 게 조금만 더 늦었다면 죽는 건 네가 됐을 거야.

“안 죽었잖습니까.”

━진짜 네놈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내가 몸이 없다는 게 얼마나 한탄스러운지 모르겠다.

레이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나는 김재호의 몸을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뭘 하는 거야? 조금 더 쉬어라. 네 몸 상태는 지금 정상이 아니야.

“이러다가 재호가 정신을 차리기라도 하면 제가 했던 일이 다 헛수고가 되는걸요.”

나는 김재호를 묶기 위해 배낭에서 밧줄을 꺼냈다. 오른팔이 거의 움직이지 않으니,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큭.”

단검으로 쑤셔진 데다가, 김재호의 손가락이 상처를 헤집어 놔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팔뚝이 너덜너덜했다. 이렇게까지 상태가 심각했던 적은 처음이다.

━지금 네 얼굴이 어떤 줄 아냐? 납 칠한 인형처럼 새하얗기만 하다고!

레이의 말을 무시한 채로, 나는 배낭에서 포션을 꺼내 팔뚝에 뿌렸다. 웬만해서는 포션을 아끼고 싶지만, 상처가 너무 컸다.

“큭.”

꼭 끓는 기름을 팔에 뿌린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로 호흡을 내뱉었다. 더럽게, 더럽게 아팠다.

━일단 몸부터 추슬러라.

레이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오른손을 움직여 보았다. 아직도 움직일 때마다 더럽게 아프긴 했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재호의 몸을 단단히 밧줄로 묶은 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서현이와 차송진을 찾으러 가야죠.”

김재호가 나에게 달려드는 사이, 차송진과 한서현은 사라졌다. 김재호처럼 그 두 사람도 정신 지배를 받은 게 분명하다.

이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여긴 절대 C급 게이트가 아니에요.”

C급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로 김재호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순 없다. 그것도 내가 알아차릴 수도 없는 사이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게이트의 등급을 추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측정하는 것. 강한 몬스터가 있을수록 게이트 안의 마력 농도가 짙으니,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마력도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게 보통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아주 간혹, 이렇게 상식을 무너트리는 존재가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예외를 대비하기 위해 차송진을 데리고 다녔지만, 애석하게도 상대가 너무나도 나빴다.

제대로 그 몬스터와 대면하기도 전에 나는 너덜너덜해졌고, 소중한 동료를 모두 잃었으니.

도대체 나를 엿 먹인 이 게이트의 주인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고위급 게이트는 침입자가 ‘어느 세상’에 끼어들었는지, 친절하게 알려 주는 편이었다. 게이트를 넘자마자 친절하게 시스템 창을 띄워 주었던 세레나의 빙궁 때처럼.

하지만 이곳의 게이트는 달랐다.

아무런 경고도 알림 창도 없이 놈은 우리를 기습했다.

이건 규칙을 어긴 거다.

“이 주변에 일어났던 이변들, 모두 이 게이트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게이트가 등장하기도 전에 그 주변에 영향을 주었다고?

“이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그다음에는 이 이상한 게이트가 나타났죠. 이 모든 게 우연일까요?”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만…….

“어쨌거나 빨리 애들을 찾아야 합니다.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벌떡 몸을 일으켰던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다시 넘어졌다.

“허윽, 허어…….”

━조금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확실히 몸을 일으키자마자 현기증이 돌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피가 돌지 않은 사지 말단이 차갑게 식기도 했고.

“피가 재생되는 건 왜 이렇게 느린 겁니까?”

━네 비축된 체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그렇지. 가장 심각한 상처를 재생하고 그다음에 경미한 상처를 치료하고……. 재생 속도를 빠르게 하려면 뭐라도 먹어라.

레이의 충고에 나는 배낭에서 꺼낸 에너지바를 씹었다.

진수성찬을 차려 먹을 상황은 안 되더라도,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칼로리가 필요했다. 에너지바를 씹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왜 김재호를 남긴 걸까요.”

━네놈을 상대하기 위해서 아니겠냐?

“절 죽이는 게 목표였다면, 한서현도 이곳에 남겨 협공하게 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재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김재호만 보더라도 재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잖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침입자들을 없애려는 목적이었다면 여기에 두는 게 나았겠죠. 나를 죽이기 위해서든, 아니면 그 애들을 죽이기 위해서든.”

우리를 죽이려는 목적이라면, 우리끼리 치고받고 하다 죽는 꼴을 봤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놈은 굳이 한서현과 차송진을 빼냈다.

무슨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빨리 애들을 찾아야겠습니다.”

그 목적이 뭔지 아직은 감이 오지 않지만, 시간을 보낼수록 안 좋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어지러움이 가시자마자 나는 김재호를 어깨에 들쳐 업었다. 축 늘어진 김재호의 몸은 억 소리가 날 만큼 무거웠다. 그렇게 겨우 한 걸음을 내디디나 했으나, 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 방법은 안 되겠는걸.

확실히 레이의 말대로 내 몸보다 커다란 덩치를 업고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결국 나는 마력으로 김재호의 몸을 띄우는 방법을 택했다.

팔찌에 새로운 마나석을 채워 넣은 나는 한서현과 차송진이 있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급하게 몸을 움직였던 흔적이 그대로 땅바닥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젠장.”

━뭘 본 거냐?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발자국이 두 사람분이었는데, 여기서부터 한 사람 것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러네.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서현이가 재능을 쓴 것 같아요.”

모래를 이용하면, 한서현은 공중을 떠서 이동할 수 있다. 굳이 제 발로 걷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다행히 차송진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여기서 갈라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죠.”

만약 차송진의 발자국을 따라갔는데, 한서현이 없다면?

━지금으로서는 네게 선택지도 없지 않냐. 일단은 눈에 보이는 흔적을 따라갈 수밖에.

“……네.”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다행이라면 차송진을 제압하는 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다는 거죠.”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

“이 상황이니까 농담을 하는 거죠.”

아니면 정말 미칠 것 같으니까.

나는 잘게 떨리는 손끝을 무시하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한서현은 괜찮을 거다. 괜찮고말고.

“서현이랑은 정말로 싸우고 싶지 않지만요.”

━하긴, 나도 그 녀석이랑은 싸우고 싶지 않다.

“예. 진짜 벌써부터 빌고 싶다고요. 농담이 아니라 저보다 몇 배는 강할 거 같지 않습니까?”

━그동안 쌓았던 업보를 청산할 시간이지.

“업보라뇨.”

━네가 그동안 그 녀석을 빡치게 만들었던 게 한두 번이냐? 이번에 아주 호되게 맞아 줘라. 너는 그래야 해.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 싶다는 내 간절한 마음을 읽었는지, 레이도 내 말에 어울려 주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어느새 발자국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 발자국의 끝에서 발견한 건 차송진이었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를 본 순간,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옆 어디에도 한서현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실망도 잠시, 나는 조심스럽게 차송진에게 다가갔다.

“차송진?”

내 부름에 차송진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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