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67화 (167/352)

제167화

#52 잘못된 정류장 (1)

‘벽’ 근처에 있는 주점, 그곳은 피곤한 얼굴을 한 에이전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먼은 습관처럼 주점에 들렀다.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노먼!”

하지만 이 주점에는 모기떼처럼 그를 노리는 이들이 잔뜩이었다.

‘평상시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더니…….’

자신을 부르는 손짓에 노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써 웃는 표정을 지은 노먼이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걸어왔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오간 몇 마디 안부 인사 뒤에는 곧바로 그들이 노먼을 부른 본론이 따라붙었다.

“요즘 그쪽이 맡은 용병대 실적이 대단하다며? 이번 일주일 동안 게이트를 네 개나 해치웠다고?”

“그게 사실이야?”

역시, 평소에는 그를 알은체도 하지 않았던 이 속물들이 그를 부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내 용병대가 궁금한 거로군.’

노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그가 맡았던 용병대는 죄다 C급 중에서도 가장 C급이라고 볼 수 있는 형편없는 놈들뿐이었다. 그런 용병대를 전담하는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골든데이라는 용병대를 맡기 전까지는.

“그래도 다 C급 게이트뿐인걸요.”

노먼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발, 이 속물들이 자신의 용병대에게 관심을 꺼 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 희망은 바로 부서졌다.

“C급뿐이라도 열흘 만에 일곱 개가 말이 되나! 듣기로는 동양인이라던데, 어디서 왔대? 중국? 중국 사람이라면 내가 몇 번 만나 봤지. 그거 알아? 중국에는 에이전시가 없대. 대신 국가가 모든 계약을 주도한다는 거야. 90%의 수수료를 떼면서! 그러니 우리가 무슨 조건을 달아도 죄다 ‘하오!’, ‘하오!’ 하면서 받아들인다니까.”

“어, 음…… 그 사람들은 한국에서 왔어요.”

“어, 오. 뭐, 그래. 국적이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거나 거기도 공산국가가 아닌가?”

그 말에 노먼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노먼의 왼쪽에 앉은 남자가 바텐더에게 주문을 하나 추가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연달아 게이트를 처리했다면, 어쩌면 그 용병대 C급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게이트 안에 남은 흔적은 어떻대?”

“글쎄요, 저도 업체에 넘기고 자세한 건 묻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안 돼, 노먼. 제대로 된 에이전시가 되고 싶다면, 용병대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제 어깨에 손을 얹은 남자의 얼굴에는 추한 감정이 가득했다.

‘예, 예. 제가 운이 좋아서 제 주제에도 맞지 않는 용병대와 운 좋게 계약했습죠.’

노먼은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더 높은 등급에는 관심이 없대?”

“그러게! C급 게이트를 그렇게 해치울 정도면 얼마든지 B급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근래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게이트 발생에 일거리는 많았다. 아직 S등급 이상의 고위급 게이트는 없었지만, 이제는 심심치 않게 A등급 게이트까지 등장하고 있었다.

더 높은 등급의 게이트를 처리할 수 있는 헌터를 확보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노먼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쪽에서 이 제의를 거절했다는 거지.

“안 그래도 제의해 봤는데, 그쪽에서 거절했어요. 다른 용병대와 협업할 생각은 없다고.”

“그래? 그거 아쉽네.”

“왜 거절하는지 이유는 들어 봤어?”

“예, 듣긴 들었는데…….”

노먼이 생각하기에는 영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이긴 했다.

“일단은 C급 게이트에만 집중하고 싶다던걸요.”

“그래? 이상하군. 여기까지 와서 게이트 공략을 하는 헌터라면 죄다 돈에 미쳐 있기 마련인데, 게이트 등급을 올려 준대도 싫어? 이거 뒤가 구릴 수도 있겠는걸.”

“뭐라더라, 동남아 쪽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쪽 범죄자가 적당히 신분을 바꿔서 우리 쪽 헌터로 활동하는 건 흔한 일이잖아.”

“하지만 그 경우에는 이렇게 게이트 공략을 열심히 하진 않잖아. 어디까지나 신분 세탁이 목적이니까.”

“뭐, 그야 그런데.”

노먼이 끼어들 새도 없이 노먼과 노먼의 용병대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결론은 하나다.

“어쨌거나 노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물 아닐까 싶네. 아, 오해는 마. 그냥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니까.”

“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내가 노먼이었다면 꽤 마음이 상했을 거야.”

이 개소리를 언제까지 들어 줘야 하지. 노먼은 멍한 얼굴로 맥주만 홀짝였다.

‘그냥 다 뒤엎어 버릴까.’

그때 누군가 주점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 망할 놈들의 모든 관심을 쓸어 가지 않았다면, 노먼은 정말로 머릿속에 차오른 생각을 현실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주점의 문이 열리고,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살핀 에이전시들은 그 즉시 하던 말을 멈추고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 벌에 몇천 달러나 하는 고급 정장에, 깔끔하게 올린 머리 스타일까지. 누군가는 허여멀겋다고 폄하하지만, 누군가는 맑다고 말하는 이목구비의 동양인.

“세상에.”

“오, 이게 누구야.”

짧은 감탄과 짧은 침묵. 그리고 곧이어 쏟아지는 그를 향한 관심들. 오승우는 그 모든 반응에도 한 치의 변함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주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미스터 오!”

“이런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입니까?”

“테이카 쿠퍼도 여기에 온 겁니까?”

벌 떼처럼 자신에게 달려드는 에이전시 틈에서 오승우, 테이카 쿠퍼의 에이전시는 두 눈을 접어 웃었다.

“일단 밀린 인사부터 하죠. 오랜만입니다, 베이커 씨. 글렌 씨도요.”

수십 명의 시선이 본인에게 쏠렸음에도 오승우는 순식간에 이곳에서 제일 잘나가는 에이전시 두 명의 이름을 골라냈다. 그의 입에서 이름이 불린 베이커와 글렌의 볼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리는 걸 보며 노먼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 제일 잘나가는 고객님께서는 현재 S급 게이트를 공략 중이셔서 말이죠. 할 일이 없어진 에이전시는 다른 일을 처리하러 여기까지 왔죠.”

“그래, 그 다른 일이라는 게 무척이나 궁금한데 말이야. 도대체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주로 용병대와 미국 국가의 계약에 관여하는 이곳의 에이전시와 달리, 오승우는 길드와 헌터 사이의 계약을 중재했다.

고로, 용병대가 바글거리는 이곳에는 본래 올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용병대에 있는 헌터를 길드로 빼내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반가움도 잠시, 곧바로 주점 안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계약 때문에 온 건 맞지만, 그 친구는 현재 그 어떤 용병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니까.”

그 말에 에이전시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적어도 오승우에게 용병대 에이스를 빼앗길 걱정은 덜어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오승우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유망주가 소속도 없이 떠도는 중이라?

“그래서 미스터 오가 관심 있는 게 누굽니까?”

그 질문에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켰다. 사람들의 눈이 쏠리자 그 질문을 꺼낸 남자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오해는 마세요. 미리 빼내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니까. 절대 손을 대지 않으려고요.”

“하긴 미스터 오를 상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긴 하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에이전시라면 이런 곳에서 자신이 노리고 있는 이의 정보를 흘리지 않겠지만, 그는 오승우였다.

자신이 점찍은 사람을 단 한 번도 빼앗겨 보지 않은 에이전시계의 전설.

“알바트로스.”

오승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에이전시들이 모두 놀라 입을 벌렸다. 노먼 또한 놀랐다.

“오우, 그 철새를요?”

“예, 그 철새를요.”

오승우의 말에 누군가가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그 친구는 정말로 골칫덩어리예요. 이 주변에서는, 끄응, 글쎄요. 재능이야 있지만 워낙 다루기가 힘들어서.”

“용병대를 갈아 치우는 재미로 사는 그놈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긴 했는데.”

“그 녀석을 노리고 오셨다니, 물론 미스터 오라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이곳에 있는 에이전시라면 모두 철새를 한 번쯤은 맡아 본 경험이 있었다. 워낙 용병대를 자주 바꿔 댔으니까. 노먼 또한 그 남자와 함께했던 적이 있다. 음, 그리고 그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주변의 반응에도 오승우의 얼굴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아무래도 이젠 쉬운 타깃은 영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런 의미라면 이해가 되네요. 나도 그 녀석이 어딘가에 정착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으니까.”

“버디, 네가? 저번에는 죽어 버리라고 저주하지 않았어?”

“그야, 그 자식이 내가 애지중지하던 용병대 하나를 공중분해시켰으니까 말이지.”

“나도 당했어, 그거.”

점차 말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오승우는 그들의 말을 모두 웃는 얼굴로 듣고 있었다. 결국 눈치를 보며 이 상황에 끼어든 건, 베이커였다.

“다들 그만하라고. 그게 뭐 좋은 소리라고 떠들고 있는 겐가? 게다가 그건 다 예전 일이라고, 안 그래?”

오승우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구렁이 같은 노인네. 노먼은 가만히 오승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또한 궁금해졌다.

제아무리 대단한 오승우라지만, 그 ‘철새’를 과연 횃대에 앉힐 수 있을까?

* * *

일곱 개째의 게이트를 처리하고 우리는 짧은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사실 우리의 체력이야 연속으로 몇 개의 게이트를 더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빵빵했지만, 문제는 저쪽이다.

바닥에 엎드린 차송진은 우리에게 외쳤다.

“때려죽여도 오늘은 못 나가요.”

확실히 그래 보였다.

“그냥 내가 들고 다녀도 되는데.”

“싫어!”

김재호의 제안은 바로 거절당했다. 그야, 저번에 김재호가 느려 터진 차송진을 ‘대신 들어서’ 이동한 적이 있었는데……. 차송진은 그날 우리에게 당일 먹은 것을 모두 보여 주는 마법 쇼를 펼쳐 보인 바 있었다.

━아주 더러웠지, 그거.

‘예에.’

그 마법 쇼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김재호에게 차송진을 들고 뛰는 건 자제하라고 말해 두었다.

나는 바닥에 누워 신음하는 차송진에게 슬쩍 가서 말을 붙였다.

“괜찮아?”

“으으, 으으.”

대답은 형편없는 신음으로 나왔다.

“마사지라도 해 줄까?”

호의를 담아 물었지만, 차송진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저번에 근육 푸는 마사지를 한번 해 줬더니, 그다음부터는 아주 내가 손을 대려고만 하면 질색을 한다.

━그때 난 네가 사람을 죽이려는 줄 알았다.

‘몸이 그렇게 뭉쳐 있는데 그럼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둡니까?’

“제대로 안 풀어 주면 그거 다 뭉치는데…….”

“그거 모릅니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아…….”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정말 힘든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네 헛소리는 전염성인가 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제가 무슨 병균도 아니고 옮긴 뭐가 옮아요.’

━좋게 보자면 저 녀석이 저런 농담을 할 정도로 마음을 편히 먹고 있다는 뜻이겠지.

흠, 확실히. 요새에는 차송진이 겁을 먹고 파들거리는 건 조금 덜 본 것 같기도.

바닥에 누워 있는 차송진에게 다가간 김재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뭘 했다고 힘들어하는 거야?”

그 말에 차송진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치만 아무것도 안 했잖아.”

“열심히 따라다녔잖아!”

“따라다니기만 했잖아. 몬스터는 나랑 서현이랑 보스가 다 잡았는데.”

김재호의 도발에 열을 내는 차송진을 보며 나는 낄낄 웃었다. 그래, 확실히 편해진 것 같기도.

김재호와 열심히 말다툼하는 두 사람 사이로, 한서현이 눈을 좁힌 채 내게 말했다.

“이 근처에서 게이트가 많이 발생한다는 거요. 확실히 조사해 보니, 그 빈도가 이상할 정도긴 하더라고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할 정도의 수이긴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벽의 문이 열렸고 수많은 용병대에 의해 수많은 게이트가 공략되고 있다. 그럼에도 노먼은 내가 원할 때마다 따박따박 게이트를 대령한단 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게 현지 언론의 평이더라고요.”

“현지 언론의 평은 어떻게 알았는데?”

내 말에 한서현이 휴대폰을 흔들었다.

“요즘 웬만한 건 번역기만 있으면 전부 해석해 준다고요. 곧 완벽한 통역기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괜히 외국어 공부에 힘을 뺄 필요가 없을지도요.”

“그렇게 말하면 요즘 열심히 외국어 공부를 하는 차 씨가 뭐가 되냐.”

“글쎄요, 바보?”

“내가 시킨 게 다 바보짓이었구나, 그렇구나…….”

“……!”

한서현은 내 말에 황급히 변명을 내뱉었다. 그래도 역시 외국어를 배워 두는 게 경쟁력 있다든가, 때리면 망가지는 번역기보다야 역시 직접 배우는 게 낫다든가.

“때리면 망가지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냐.”

━삐쳤군.

‘아니거든요.’

한서현을 놀리는 것도 여기까지 해 둬야겠다. 나는 한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조사하느라 고생했어. 조만간 여길 뜨긴 해야겠어.”

“당장 여길 벗어나는 게 낫지 않아요?”

“흠…….”

확실히 게이트의 생성 빈도가 너무 잦다는 건 위험 신호이긴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차송진이 있지 않은가!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칠 수 있는 우리의 탈출구.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시간은 있을 것 같아서. 유사시에는 도망칠 수 있으니까 말이지.”

내 시선에 닿은 사람을 확인한 한서현은 얼굴을 구기면서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오늘은 푹 쉬고…….”

막 내가 한서현에게 말을 걸 때였다.

쿵쿵쿵.

누군가 우리 컨테이너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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