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51 미국, 기회의 땅 (5)
두 번째 게이트마저 하루 만에 공략을 끝내자, 노먼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로 빠르시군요.]
[그리 어려운 게이트가 아니었거든요.]
내 변명에도 불구하고 노먼의 눈빛에는 의심이 섞여 들었다.
[정말 C급 용병대가 맞습니까?]
겨우 게이트 두 개를 클리어했을 뿐인데, 너무 빨리 의심하는 거 아닌가.
━네놈이 숨길 생각도 안 했으니까.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곳이니까요. 게다가 겨우 C급 게이트이기도 하고.’
의심이 들어도 내가 잡아떼면 노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구르고 구른 C급 용병대죠. 이런 게이트는 수도 없이 깨 봤거든요. 기록을 보셨다면 아셨을 텐데요.]
[미국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은 기록은 인정되지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확인을 안 했다는 뜻? 기껏 열심히 기록을 꾸며 준 금 박사에게는 안된 일이었다.
큼큼 헛기침을 내뱉은 노먼이 나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게이트 안에 있는 사체를 처리하는 대로 정산해 드릴 겁니다. 큼, 다음 공략은…….]
[내일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어, 연달아 두 개의 게이트를 처리하셨잖습니까. 휴식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뭐 더 끌 게 있나.
문제가 생기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싶기도 했고, 실제로도 컨디션은 괜찮았다.
노먼은 내 부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무리하지는 말라면서도, 우리가 또 한 번 쉽게 게이트를 깨겠거니 하는 믿음이 느껴졌다.
확실히 이틀 만에 게이트 두 개를 깬 건, 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피곤하기는커녕, 사실 오랜만에 몸을 제대로 움직인 느낌이 나서 오히려 몸이 가뿐했다.
나야, 피곤해지더라도 재생으로 몸을 회복하면 되니 문제가 되진 않았다.
김재호야, 재생이 없이도 괴물 같은 체력을 지녔고 한서현은 몸을 움직이는 파는 아니라 피곤하지 않을 거다.
우리 용병대에서 가장 지친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차송진이었다.
이래서 기초 체력이 중요하다는 거다.
━이틀 동안 두 개의 게이트를 처리했잖냐. 힘들 만도 하지.
‘막 저한테는 나 때는 이것보다 더 심한 것도 했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저 녀석을 봐라. 팔랑팔랑한 것이, 쯧.
확실히 비교 대상을 우리로 하면 차송진은 너무 약했다.
정신력이고, 체력이고 우리를 도저히 따라오지 못했다. 이게 다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 역시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맞는다니까.
‘역시 더 굴려야만…….’
내 시선에 차송진이 몸을 잘게 떨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예요.”
“내 눈빛이 어디가 어때서?”
* * *
컨테이너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곧바로 외출복을 주워 입었다.
“먹을 것 좀 사 올게. 일어나, 같이 가자.”
내 말에 차송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랑요?”
“그래, 오늘 한 것도 별로 없잖아?”
그 말에 차송진은 입을 쩍 벌렸다.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전투조도 아닌 차송진이 게이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의심을 받지 않고 차송진과 이야기를 나눌 핑계가 이것뿐이라서. 내 눈짓에 차송진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차송진과 함께 식료품점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는 슬쩍 입을 열었다.
“아까 한 말은 오해하지 마. 그냥 당신을 끌어내기 위해 한 말이니까.”
“날 끌어내려고요?”
“응,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 있거든.”
내 말에 차송진의 어깨가 떨렸다. 그래, 이게 문제다. 나는 잔뜩 긴장한 기색의 차송진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리를 그렇게 겁낼 필요는 없어. 알잖아, 우리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거.”
그래도 몇 주간이나 우리랑 같이 지냈던 차송진이었다. 여전히 우리가 불편하고 싫을 순 있지만, 우리가 그에게 위험하지는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다.
“설마, 우리가 당신을 정말로 해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혹여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오해라고 말해 두고 싶어. 늘 당신한테 이래라저래라 강요한 주제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내 말에 차송진의 굳었던 어깨가 조금 풀렸다. 나를 힐끔거리던 차송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그쪽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그래도?”
“그냥 본능적으로 무서운 거죠. 당신들은 강하고, 무자비하고, 그러니까 무자비하다는 건…….”
차송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주현과 비슷하면서도 차송진은 달랐다. 늘 무섭다, 무섭다 말은 하면서 금세 나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남주현과 달리 차송진은 여전히 우리를 깊이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본능이라.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자주 보니까 좀 익숙해지지…… 않았군.”
차송진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볼을 긁적거렸다.
“앞으로는 그쪽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제해 볼게.”
확실히 겁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너무 자극적인 장면이 펼쳐지긴 했다. 취향도 아닌 고어 슬래셔 무비를 맨 앞줄에서 억지로 시청해야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냥 언젠가 익숙해지겠거니 한 게 패착이다. 앞으로는 되도록 예쁘게 처리해야지.
내 말에 차송진은 눈을 도륵도륵 굴렸다.
“고, 고맙습니다.”
“그런 감사 인사 듣자고 한 말이 아니야.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부탁이요?”
“우리가 조심하는 만큼, 그쪽도 우리가 불편하다는 티를 좀 덜 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해 둬야 했다. 단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쪽이 그럴 때마다 서현이한테 상처가 되거든.”
내 말에 차송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그 표정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안 그렇게 보이겠지만 서현이는 속이 아주 여리거든.”
설록진을 견뎌 내며 무뎌진 나나, 타인의 생각에 별로 관심이 없는 김재호와 달리 한서현은 섬세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아직 열여덟밖에 안 되기도 했고 평생을 다른 이에게 배척만 당해 온 터라, 제대로 된 인격 형성을 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사춘기의 중간에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살해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고.
한서현이 벨츠머츠, 우릴 아끼게 된 것도 우리가 그 녀석을 완벽히 받아들여 줬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자신을 배척하는 사람을 참을 수 없을 거다. 차송진이 그런 눈빛을 보낼 때마다 트라우마를 자극당하는 셈이다.
그래서 한서현은 차송진을 싫어하는 거다. 차송진이 한서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 차송진이 한서현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크지 않을까.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서현이는 무척이나 착한 동생이었어. 형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으며 언젠가 헌터로 성공해 형과 행복하게 살게 될 날을 꿈꿨지. 그리고 그 꿈을 망친 건…….”
“사람들은 당신이라고 하더군요. 한조희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하지만 그것도 누명이죠?”
“그래. 하지만 완전히 결백하지는 않아. 그래서 나는 그 죗값을 언제고 치를 생각이야.”
한조희가 그렇게 된 것도 결과적으로는 내 탓이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한조희가 그렇게 끔찍하게 죽진 않았을 테니까.
마나 중독에 시달리다 죽는 것도 꽤나 끔찍한 죽음이긴 했겠지만, 적어도 한서현이 고문당해 죽은 형의 시체를 보는 일은 없었을 거다.
내 개입은 한서현 개인에게는 최악의 일이었다는 뜻이다.
내 말에 차송진은 침묵했다. 나는 차송진에게 말했다.
“서현이, 엄청나게 좋은 녀석이야.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자신의 인생을 망쳤을 정도로. 그 죄책감으로 아직까지도 악몽을 꿀 정도로. 당신도 봐서 알잖아.”
“그러니까 그 녀석이 이렇게 된 게 전부 당신 잘못이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녀석은 아직까지 헌터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평범한 학생으로 살았을 테니까.”
“그 애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린 차송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 애는 그래도 당신을 잘 따르잖아요. 하나도 원망하지 않고.”
“그러니까 착한 애지.”
어쩌면 한서현에게 필요한 건 나 같은 어설픈 리더가 이끄는 범죄 조직 동료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신과 치료와 믿음직한 보호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한서현을 놔줄 생각은 없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말했다.
“나는 못돼 먹은 사람이라서, 말은 이렇게 해도 그 앨 끌어들인 걸 후회하지는 않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현이가 있어 줘서 난 늘 고맙다고 생각해. 대신 난 서현이가 우리와 함께하며 행복했으면 좋겠거든.”
그게 이 길로 그 녀석을 끌어들인 내가 한서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래서 당신한테 말하는 거야. 그런 시선으로 한서현을 보는 건 그만둬 달라고.”
혹시 내 말이 협박처럼 들리려나. 나는 차송진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부탁이야. 그 애를 상처 주지 말아 줬으면 해.”
내 말을 잠자코 들은 차송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
“알겠어요, 노력해 보겠다고요.”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흘렸다.
“좋아, 그럼 이제 장이나 보러 가자고.”
“정말 가는 거예요?”
“그래! 재호가 배고프다고 소리를 지르기 전에 후딱 사서 돌아가자고.”
* * *
그다음으로도 우리는 몇 개의 게이트를 거침없이 처리했다.
━그나저나 차송진한테 몬스터를 예쁘게 처리한다더니…….
‘예쁘게 얼렸잖아요.’
━별 모양으로 얼린다고 예쁘게 처리하는 게 아니지 않나?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물론 별 모양으로 몬스터를 얼렸다고 한서현에게 뒈지게 욕을 먹은 건 덤이다.
그래도 차송진을 웃기는 데에는 성공했다.
나름의 내 노력을 알아준 건지, 차송진은 그다음부터는 불편한 기색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한서현과의 마찰도 크게 줄었다. 여전히 서로 말을 섞지는 않더라도 기 싸움을 하는 게 줄었달까.
이 정도면 나는 만족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래, 눈물이 다 날 것 같구나.
일곱 개째의 게이트를 처리하고 나오는 날, 노먼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이건 정말로 놀라운, 놀라운 성과네요.]
그동안 매번 게이트에서 나올 때마다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열흘 동안 일곱 개의 게이트를 공략하다니요. 이런 속도는 본 적이 없어요.]
[C급 게이트니까 가능한 일이죠. C급까지는 위험한 몬스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잖아요.]
확실히 C급에는 ‘보스’ 몬스터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거의 없었다. 그냥 수로 밀어붙이는 녀석들을 처리하는 거야,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열흘 만에 일곱 개 아닙니까! 이 정도 실적이시면, 다른 용병대랑 협업해서 B급 게이트도 도전해 보실 만할 것 같은데요.]
아, 이게 본론이었군.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C급 게이트 공략이 좋아서요.]
[혹시 고위급 게이트를 피하는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건 아니시고요?]
역시 의심을 사 버렸군.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미국에서 에이전시의 위상은 대단하니까.
━완전히 의심하는 모양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내 패착이다. 겨우 C급 게이트다. 기라성 같은 괴물들이 많은 이곳에서 고작해야 C급 게이트를 빨리 처리했다고 이런 관심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고.
━흐음, 아무래도 네가 그동안 너무 대단한 녀석들만 봐서 그런 것 같다.
하긴, 내가 최근에 부딪쳤던 놈들만 해도…… S급 게이트를 밥 먹듯이 들어가는 사람들이었으니.
사실상 7성급 헌터가 전체의 1%도 안 된다는 걸 고려해 보면, 내 주변에 고위 각성자의 비율이 말도 안 되게 높긴 했다.
그나저나 이 의심을 그냥 넘길 순 없지.
나는 노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손쉬운 게이트만 처리하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겁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말이 없지만요.]
[당신 같은 능력자가 C급 게이트를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능력이 되지만 모험은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요. 저는 쉽게 가는 게 좋거든요.]
내 말에 노먼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딸깍, 그의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짜잔, 문제 해결 아닙니까?’
━참 나.
[그럼 제안은 거절하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떠나면서도 노먼은 몇 번이고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노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여기도 떠날 준비를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