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50 새로운 갈림길 (4)
나는 완성된 단검을 들고 김재호를 찾아갔다. 내게서 검을 받은 김재호는 장난감을 새로 받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여러 개의 단검을 다루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돌잡이 때 단검 세트를 집은 사람처럼 어색함 없이 자유자재로 단검을 다뤘다.
저글링도 하겠는걸.
“날카로우니까 그렇게 막 휘두르지는 말고.”
“응.”
내 충고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김재호를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데, 옆에 있는 차송진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차송진은 슬쩍 눈을 내리깔고는 구석으로 향했다. 딱히 눈치를 줄 생각은 없었는데……. 확실히 선을 그은 다음부터는 너무 기가 죽어 있다고나 할까.
게다가 꼭 다른 애들한테 선물을 줄 때마다 눈이 마주쳐서 민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부려 먹는 입장에서 뭐라도 제대로 된 걸 줘야 하나.
━기껏 선을 그어 놓고 생각한다는 게 그런 거냐. 아주 신경을 꺼야 저쪽도 편할 거라며?
‘그건 그런데, 자꾸 눈앞에 저러고 돌아다니니까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
━그게 네 문제다. 쓸데없이 정이 많아서는.
‘정이 많다니요? 저만큼 공과 사를 잘 나누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따지자면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더 가깝지 않나?
내 말에 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만 쳤다.
━허! 하! 허!
‘뭔데요, 그 반응은.’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암!
묘하게 기분 나쁜 레이의 반응을 뒤로하고 나는 김재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때?”
“좋아.”
“마력을 집어넣으면 단검이 움직일 거야. 위험하니까 사람이 없는 데서만 훈련하고.”
“응.”
김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하마터면 내 몸에도 구멍이 날 뻔했으니까, 확실히 위험하단 말이지. 내 경고에 김재호는 제법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참 재호가 착해. 말도 잘 듣고.
이런 착한 애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이런 말이나 해야 하는 내가 참 나쁘다.
꿀꺽, 침을 삼킨 내가 김재호에게 말했다.
“줬다 뺏는 거 치사한 건 아는데, 내가 전에 줬던 반지 다시 줄 수 있냐?”
내 말에 김재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다.
“내가 새로 준 검이 질투가 심해서 그래. 다른 아티팩트를 무용지물로 만들 놈이라.”
게다가 흡혈왕의 반지는 잠입, 은신에 능한 김재호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누가 뭐래도 저건 전위에 어울리는 아이템이니까.
단검 때문에 쓰지도 못하게 된 걸, 돌려받는 게 뭐 어때서. 나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
김재호는 말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얼굴의 온도는 점차 올라갔다.
김재호는 영 불만스러운 얼굴로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서 건넸다.
아, 맞다.
“그, 네가 전에 쓰던 단검도 좀…….”
내가 쓰던 단검이 없어져서, 어쩔 수 없달까. 내 말에 김재호의 입이 삐죽 나왔다. 허리춤에 매 둔 단검을 빼서 내게 건넨 김재호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다음에는 줬다가 뺏지 마.”
말에 뼈가 있었다.
쩝, 이거 보스의 위엄이 바닥에 떨어졌군.
━애초에 네놈에게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위엄이라는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잠자코 내 과거를 떠올렸다. 확실히 보스의 위엄이라고 부를 만한 게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나는 황급히 속으로 고개를 내저은 채 반지나 챙겼다.
━그나저나 그 반지는 왜……, 아니, 잠깐. 설마 네 녀석?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니까.
━아니, 설마 진짜로 그놈한테 줄 건 아니지?
‘원수가 됐대도, 이걸 세상에서 제일 잘 써먹을 놈이 있는데 우리가 들고 있기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원래는 벨츠머츠에게 도난된 물품이라 주기 영 그랬는데, 이젠 뭐 다 들켰으니까.
누가 뭐래도 이 아이템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정호산이었다. 놈과 연을 끊겠다고 말한 건 사실이다. 앞으로 나는 정호산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 녀석의 걱정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이런 아이템이라도 있으면 좀 안심이 되겠지.
나는 김재호에게 받은 반지를 들고 곧바로 한서현을 찾았다.
이 반지를 정호산에게 전해 달라는 내 부탁에 한서현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별 선물이야.”
“정말 이젠 그 사람이랑은 안 만날 거죠?”
“어, 신경 딱 끊고 살 거다.”
“진짜요?”
사람을 왜 이렇게 못 믿는 거지?
━그야, 정호산 일에 네가 넋을 놓은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말이지.
“……다시는 안 만나.”
“그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한다고 해도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서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감시 다 뺄까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남겨 둬. 녀석이 정말로 위험해지면 알 수 있을 정도로만.”
“그럼 그렇지.”
한서현의 말에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전처럼 무턱대고 그 녀석을 찾아간다거나, 연락할 생각은 없어.”
나는 한서현의 불안함을 이해했다. 보스라는 놈이 목적도 잊고 친구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했을까.
“이젠 중요한 게 뭔지 잊지 않을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게 뭔지.”
한서현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빌어먹을 설록진 의원에게 복수하는 거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정호산은 배달된 반지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붉은색의 반지였으나, 편지에 따르자면 이 반지는 몇 달 전 벨츠머츠가 옥션에서 빼돌린 흡혈왕의 반지였으니까.
이걸 팔아 치우지 않고 여태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걸 자신에게 건네준 건 놀랍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다.
‘한두 푼이 아닐 텐데…….’
설마하니 벨츠머츠의 창고에서 도둑질해서 자신에게 준 거라거나.
정호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강이신이 반지와 함께 보낸 편지에는 ‘다 허락을 받고 보내는 거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라고 적혀 있었다.
강이신은 편지에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다시는 내가 이런 식으로 너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이건 그동안 나를 잘 보살펴 주고, 나와 친구를 해 줬으니 주는 일종의 ‘이별 선물’이라고.
“이별 선물이라기엔 과하잖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정호산은 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벨츠머츠의 리더의 허락은 받은 건지. 그렇다면 대체 벨츠머츠에서 너는 어떤 대우를 받는 건지. 정말로 그곳을 집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여전히 정호산은 강이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정말 벨츠머츠를 집이라고 생각하냐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리더의 얼굴이 기억났다. 얼음벽을 만들어 그들을 갈라놓았던 그 리더를.
도채희는 그가 벨츠머츠의 리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퇴각을 명하던 것은 분명히 강이신이었다.
‘보스가 이신이를 그만큼 신뢰하는 걸까.’
정호산이 아는 강이신은 분명 뛰어난 녀석이었지만, 강한 ‘헌터’는 아니었다. 벨츠머츠의 리더가 강이신을 신뢰한다면 그건, 녀석의 다른 능력을 봤기 때문일 거다.
아카데미에 있는 그 누구보다 노력했음에도 끝끝내 강이신은 ‘헌터’가 되지 못했다.
바벨의 수치, 그 멸칭만큼이나 강이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애써 괜찮은 척을 했던 강이신이지만, 졸업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그 어떤 지명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강이신을 지켜 온 만큼, 정호산은 그 누구보다 강이신의 절망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말로도 정호산은 강이신의 그 절망을 메워 줄 수 없었다.
아이러니했다. 바벨 아카데미에서는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던 강이신이 빌런인 벨츠머츠에서는 꽤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
헌터가 아니라, 빌런이 되어서야 너는 인정을 받는구나.
동시에 씁쓸했다. 그래서 그들을 선택한 건가 싶어서.
정호산은 휴대전화를 꺼내 강이신이 마지막으로 보냈던 문자를 확인했다.
「다시는 네 걱정을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널 보러 가는 일도 없을 거고.
벨츠머츠로 있는 순간만큼은, 이 일에 충실하기로 했거든.
그러니 날 잊어. 네 친구 강이신은 없으니까.」
“이런 문자를 보내 놓고서 이런 대단한 아티팩트를 보내면 안 되지, 이 바보야.”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
강이신의 그런 걱정이 전해져 정호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할 수만 있다면,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하든, 누구랑 어울리든 상관없으니.
죽지만 말라고.
그렇다면 언젠가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왼손 새끼손가락에 붉은색 반지를 끼며, 정호산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 미래를 위해서라도, 오늘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강이신이 벨츠머츠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작전을 조금 바꾸긴 했지만, 여전히 도채희와 정호산의 목표는 불법 게이트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도채희는 초조한 얼굴로 정호산에게 말했다.
“어쩌면 이대로 아무것도 찾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제 도채희의 정직이 풀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각범부에 돌아가고 나서도 조사는 계속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각범부에 들어가게 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행동을 조심해야 할 테니까요.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 것도 자제해야 하고요.”
“흠, 확실히. 그 전에 무어라도 결실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다행히 그들은 그날이 가기 전에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보라색 게이트를 확인하며, 도채희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분명 3개월 전에 소멸 처리가 됐다고 한 공간에 나타난 게이트.
“드디어 하나, 찾았어요.”
정호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 *
모두를 거실로 부른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당장은 설록진도 정신이 없을 거야. 탑의 빌런들도 다시 구출해야 하고, 김성득 의원의 빈자리도 채워야 할 거고…….”
여러모로 설록진 쪽도 할 일이 많을 거라는 소리였다. 이 틈을 노려 설록진 쪽을 흔들어 놓는 것도 답이겠지만, 그러기엔 국내에 있는 쑤어하오주가 걸렸다.
벨츠머츠라는 이름으로 일을 저지르면, 그 불도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남주현이라는 목줄은, 목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약하니까. 음, 그렇지. 단번에 뜯어내고 탈출할 거다. 그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다.
“당분간은 해외에서 활동할 생각이야.”
적당히 조용히 시간을 보낸 다음에 해외에서 제법 그럴싸한 사고를 하나 치면 되지 않을까.
모두가 우리가 해외에 있다고 생각할 때 슬쩍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설록진을 상대하는 거지!
말해 놓고 보니 제법 괜찮은 계획 같았다.
“괜찮은 게이트가 있으면 공략도 좀 해 보고 말이야.”
여전히 국내는 빌어먹을 게이트 할당제 때문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말이지.
“그리고 겸사겸사 당신을 맡길 데도 찾고.”
내 말에 차송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걱정하지 마, 이상한 데에 팔아 버린다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까.”
워낙 재능이 악용당하기 좋은 터라 차송진은 정말로 아무 데나 맡길 수 없다.
“그래서 문제는 우리가 어디로 갈 건지인데…….”
해외에는 헌터들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그 어디든 비슷하다.
“가 보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내 질문에 김재호가 눈을 반짝였다.
“나 여기 가 보고 싶어.”
김재호가 내게 보여 준 것은 동화 속에 그려진 용궁이었다.
“어, 거긴 안 되겠는데.”
그다음으로 꺼낸 곳은 책갈피에 그려진 아틀란티스였다. 저번에 돌고래 인형을 사 준 다음부터 바닷속 세계에 푹 빠져 있는가 싶었더니. 어째 꺼내 오는 곳마다 죄다 바다냐!
“현실에 있는 곳을 말해 주라.”
“……시시해.”
뭘 시시하다고 하는 거야!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말한 주제에!
애석하게도 김재호의 의견은 내 능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러는 보스는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일단은 미국?”
미국은 용병 제도가 제일 잘 갖춰져 있는 곳 중 하나였다.
워낙 땅이 넓어 자국 헌터만으로는 땅을 방어하는 게 불가능한데, 또 돈은 많거든. 이러니 용병 제도가 발달할 수밖에.
내 말에 한서현이 얼굴을 구겼다.
“미국이면 그놈이 있는 데잖아요?”
그놈? 설마…….
“에이, 우리랑은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이야.”
그때 호주에서 테이카 쿠퍼를 만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진짜다, 그놈 만나면 내 손에 장을…….”
━그만! 그만둬!
레이가 급하게 말리는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나도 마침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지질까 했지만, 그건 좀 그렇지? 원래 지구는 둥그니까. 누구든 만날 수 있잖아.”
“……참 나.”
한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고, 우리의 목표는 미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