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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59화 (159/352)

제159화

#50 새로운 갈림길 (2)

마법 같은 해결책이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해결책은 없다.

도채희는 가만히 정호산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이신 씨가 벨츠머츠와 함께하기로 했다면, 정호산 씨를 멀리하려고 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친구긴 해도, 뭐냐, 상황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정호산 씨는 각범부에 들어가고 그쪽은 벨츠머츠로 활동하면, 아무래도 그 눈치도 보일 거고…….”

“이신이가 벨츠머츠를 관뒀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는 알겠어요. 둘 다 고집 장난 아니라는 거.”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은 쓰게 웃었다.

“그렇겠죠. 둘 다 고집을 꺾지 않아서 이 꼴이 된 거니까.”

그렇게 말한 정호산이 도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신이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도채희 경위님을 따라가면 자기와는 적이 되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사실 오늘까지 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나와의 연을 이렇게 끊겠어?

하지만 오늘 신호가 멈춰 버린 휴대폰을 보니, 녀석은 정말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이신이, 그 녀석도 나름대로 절박하게 저에게 부탁하고 있었던 겁니다. 전 그 녀석의 부탁을 무시했던 거고요.”

그렇게 중얼거린 정호산이 곱씹을수록 화가 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러면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대답이라도 잘해 주든가. 도대체 왜 벨츠머츠에 들어갔는지는 말해 주지도 않고! 이제는 이딴 식으로 사람이랑 연을 끊는다고 해? 나쁜 자식.”

그 한탄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들으며 도채희는 가만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까부터 엄청나게 신경 쓰인 말이 있는데 말이다…….

“혹, 혹시 저 때문에 두 분 사이가 이 모양이 된 건 아닌가요? 그러니까 강이신 씨도 말했지만, 그, 제가 대놓고 벨츠머츠를 쫓고 있으니까…… 저 때문에 두 분 사이가 이렇게 된 거 같은데.”

“아니요, 도채희 경위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제가 제 고집을 꺾지 않아서……. 아니, 애초에 자기는 그런 빌런 집단에 들어가 놓고 나한테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도 않고 길드로 돌아가서 잘 먹고 잘살라고 한 게 정상이냐고요!”

우울했던 곰은 분노한 곰이 되었다. 도채희는 기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하든 정호산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정호산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채희 경위님이 거절했더라도 전 길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 녀석을 쫓았을 겁니다. 이신이가 뭐라고 말하든 저는 녀석을 포기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이 사람이라면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이에요?”

도채희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직 누구에게도 정호산 씨가 각범부에 관심 있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면 무를 수 있어요. 각범부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고 저와 함께하게 되면 강이신 씨 말대로 벨츠머츠를 적대하게 되는 꼴이잖아요.”

“그러니 더더욱 각범부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예?”

“도채희 경위님께서 그러셨잖습니까. 각범부는 벨츠머츠를 노리고 있다고. 진짜 나쁜 놈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벨츠머츠를 희생양으로 삼을 거라고.”

이번 누명을 보면서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진짜 ‘적’이 누구든, 손쉽게 상황을 조작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가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적은 지금 벨츠머츠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직접 각범부 내부로 들어가 벨츠머츠를 보호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누군가 그 녀석을 함정에 빠트리려 한다면, 그걸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곳이 거기일 테니까요.”

강이신은 정호산과 연을 끊을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정호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길드에 못 돌아가요. 도저히 길드 활동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으음, 확실히…….”

이미 정호산은 발을 빼기에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한들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벨츠머츠가 진짜 나쁜 놈들을 잡으려 한다면, 어쩌면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같은 궤도를 그리며 돌지는 못해도, 목적지는 같지 않을까. 그 목적지에 도달하면 어쩌면 강이신을 다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에는 다시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정호산이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뭔데요?”

“그날, 도채희 경위님은 왜 저한테 전화하신 겁니까?”

“그날이라면…….”

“이신이의 사건을 재수사하고 싶다고 말씀하신 날이요.”

순간 대체 왜 그날 전화해서 일을 이렇게 꼬았냐는, 자신을 향한 원망인가 싶어 도채희는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정호산의 얼굴에선 원망의 조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도채희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솔직히 그때 제가 정호산 씨에게 전화를 한 건, 어쩌면 용기를 얻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라요.”

박철완과 그런 식으로 헤어진 뒤, 도채희는 문득 세상에 혼자가 됐다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가족을 모두 잃었을 때처럼, 이 세상에 홀로 된 기분이 되었다.

옳은 길을 가야지, 그러니까 이건 옳은 선택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비겁하게나마,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싶어졌다.

네가 틀리지 않았다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응원.

그 대상이 정호산이었던 건, 도채희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정직하고 또 따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 그 사람에게 당신의 친구를 위한 일을 하겠다고 말하면, 순수하게 응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응원을 받고 싶으셨다고요.”

“하하, 그랬어요. 정말로, 그때에는 그런 말 한마디가 간절했거든요.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제게 말해 줬으면 했어요.”

그런 말 한마디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 정호산이 전한 건 응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저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하셨을 때, 엄청나게 놀랐어요.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솔직히 정호산 씨 인생을 생각하면 몇 번이고 거절하는 게 맞지만…… 저도 알거든요. 인생을 집어던지고서라도 해결하고 싶은 사건을 만난 기분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설마하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정호산 씨의 사정을 다 알고도 일단 여기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밖에는 못 하겠네요. 강이신 씨가 알면 저를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만.”

“자기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도채희 경위님을 원망하면 안 되죠.”

“하하, 그래도요.”

여러모로 강이신과는 악연으로 엮일 팔자라고 도채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사실 조금 고민했습니다.”

“뭘요?”

“각범부 안에 들어가면 도채희 경위님을 모르는 척할까 하고요.”

도채희는 이미 각범부 안에 찍힌 상황이었다. 그녀와 함께한다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강이신이 벨츠머츠에 들어갔다는 걸 안 순간, 정호산의 제1순위는 변경되었다.

어떻게든 각범부에 오래 붙어 있으면서 벨츠머츠에 대한 정보를 제일 먼저 받아 보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그리고 그 위치에 서려면, 각범부에서 ‘찍힌’ 도채희와 같은 편이라는 걸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들으니, 그 짓은 못하겠네요.”

혼자가 됐다는 두려움에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고 싶어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람에게, 앞으로 모르는 척을 하자는 말은 좀.

하지만 그 말에 도채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미 용기는 얻었어요. 게다가 적들은 전략적으로 나올 건데, 우리만 무식하게 맞부딪칠 이유는 없잖아요.”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채희가 정호산을 향해 외쳤다.

“그래요, 그렇게 가요!”

“예?”

“각범부 안에서 모르는 척하자고요! 이렇게 된 거, 아주 저와는 모르는 척을 하고 그쪽 편에 들어가는 편이 좋겠어요.”

“스파이라도 되라고요?”

“그렇게까지 거창하게는 말고요. 그냥 저와는 적당히 거리를 두자는 거죠.”

영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호산에게 도채희가 말했다.

“어그로는 제가 끌 테니, 그때 자유롭게 움직여 달라는 뜻이에요. 굳이 우리 둘 다 표적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정호산은 도채희의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정호산의 말을 듣고 도채희의 가슴에는 죄책감이 쌓였다. 어쨌거나 자신이 그날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정호산이 이렇게 원치 않던 진실과 가까워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어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정호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채희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도채희가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어요. 각범부에 돌아갈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긴 하거든요. 거기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되게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던 것 같은데, 어느새 겁이 나는 곳이 되어 있더라고요.”

다시 혼자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겁부터 났다. 하지만 도채희는 겁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 겁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겁에 질린다고 도망가는 사람은 아니어서요. 그러니까 해보려고요.”

도채희가 장난스레 덧붙였다.

“해보다가 정말 못 해 먹겠으면, 그때 SOS 칠 테니까 그때 도와주실래요?”

* * *

숨이 막힐 만큼 어두운 분위기가 감도는 사무실 안, 김두식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아니, 팀장님. 이제 인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인정하긴 뭘 인정해.”

김두식의 말에 최인혁은 얼굴을 구겼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못할 때 물에 불은 두꺼비처럼 못생긴 김두식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러나 김두식은 최인혁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전혀 쫀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는 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더니, 오늘은 무슨 폭군에게 직언하는 충신이라도 된 양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제 앞에 섰다.

“팀장님은 돈을 떼먹힌 겁니다! 강이신이라는 그놈한테요! 그냥 떼먹힌 거라고요!”

김두식의 입에서 나온 말에 최인혁은 그대로 책상 위에 있던 자신의 명패를 집어 던졌다.

거구에 걸맞지 않은 재빠른 회피 동작으로 명패를 피해 낸 김두식이 소리쳤다.

“팀장님께서 이렇게 화를 내셔도 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떼먹히긴 누가 떼먹혀!”

최인혁의 말에 김두식은 생각했다.

‘팀장님이요! 팀장님께서 떼먹히셨습니다!’

김두식 또한 목숨은 소중하기에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벌써 열 달째 소득도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최인혁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어차피 원금도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얼마 안 되기는. 그날 대출해 줄 때 나한테 머리에 총 맞았냐고 물어봤잖아?”

“예? 제가요?”

“그래!”

“그, 그런 말을 제가 했을 리가 없는데.”

김두식은 말을 더듬었다. 확실히 왜 볼 것도 없는 놈한테 그런 거금을 빌려줬냐는 말은 한 것 같다만.

“그래도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돈이면, 그냥 떼먹혔다고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고리대긴 했지만, 월 이자도 아니고 연이자 40퍼센트라 여태까지 쌓인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큰돈이 맞긴 맞지만, 최인혁이 이렇게까지 매달릴 만한 금액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이렇게 연락이 없는데, 이쯤 되면 죽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 노잣돈! 노잣돈 챙겨 줬다고 생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너는 X발, 누구 노잣돈으로 1억 3천만을 갖다 박는데! 아니지, 이제 1억 8천만이거든? 대체 세상 누가 조의금으로 그 큰돈을 내냐고!”

최인혁의 흉악한 표정에 김두식은 입을 닫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크긴 했다.

“아니면 형님의 도움을…….”

“내가 형님이 어딨어!”

이번엔 책상 위에 있던 컵이 날아들었다. 또 한 번 기가 막힌 회피 동작으로 컵을 피해 낸 김두식은 땀을 뻘뻘 흘렸다. 최인혁은 분에 못 이겨 숨을 씩씩 내쉬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걸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 인간에게는 절대로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다른 길에 몰려 버린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든 그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 없어? 죽었으면 어디에서 죽었다, 뭐 그런 거라도 찾아내야지.”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렸다면, 최인혁이 이렇게 열이 받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강이신 그놈은 정말로 하루아침에 ‘그냥’ 사라져 버렸다. 죽었다는 흔적도 없이, 엄밀히 말해 법적으로는 여전히 실종 상태인 거다.

그때, 김두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무래도 헛소문 같아서 말씀을 안 드렸는데 말입니다.”

“헛소문 같으면 말을 마!”

“예.”

너무 순순히 입을 닫은 김두식에 최인혁이 열을 내며 말했다. 젠장, 앓느니 죽지.

“아니다, 말해 봐.”

“혹시 ‘희망 심부름센터’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희망 심부름센터?”

“예, 캄보디아 쪽에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해 주고 알아봐 준다는 사이트가 하나 생겼는데요. 여기가 진짜 뭐든지 다 알아낸다고 하더라고요.”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넘기려던 최인혁은 얼굴을 구겼다. 젠장, 지금 그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던가.

“……한번 연락해 봐.”

“예!”

희망 심부름센터라. 정말로 그놈들이 자신의 희망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될지. 최인혁은 일단 한번 시도나 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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