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50 새로운 갈림길 (1)
정호산으로부터 날아온 문자를 보며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날, 그렇게 도망쳐서는 그런 뉴스나 보게 했으니. 정호산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벌써 이런 식으로 녀석을 물 먹이는 것도 몇 번이나 반복했고.
그나마 다행이랄까. 녀석은 그 뉴스가 누군가가 우리에게 씌운 누명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호산이 화를 내는 건, 나를 걱정하기 때문일 거다.
「네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데.」
문자를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레이가 말했다.
━너도 답은 알고 있지 않냐. 끌어들일 수 없으면 놔주는 게 맞는 거다.
“놔준다니, 어떻게요.”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친구야’라는 헛소리를 멈추라는 거지. 너희 둘은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그 녀석이 과거 네 가장 소중한 친구였을지는 모르지만, 미래에도 그럴 순 없잖냐.
그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정론이다.
━이미 너는 그놈에게 몇 번이나 경고하지 않았냐. 도채희를 따라가게 되면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그 경고를 어긴 건 그쪽이다. 앞으로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그쪽은 무시할 테지. 그때마다 이렇게 미련하게 굴 생각이냐?
레이의 말이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랬다, 레이의 말대로 나는 여태까지 정호산에게 수없이 많은 경고를 남겼다.
다소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정호산에게 보낸 쪽지는 모두 내 진심이었다.
정호산은 내 쪽지를 모두 무시하고 도채희 경위와 함께 내 뒤를 쫓기로 했다. 벨츠머츠로서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벨츠머츠와 합류한 나를 잡겠다는 그 녀석 나름의 결심이다.
━네 녀석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 거 아니었냐? 네 잘난 친구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렇지?
“그거야, 그렇죠.”
━그리고 말이다, 네놈에게는 이미 소중한 놈들이 생겼잖냐. 그 친구 하나를 챙기겠다고 너만 보고 있는 애들을 버려둘 셈은 아니겠지?
예전이었더라면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호산을 챙겼을 거다. 내 인생에 있어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소중한 놈은 걔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이의 말대로 이번 삶에서 나는 나만을 바라보는 애들을 거두고 말았다.
━그날, 넌 도망가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라고 말했지.
“예.”
나는 바닥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저한테는 돌아올 곳이 생겨버렸잖아요.”
누군가는 형편없는 벽돌집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기지를 이루고 있는 벽돌 하나하나에는 우리가 이곳에서 보낸 추억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직도 거실 한편에는 아이들이 그렸던 그림이 남아 있었고, 페인트가 모자라 바르다가 만 벽을 가구로 가려 놓은 흔적까지 그대로였다.
한서현이 직접 골라 배치한 가구들과 직접 이름표를 써서 문에 걸어 둔 명패까지.
전부 내 손길이 닿은, 우리의 손길이 닿은 ‘우리’ 집이었다.
“그 녀석이 나를 이해해 주는 날은 오지 않겠죠. 내가 바라는 이해는, 녀석에게는 포기로 느껴질 테니까. 그리고 나를 포기한다는 건, 나를 버리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할 테니까.”
정호산은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 벨츠머츠에서 꺼내는 것이 친구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할 놈이다. 친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정호산을 욕할 자격이 나에게 있나. 사실 나도 똑같이 굴었는걸. 정호산의 결심을 무너트리는 게, 도채희와 떨어트려 어떻게든 길드로 돌려보내 안정된 삶을 살게 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
누구 하나 고집을 꺾어야 할 때가 왔음에도 정호산도 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놈하고 얽히면 너답지 않게 우유부단해진단 말이지. 안 되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네 녀석의 얼마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얼마 안 되는 장점이라뇨. 내가 얼마나 장점이 많은데…….’
━그런 말로 넘길 생각은 하지 말고.
레이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놈이 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연을 끊지도 못하겠어서 레이의 말대로 나는 나답지 않게 지난 몇 주를 낭비했다.
━처음부터 답이 나온 문제 아니었냐.
“하아, 말은 쉽네요.”
━어차피 그놈하고 너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영영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 팔자 아니냐. 너도 그렇고 그 녀석도 그렇고 둘 다 친구 아니랄까 봐 아주 고집이 대단하시니까 말이지.
여전히 고집스럽게 침묵하는 나에게 레이가 말했다.
━이제 그만 도망쳐라. 널 위해서도, 너만 바라보고 있는 저 불쌍한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레이의 말에 나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야, 오늘따라 양심이 따끔따끔한데요.”
레이가 말한 대로 우리 사이의 결론이 뻔히 나와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도, 나는 그 결론을 내는 걸 몇 번이고 포기했다.
적당한 변명을 대면서 도망칠 기회가 있으면 무턱대고 도망쳤지.
왜냐.
정호산을 내 손으로 쳐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레이의 말대로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아니면 네 재능을 쓰든가. 그래서 네가 원하는 대로 그 녀석을 길드로 보내고, 여전히 네 친구로 남게 하든가. 그건 또 못 하겠다며?
이 모든 일을 마법처럼 해결할 방법. 정호산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그럴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도저히 못 하겠더라.
“전요, 설록진 밑에 있으면서 수백 번, 수천 번 ‘거짓말’을 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멋대로 망치고요,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어요. 가장 최악이었던 건, 제 거짓말에 당한 사람들 모두가 제가 심어 놓은 생각을 원래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게 된 거였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원망도 하지 않아요. 그 모든 게 자신의 원래 계획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나는 그 연인을 찢어 놓은 적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여인은, 그 남자를 경멸하며 떠나갔다.
너무나도 달라진 그 여자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제의 여자와 오늘의 여자는 과연 같은 사람일까. 내 거짓말이 어쩌면, 한 여자를 죽여 버린 건 아닐까.
사랑을 경멸로, 우정을 증오로, 부성애를 무관심으로.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마저 나는 멋대로 헤집어 엉망으로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건, 그리고 그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게 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나 끔찍한 일이다.
웬만해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물론, 필요하다면 그런 일을 수십 번 할 수 있는 것도 나란 인간이다만.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고, 친구의 선택을 바꿔 버린다면…… 그런 걸 어떻게 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영원히 그 녀석을 친구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거짓된 우정 대신 진실된 이별을 녀석에게 줘야만 했다.
내가 쥐고자 한 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조각이었다.
그리움과 미련은 이제 끊어 내야 한다.
날 위해서도, 그리고 그 녀석을 위해서도.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 * *
정호산이 얼음벽을 주먹으로 깨부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버린 공간을 보며 정호산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서 벨츠머츠 일행을 놓쳤으니, 기운이 빠질 법은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우울, 그 자체를 형상화하면 꼭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호산 씨.”
도채희는 조심스럽게 정호산에게 다가갔다. 정호산은 도채희의 부름에도 여전히 벤치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있었다.
오늘은 영 상태가 좋지 않네. 게이트 탐방은 다른 날로 미루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고개를 든 정호산이 도채희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뱉었다.
“알고 보니 이신이는 벨츠머츠더군요.”
“와악!”
갑작스러운 소식에 도채희는 비명을 꽥 질렀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놀란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제 다 보셨잖아요.”
그 말에 도채희는 뒤늦게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어제 다 보고 듣긴 했다.
가면 속에 있던 얼굴이 드러났을 때,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최근 벨츠머츠에 대해 그렇게 묻고 다녔구나, 하는 생각은 했죠.”
도채희는 그제야 정호산의 최근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강이신이 벨츠머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하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기 전에 그 녀석을 벨츠머츠에서 빼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으음, 예에.”
“근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정호산의 표정은 참으로 우울해 보였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채희는 그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친구가 사실 알고 보니 대한민국 최고 빌런?
이런 상황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냐고!
“그러는 경위님은 괜찮습니까? 그 각범부에 난리가 났다고……, 아, 아시겠지만 그건 절대로 녀석들이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쓰게 웃었다.
“예, 다행이랄까. 제가 아는 분들은 없어서요. 저도 그 일을 저지른 건 벨츠머츠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어요.”
벨츠머츠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아무런’ 죄도 없는 민간인을 해친 적이 없었다. 혹여 쑤어하오주가 그들의 목표였더라도, 그곳에 있던 다른 이들을 굳이 건드릴 리가.
“또 한 번, 누군가 그들에게 누명을 씌운 거죠.”
그 말에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늘 뉴스를 보고서 이신이한테 연락을 했습니다.”
“연, 연락할 수 있었던 거에요?”
“사실 도채희 경위님께는 비밀로 녀석과 연락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충격적인 폭로였지만, 새삼 배신감이 들지는 않는다. 정호산에게 강이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도채희의 질문에 정호산은 쓰게 웃었다.
“뭐라고 말도 못했습니다. 제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신이가 저에게 최후통첩을 날렸거든요.”
“최후통첩이라면?”
“다시는 저를 만나지 않겠답니다. 제게 따로 연락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제 친구였던 ‘강이신’은 죽었고, 앞으로는 벨츠머츠의 사람으로 살 테니 그렇게 알라고요.”
최후통첩이라는 말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음, 우울해할 만하네.’
도채희가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리는 사이, 정호산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어제 그 녀석이 했던 말을 듣고서요. 저한테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라는 말을 하는 그 녀석의 얼굴을 보니 왠지 이런 결론을 낼 것 같았거든요.”
그 녀석과 그동안 수많은 일을 같이 겪어 본 친구로서의 ‘감’이랄까.
어느새 저 녀석은 벨츠머츠를 진심으로 아끼게 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이 있어 벨츠머츠에 들어간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이신이에게 벨츠머츠는 소중한 동료가 돼 버린 겁니다.”
늘 퉁명스럽게 말하고, 솔직하게 굴지 못해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드는 지옥의 주둥아리를 가졌지만 강이신은 정이 많았다.
오지랖도 쓸데없이 넓어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말을 걸었다가 상처를 받는 일도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러니 빌런이라는 벨츠머츠마저 품어 버린 거다. 소꿉친구인 자신을 버리고 얼마 전에 만난 그놈들을 선택했다는 건 충격이었지만, 상황이 이런데 새삼 그렇게 어린애같이 따질 수도 없었다.
애초에 강이신의 경고를 무시한 건 정호산의 선택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울하다! 우울해! 도채희는 눈앞의 절망한 곰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불행한 곰을 위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