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49 내가 뿌린 씨 (7)
각범부의 사람들이 뒤늦게 침입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쑤어하오주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뒤였다.
처음에는 쑤어하오주의 단독 행동인가 싶었지만, 곧 조력자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건 당시 촬영되고 있던 CCTV에는 검은 가루가 들러붙어 써먹을 수 있는 영상이 하나도 없었으며, 보안실에 설치되어 있던 보안 아티팩트들은 누군가에 의해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어야 할 보안 요원들은 모두 기절한 상태로 손발이 묶인 채 발견되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무언가에 의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 공통된 진술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보기라도 했다면 모르되 현장에 있던 모두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쑤어하오주의 실종 3시간이 지난 현재, 이 모든 상황을 전달받은 설록진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 쑤어하오주를 직접 찾아가 그녀에게서 벨츠머츠에 대한 정보를 빼내려고 했던 그의 계획은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다.
“증거도 없다, 목격자도 없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겠다? 각범부 본관에서 중요한 증인이 사라졌는데 겨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요.”
“죄, 죄송합니다.”
참으로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누가 범인인지도 전혀 모르겠다고요?”
“이, 일단 벨츠머츠가 아닐지 추정하고 있긴 합니다만.”
“추정이라는 건, 결국 확실하지는 않단 말이네요?”
“죄, 죄송합니다!”
“아아, 또 똑같은 말. 사과도 너무 진부하면 듣기에 질리는데 말이죠.”
뭐, 사실 범인에 대해서는 설록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짓을 할 놈들은 벨츠머츠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는 놈이 그놈들밖에 더 있을까.
쓸데없는 피해자를 남기지 않고, 쑤어하오주만 빼낸 것 또한 이 일을 저지른 이들이 벨츠머츠라는 추측에 힘을 실어 주었다.
‘김성득 의원 때도 그랬지. 경호원들은 건드리지 않았어.’
참으로 애매한 놈들이었다. 여태까지 거침없이 살인을 한 걸 보면, 살인에 거부감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굳이 죄 없는 놈들을 살려 둔다는 것이.
‘정말로 자신들을 자경단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우습지 않은가. 자칭 빌런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순진하게 구는 게. 그래도 쑤어하오주는 확실하게 처리했을 것 같지만.
‘그 여자애마저 살려 둔다면, 그건 순진한 정도가 아니라 멍청한 거니까.’
이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다고 해도 설록진이 원하는 그림은 만들 수 있을 거다. 무능한 각범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열네 살짜리 어린애마저 비정하게 처리한 벨츠머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그림이 심심하다.
그러니 조금 더 예쁘게 덧칠해 주는 게 낫겠지.
설록진의 동공이 노랗게 물들었다.
* * *
다음 날, 차송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실로 뛰쳐 들어왔다.
“다들 기사 봤어요? 여, 여기에 있는 기사!”
부엌에 있던 한서현이 재빨리 차송진의 손에서 태블릿 PC를 뺏었다. 인질인 주제에 이런 걸 사용하다니, 제정신인가?
“누가 당신한테 이걸 줬어?”
“재호, 재호가…….”
차송진의 말에 한서현은 곧바로 김재호를 노려봤다.
“형!”
김재호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끔뻑였다.
“이걸로 다른 데다가 자기 살려 달라고 글이라도 쓰면 어떻게 해!”
“아.”
“아, 가 아니지! 지금 형의 섣부른 판단으로 우리 벨츠머츠가 커다란 위험에 빠졌다고.”
김재호의 얼빠진 말에 한서현은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도대체가 보스도 그렇고 김재호도 그렇고. 빌런이면 빌런답게 굴지, 왜 이렇게 허술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서현의 말에도 김재호는 여전히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어이, 이상한 짓 하면 내가 뭘 하겠다고 했지?”
김재호의 말에 차송진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죽, 죽여 버린댔어요.”
“봐!”
김재호의 당당한 표정에 한서현은 한숨을 쉬었다.
“……어휴.”
여전히 태블릿 PC를 빌려준 게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차송진이 정말로 문제를 일으킨다면 김재호가 가만히 두지 않겠지.
“무슨 기사를 봤기에 이 난리를 피운 거야?”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나저나 보스는 그렇다고 쳐도 너는 나이도 한참이나 이런 게, 반말이나 찍찍 하고……!”
차송진은 자신을 노려보는 한서현의 눈에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요즘 애들이 무섭다더니, 정말 무서웠다. 대답할 생각이 영 안 보이는 차송진을 대신해 한서현은 태블릿 PC에 뜬 기사를 직접 확인했다.
“아아. 그 인간이 또 난리를 쳐 놨나 보네.”
태연한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은 입을 쩍 벌렸다.
“그, 그게 끝?”
“그럼? 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데?”
한서현의 질문에 차송진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야, 누명을 씌웠다든가. 우리가 한 짓도 아닌 걸로 이런 기사를 쓰다니 개자식들이라든가. 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차송진이 본 기사는 각범부에서 일어난 벨츠머츠의 범행을 담고 있었다. 정확히는 벨츠머츠가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다.
“너, 너희는 어제 거기에서 아무도 안 죽였잖아. 맞지?”
차송진이 알고 있기로 어제 쑤어하오주 탈출 작전에서 벨츠머츠는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강이신이 직접 말하는 걸 듣기도 했고, 당장 그날 만났던 벨츠머츠에게서는 그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고, 피 냄새도 나지 않았다.
보도된 사진대로 벨츠머츠가 그곳에서 살육을 저질렀다면, 그렇게 옷이 깨끗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 말의 뜻이 뭐냐.
“이건 누명이잖아.”
“그게 뭐.”
하지만 차송진의 예상과 달리 한서현도, 김재호도 아주 태연하기만 했다.
“화도 안 나?”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화는 무슨.”
“뭐어?”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은 놀라 입을 벌렸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말은. 몇 번이고 이런 누명을 써 왔다는 건가?
“설마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도, 전부 이런 가짜 뉴스…….”
“아니, 우리도 꽤 많이 죽이긴 했는데…….”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닫았다.
‘대체 뭐가 사실이고 뭐가 가짜인지, 물어볼 수가 없다!’
뒤늦게 거실로 나온 강이신 또한 기사를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 또 누명이야? 이젠 식상하기까지 하네. 아이디어가 다 떨어진 모양이야.”
마치 이번 일의 누명을 씌운 사람을 알고 있기라도 하단 말투 같았다.
“누가 누명을 씌운 건데요?”
차송진의 말에 강이신이 답했다.
“뻔하지, 우리가 아주 국민 개자식이 되길 바라는 사람.”
그리고 그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강이신은 차송진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알아 봤자 좋을 거 없어.”
“으으! 너무 궁금한데.”
차송진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 누구도 차송진에게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차송진은 꾸욱 입을 닫았다.
“그나저나 겨우 살려 놨는데 안 됐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하여간에 그 자식은…….”
강이신의 말에 차송진은 조금 놀랐다. 하긴, 작전 전에도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신경 쓰라고 했었지. 납치한 쑤어하오주도 살려 줬다고 했고…….
‘생각보다 엄청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차송진이 새로운 눈으로 강이신을 바라볼 때였다.
“아침은 뭐냐, 서현아.”
“대충 간단하게 먹으려고요.”
“아, 뭔가 국물 있는 거 먹고 싶은데.”
“우유에 시리얼 말아 먹어요.”
“내 생각에 시리얼을 국물 요리에 넣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
“그럼 그게 국물이지, 뭐예요?”
“좀 뜨끈한 건 없냐?”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든가요.”
“됐다, 그냥 먹을게.”
둘 사이의 대화를 듣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자신밖에 없단 말인가.
“저, 정말로 이게 끝이에요?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냐고요.”
그 말에 강이신이 고개를 돌렸다.
* * *
차송진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저렇게 난리인지 모르겠다.
누명이 뭐 어때서.
“어차피 우리는 이미 똥 묻은 개야. 똥 더 묻는다고 티도 안 나니 걱정할 필요 없어.”
“달라질 게 없다뇨! 세상 사람들이 죄다 벨츠머츠 욕인데…….”
“그래, 욕 더 먹는 거. 그거 하나 다르겠네. 근데 그거 말고는 다 똑같다니까.”
━이제 이미지가 겨우 좋아졌나 싶었는데. 말짱 황이 되지 않았냐.
레이의 말대로 김성득 의원 사건 이후로 우리를 다크 히어로라며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칭찬에 넘어가 내 본분을 잊을 생각은 없다.
“우리는 악당이 맞아. 새삼 누명을 썼을 때, 억울하다고만은 말할 수는 없는 처지랄까.”
실제로 사람도 죽였고, 음, 많이 죽였고. 그중 한 명은 아주 잔인하게 죽여 전시하듯 내걸기도 했으니. 새삼 몇 명 더 죽였다는 누명을 써 봐야, 그게 뭐.
“가짜 뉴스에 놀아날 유족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형체도 없는 범인을 찾아 헤매느니 우리를 원망하는 편이 그쪽도 차라리 마음이 편할 거야. 진짜 범인에 대한 복수는 우리가 해 줄 거고 말이지.”
“복수하겠다고요.”
“그래.”
“대체 범인이 누군데요.”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제법 집요했다. 나는 한서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한서현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왜 저 녀석과 말을 섞어 주냐는 얼굴이다.
하여간, 어지간히 차송진을 싫어한단 말이지.
“곧 여길 나갈 사람이 우리랑 원수진 놈을 알아서 뭘 하게. 그리고 그 사람은 진짜 위험해. 우리의 최종 목표가 그 인간을 끌어내리는 것일 정도로.”
나는 차송진에게 눈빛으로 경고했다.
여기에서 물러나는 게 좋을 거라고.
“그래서 그냥 누명을 써도 넘어가는 겁니까. 이게 누명이라는 말도 하지 않고요?”
“뭐, 그거야 그 인간이 무서워서도 있겠지만…….”
차송진의 말은 내 자존심을 묘하게 건드렸다. 그러니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거야? 꼭 그렇게 들려서.
하지만 이건 도망치는 게 아니다. 그냥 무시하기로 한 거지.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예?”
“지금 저게 다 누명이라고 누구랑 인터뷰라도 해?”
내가 누명을 쓰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 건, 결국 이 누명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 말을 믿어 주겠어?”
설록진도 그걸 안다. 그러니 거리낌 없이 이렇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지.
“그러니 이렇게 정신 승리라도 하기로 한 거지. 아니면 너무 속이 터질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헤집지는 마.”
내 설명에 차송진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벨츠머츠의 현실은 이렇다.
“말했잖아, 기대가 있어야 실망이 있는 법이라고. 우리는 대중에게 아무런 기대도 안 해. 우리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든, 쓰레기라고 생각하든. 그런 명성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 사람들이 벨츠머츠를 못된 놈들이라고 욕한대도 타격은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는 없어. 그나저나 이렇게 딴짓하는 걸 보니 힘이 많이 남았나 보네. 당연히 어제 내준 숙제는 다 해 뒀겠지?”
“아, 아직.”
“쓸데없이 그런 소문에 시간을 쓰니까 숙제도 못 하지.”
“그, 그게…….”
나는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차송진의 어깨를 툭 두들기고는 식탁 앞에 앉았다.
“점심 먹기 전까지는 해 둬. 그때 검사할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그 소문이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뭐, 아까부터 아주 날뛰고 있는 친구 하나가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