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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54화 (154/352)

제154화

#49 내가 뿌린 씨 (4)

두 사람이 각범부 건물로 들어가려는 걸 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두 사람이 저 안으로 들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젠장. 여기에 있어. 도망갈 생각 말고.”

나는 미리 챙겨 왔던 가면을 차송진에게 씌웠다.

“가, 가면은 왜…….”

“가만히 있어.”

바둥거린 탓에 시간만 낭비했다. 나는 차송진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좋아, 완벽하게 씌웠군.

갑자기 가면을 뒤집어쓰게 된 차송진은 기겁했다.

“지, 지금 내 얼굴에 가면을 씌운 거예요? 뭐, 뭘 하려고?”

“여긴 각범부의 기지 근처야. 주변에 탑의 빌런들이 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얼굴은 감춰야지.”

“히이익!”

이곳에 있는 빌런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니 일단 차송진을 보호하는 게 먼저다.

나는 차송진이 쓰고 있는 가면을 툭툭 건드려 얼굴이 떠오르게 했다. 멀리에서 보면 적당히 평범한 얼굴이니 괜찮겠지.

“일단 여기에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라니…….”

그렇게 말한 나는 내 몫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로 재빨리 비탈길을 타고 내려왔다.

저대로 정호산과 애들을 만나게 둘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사실 오해도 아니지 않냐.

‘오해입니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몸을 은신한 채 비탈길을 따라 도채희와 정호산 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각범부의 뒤쪽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정호산과 도채희를 바라본 나는 눈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여기에는 왜 온 거지?

각범부에 들어가려고? 그게 하필 오늘, 이 시간일 이유가 있었나.

정말 재수도 없다.

나는 무전기를 꺼냈다.

“거기는 어떻게 되고 있어?”

[문제없이 잘되고 있어요. 그쪽은요?]

“음, 여긴 아무런 문제도 없어.”

정호산과 도채희가 너희가 있는 건물로 접근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않겠냐?

‘그랬다간 다 때려치우고 저를 만나러 올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서현과 김재호가 침투한 건 각범부 건물의 정면 쪽이다. 이곳은 완전히 반대쪽이었으니 잘만 하면 정호산과 도채희가 이곳에 왔다는 걸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일단 밝히는 건, 쑤어하오주 구출 작전이 모두 끝났을 때입니다.’

아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빌어먹을.”

차송진이 사라졌다.

[예? 무슨 일이에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보스가 그렇게 말할 때는 무조건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이래서 눈치 빠른 어린애란!

“합류 지점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인데요?]

“반지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지?”

[보스.]

“이따 보자.”

나는 재빨리 통신을 끊었다.

━내가 봤을 때 넌 어떻게 하면 한서현을 열받게 만들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 같아.

“그럼 솔직하게 말합니까? 차송진한테서 한눈팔다가 놓쳐 버렸다고요?”

나는 투덜거리면서 비탈길 아래로 내려왔다.

━능력을 써서 도망간 건 아니냐?

“아니요, 그러진 않았을 겁니다.”

능력을 써서 도망가 봤자 도착할 곳은 우리 기지니까.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언덕에는 차송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얼마 전에 눈이 내린 것이 차송진에게는 악수가 되었다.

“이렇게 발자국을 다 남기면서 도망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답니까.”

차송진의 행동에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우리가 싫어도 그렇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망을 가다니.

━어쩔 거냐.

“차송진을 잡으러 가야죠.”

차송진은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 애초에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라 너무 정보를 퍼 준 것도 있고…….

차송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 그는 적절한 조치 없이는 도저히 놔줄 수가 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네 친구는?

“흠.”

나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최대한 애들이 일을 빨리 끝내고 나오길 바라야죠.”

* * *

“허억, 허억.”

차송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정신없이 뛰었다.

여기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자신이 본 벨츠머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악당들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래 봤자 수틀리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놈들이었다.

언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리해 버릴지 몰랐다.

‘그 사람들을 믿을 순 없어.’

이곳은 각범부. 제아무리 벨츠머츠라고 해도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순 없을 거다. ……아마도.

‘다시는 빌런들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아.’

벨츠머츠 기지에서의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전에 탑에서 지냈던 것에 비하면 천국 같은 그 생활에 저도 모르게 ‘이거 괜찮을지도’라는 생각이 든다는 게!

어쩌면 그게 벨츠머츠가 꾸민 계략이 아닐까.

이렇게 시나브로 같은 편이 되길 원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정이 들게 만든 다음에는 끔찍한 일을 시키겠지.

그때쯤 되면 이 세상 누구도 차송진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다.

‘너도 똑같은 놈이잖아! 거기에서 잘 먹고 잘살아 놓고 인제 와서 너는 그놈들하고 다르다고? 거짓말이지!’

그런 말을 할 게 분명했다.

벨츠머츠의 리더는 자신을 언젠가 놓아주겠다고 말했지만, 차송진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벨츠머츠다.

‘최근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의심스러워. 나를 외국에 팔아먹으려는 거 아니야?’

게다가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순순히 풀어 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외국 노예로 팔리거나, 아니면 세뇌당해 벨츠머츠가 되거나, 아니면 어느 순간 소리 소문도 없이 묻혀 버리거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신의 미래는 그 세 가지뿐이었고 차송진은 그 세 가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도망이다.

‘일단 안전한 곳까지 도망가자.’

얼굴도 바꾸었으니, 탑의 빌런들이 자신을 알아볼 일도 없지 않을까.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잠시만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차송진은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 * *

막 각범부의 건물 뒷문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정호산은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지금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이상한 소리라면?”

정호산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마력을 올려 청각을 강화하자 그 소리는 조금 더 정확하게 들렸다. 누군가 불안하게 숨을 몰아 내쉬며, 전속력으로 무언가에게서 도망치는 소리.

“이곳 근처에 행인은 전혀 없다고 했죠?”

“예. 아무래도 각범부 건물 자체가 민간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정호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찜찜함을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이 아니면 벨츠머츠의 증인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정말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정호산은 잠시간의 망설임을 멈추고 손잡이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일단은 확인하고 오는 게 좋겠습니다.”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산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도채희를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발자국을 발견한 순간, 정호산은 속도를 올렸다.

“거기, 잠시만요.”

정호산이 그렇게 말을 걸자 남자는 깜짝 놀랐다. 30대로 보이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고 계신 겁니까?”

정호산의 질문에 남자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듯.

그때, 뒤에서 등장한 도채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저건 벨츠머츠 리더가 썼던 다섯 번째 가짜 얼굴!”

차송진에게 닥친 불행은, 하필이면 거기에서 마주친 사람이 한때 벨츠머츠를 집요하게 쫓았던 도채희 경위였다는 거였다.

* * *

그리고 세 사람의 만남을 실시간으로 본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시선에서 세 사람을 놓쳤을 뿐인데, 어째서 저 셋이 저러고 있는 거냐고.

‘이 세상은 저를 미워하는 게 분명합니다.’

━하긴 네놈의 불행은 진짜 온 세계의 미움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하긴 하지.

‘좀 아니라고 해 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이럴 때도 내 속을 뒤집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는.

쯧, 하고 혀를 찬 레이가 물었다.

━어쩔 셈이냐.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죠.’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정호산과 도채희, 차송진 사이에 거대한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 * *

쑤어하오주는 방 안에 누워 눈을 굴렸다. 하루에 세 시간, 송천길이라는 남자에게 잡혀 있는 시간도 싫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내는 나머지 시간은 정말이지 따분했다.

‘언제 풀어 주는 건데.’

벨츠머츠가 정말로 대단한 악당이긴 한 모양인지, 남자는 끝까지 협조를 하지 않는 쑤어하오주를 매일같이 괴롭히고 있었다. 원하는 대답을 얻기 전까지는 평생 그녀를 놔줄 것 같지 않은 그의 태도에 쑤어하오주도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차라리 추방이나 해 줬으면 좋겠는데.’

협조하지 않으면 추방하겠다고 그녀를 협박해 놓고서는, 막상 그녀가 입을 다물자 그녀를 추방하기는커녕 이 좁은 방 안에 가둬 두었다. 어디로 빠져나갈 새도 없이.

쑤어하오주는 일단 참기로 했다.

겨우 들어온 한국에서 사고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데서나 사고를 치면 안 된다는 건 파파가 알려 주었다. 보는 사람이 많을 때는 능력을 쓰지 않는 게 좋다고 배웠다.

정 능력을 쓰고 싶거든, 목격자가 남지 않게 확실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그럴 수 있나?’

신과의 거래를 멈춘 이후부터, 그녀의 몸에서 넘치던 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예전처럼 주먹을 조금 휘둘러 건물 하나를 지워 버린다든가, 거슬리는 것들은 한 번에 짓이겨 버린다든가 하는 짓은 불가능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신과 다시 거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눈앞에 떠오르는 건 여우처럼 눈을 접어 웃던 그 남자였다. 혹여나 그 남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잊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쑤어하오주는 늘 신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

‘어쩐다.’

어찌해야 하나.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일에 쑤어하오주는 침상에 누워 뒹굴뒹굴 몸을 굴렸다.

어쩌면 하루쯤은, 딱 하루쯤은 신에게 넘겨도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그녀의 앞에 쪽지가 하나 떨어졌다.

예쁘게 접혀 있는 쪽지에 쑤어하오주는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어디에서 날아온 쪽지람? 그녀는 조심스레 쪽지를 폈다.

「오랜만이야.」

그 쪽지 안에 적혀 있는 글을 본 쑤어하오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쪽지를 쥔 쑤어하오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겨우 손바닥만 한 작은 쪽지에는 그 어떤 표시도 없었다. 하지만 쑤어하오주는 이 필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수백, 수천 번 읽어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문장의 필체와 똑같았다.

“션!”

쑤어하오주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쑤어하오주는 쪽지가 떨어진 천장을 살폈다. 빈틈을 뚫고 흘러나온 검은 모래가 그녀의 발치에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래 뭉치 사이에서 검은 뱁새가 튀어나왔다. 뱁새를 본 쑤어하오주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션, 당신이야?]

새는 마치 따라오라는 듯 그녀를 향해 날갯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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