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53화 (153/352)

제153화

#49 내가 뿌린 씨 (3)

“지금 각범부는 설록진의 지배 아래에 있잖아. 설록진이라면 얼마든지 그 안으로 들어가서 쑤어하오주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내가 아는 설록진이라면, 분명 직접 쑤어하오주를 만나러 갈 거다.

테러 작전까지 실패한 이상, 벨츠머츠의 발목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것보다 확실하게 분위기를 반전시킬 만한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걸 위해서는 벨츠머츠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데, 따-단. 마침 벨츠머츠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다는 소녀가 등장했네? 게다가 뭐? 그 소녀의 아버지를 벨츠머츠 그 10새끼들이 죽였다고?

“단지 세뇌로 정보만 터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쑤어하오주를 세뇌해서 벨츠머츠에 대한 나쁜 여론을 만들 수도 있을 거야.”

쑤어하오주를 세뇌해 ‘그놈들이 내 파파를 잔인하게 죽였어요’라는 인터뷰라도 하게 시킨다면, 벨츠머츠의 이미지는 끝장이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 신분도 지키고, 우리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으음, 네가 들으면 아주 싫어할 만한 생각?”

내 말에 한서현이 앉은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싫어요! 하지 마세요! 그만두라고요! 무슨 생각을 하든 없던 걸로 해요.”

“일단, 들어 보기라도 해 봐.”

한서현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할지 뻔해서 그렇죠.”

“아, 속고만 살았나.”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음, 아쉽게도 내 양심이라는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서.”

━대충 네 가슴 왼쪽에 있을 테니까 그쪽에 손을 얹으면 된다.

‘젠장, 쓸데없이 협조적이긴.’

나는 대충 왼쪽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쑤어하오주를 구하러 가는 게 좋겠어. 좋아,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봤는데도 같은 결론이야.”

“방금 양심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어렵다고 했으면서!”

“음, 양심이랑 극적인 타협에 성공했거든.”

내 말에 한서현은 주먹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했다. 나쁜 악령에 몸을 지배당한 상태가 아니라면, 극한의 분노가 한서현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숨을 쉭쉭 내쉰 한서현이 내 얼굴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누가 누굴 구해요! 지금 그 사람이 한국까지 온 건 보스를 죽여 버리기 위해서거든요?”

“뭐, 얼굴을 마주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뭐가 됐든! 그쪽과 원수를 진 우리가 왜 그쪽을 구해야 하는데요?”

그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이었다.

“쑤어하오주가 설록진에게 전부 다 불어 버리면 곤란한 건 나잖아. 그래서 도와주려고 하는 것뿐이야. 절대 쑤어하오주가 설록진에게 세뇌당해서 인생이 망가지면 어떡하나 걱정되는 게 아니라니까.”

“대체…….”

한숨을 푹 내쉰 한서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말에 격렬하게 반박하고 싶지만, 반박할 수 없기에 나오는 행위 예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해서 살려 뒀는데, 그렇게 되면 또 마음이 안 좋기도 하고…….”

“아, 진짜!”

한서현은 내 머리를 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만 더 입을 놀리면 저 주먹이 내 머리로 날아들겠지. 나는 재빨리 입을 닫았다.

“굳이 우리가 구할 이유가 있냐고요. 그 여자, 엄청 강하잖아요. 위험해지면 자기가 알아서 나오지 않을까요?”

“그거야, 예전의 일이지. 지금은 상당히 약할걸. 게다가 지금 쑤어하오주가 있는 곳은 각범부잖아? 각성자라는 걸 알게 되면 바로 구금할 거라고.”

예전의 쑤어하오주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더는 시스템과 ‘거래’하지 않는 이상 쑤어하오주는 기껏해야 6성급 정도 되려나.

계획을 잘 세우고 빈틈을 노린다면 각범부 안에서 빠져나오는 게 어렵지 않을 테지만, 아무래도 깽판을 치기에는 많이 약하다.

‘정 열이 받으면 거래를 하는 한이 있어도 나올 테지만…….’

문제는 그 전에 설록진이 쑤어하오주를 만나러 갈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 사람을 데리고 나와야 해.”

“으으. 정말 죽어도 싫지만 어쩔 수 없죠.”

한서현은 그렇게 말하며 우울한 얼굴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가장 큰 산을 넘은 나는 김재호와 차송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차송진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왜, 왜 저를 보시는지?”

제삼자처럼 멀찍이 우리와 거리를 벌리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그쪽도 같이 가야 해.”

“예에? 저요?”

“그럼, 여기에 혼자 두고 갈 줄 알았어?”

한서현은 물론이고 김재호, 나까지 모두 나가야 하는 작전이다. 차송진을 여기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지. 맨날 여기에서 도망칠 생각이나 하니까.

“저, 절대 안 도망칠 건데요.”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차송진은 내 단호한 말에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흥, 누가 저런다고 불쌍하게 여길 줄 아나.

단호한 내 태도에 여기에 남는 걸 포기한 듯, 차송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묻는다는 게 이거다.

“그, 그러니까 그 여자애를 죽이러 가는 게 아니라, 구하러 가는 거죠?”

“내가 왜 쑤어하오주를 죽여?”

“그, 그야 그쪽이, 그 여자애 아버지를 죽였다니까…….”

차송진의 말에 나는 혀를 찼다.

“죽일 만한 놈이어서 죽인 거야.”

내 발언에 차송진의 얼굴이 다시 파랗게 됐다. 아차차, 이거야 원 또 정호산과의 대화를 반복할 뻔했군.

“그놈은 자기 딸을 자기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써먹으려고 했다고.”

“그, 그래요?”

“그래.”

다시 생각해도 그 개X끼를 죽인 것에 후회는 없다. 평생 쑤어하오주가 나를 원망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쪽이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이 만만하다는 거죠.”

한서현은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썼다.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거지 같은 아버지라도 사랑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러지 말랬는데!”

한서현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복수라도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나는 알았으니까.

나는 그녀에게서 복수라는 목표를 빼앗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로 죽어 줄 순 없으니, 전심전력으로 쑤어하오주를 피할 테지만.

차송진은 영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구하러 간다고요?”

“엉.”

내 대답에 김재호가 물었다.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돼?”

“안 돼!”

나는 김재호의 머리를 툭 쳤다. 애가 이상한 물만 들어서는!

내 말을 들은 레이가 말했다.

━쟤는 물이 든 게 아니라, 그냥 그거다.

‘우리 애 상처 주지 마세요, 고소합니다.’

━고소는 무슨!

어쨌거나 그렇게 우리의 쑤어하오주 구출 대작전은 시작되었다.

* * *

한서현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왔지만, 여전히 열이 받았다.

보스를 죽이러 온 여자를 구하러 가야 하다니.

왜 저 여자를 그렇게 신경 쓰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전부터 정이 많은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살려 줘 봤자, 나중에 보스를 죽이겠다고 올 사람이잖아.’

설록진이 올 수도 있으니 여기에서 저 여자를 빼돌려야 한다는 데에는 동감했지만, 저 여자를 정말 살려 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감이 들었다.

‘슬쩍 죽여 버릴까.’

이젠 전처럼 강하지 않다고 했으니, 자신만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구하려던 중에 사고가 생겨서 실수로 죽어 버렸다’라는 시나리오는 어떻지?

하지만 만약 보스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한서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옆에 있는 김재호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벨츠머츠는 두 개의 조로 나뉘어 있었다.

각범부 건물 안으로 진입해 쑤어하오주를 빼돌리는 일을 할 ‘작전부’, 그리고 후방에서 작전부를 보조, 아니, 사실상 농땡이를 피울 ‘대기조’.

작전부에는 한서현과 김재호가. 후방 대기조에는 강이신과 차송진이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모든 계획을 짜 두었기에, 사실상 대기조에서 할 일은 차송진 감시밖에 없었다.

한서현은 모래를 통해 흘러들어 오는 정보를 확인했다.

“흐음.”

“가도 돼?”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 자리에서 김재호가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김재호의 모습을 보며 한서현은 정신을 집중했다.

쑤어하오주가 갇혀 있는 곳은 각범부 건물 안에 있는 수면실이었다.

쑤어하오주의 나이를 고려해서인지, 취조가 진행되는 시간은 하루에 세 시간 정도뿐이었다.

나머지 시간 동안 쑤어하오주는 미리 마련된 각범부의 수면실에서 편히 쉬었다. 갇혀 있는 그녀를 배려해서인지, 수면실에는 TV와 책 같은 것들을 놓아두었지만 쑤어하오주는 그 어느 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했다.

‘복수를 위해서겠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한서현은 가볍게 혀를 찼다. 한서현은 자신이 푼 모래를 조종했다. 환풍구를 타고 안으로 스며 들어간 검은 모래가 벽에 달려 있는 CCTV에 달라붙어 화면을 가렸다.

그사이 그림자로 침투한 김재호는 그대로 보안실로 들어갔다. 보안실에 있던 사람들이 김재호의 등장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김재호는 정확한 주먹질로 보안실에 있는 사람을 기절시켰다. 미리 허리춤에 준비해 둔 케이블타이로 기절한 사람들의 손발을 묶으며 김재호가 입을 열었다.

“보안실, 침투했다.”

[응, 안 죽였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보스의 목소리에 김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말로 해야지.]

“아.”

[됐어, 대충 거기에 보이는 거 아무거나 깨부수고 나와.]

“응.”

보스의 말대로 김재호는 안에 있는 걸 대충 주먹으로 두드렸다. 연약한 기계들은 금세 부서졌다. 연기가 나는 기계들을 뒤로하고 김재호가 물었다.

“이제 뭘 하면 돼?”

[내가 안내하는 곳으로 이동해.]

한서현의 말에 김재호는 다시 한번 그림자 사이로 몸을 감췄다.

* * *

“좋아, 순조롭군.”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서현과 김재호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쑤어하오주의 구출 작전은 무사히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완벽한 정보력과 완벽한 은신 사기캐가 있는 이상, 작전이 실패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지. 그렇고말고.

어디로 도망갈까 봐 무서워서 데리고 온 차송진도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인 건지 순종적이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네 말대로 각범부의 보안은 형편없는 수준이구나.

‘각범부로 가는 예산을 여기저기 빼돌리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처럼 허술한 건, 사실상 쓸 만한 인원은 전부 탑의 빌런 쪽으로 차출당한 탓일 겁니다. 게다가 오늘은 빌런들의 공개 취조가 있는 날이라서요.’

간부며, 경찰이며.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지. 괜히 우리가 오늘을 실행일로 잡은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라면, 각범부의 상태가 어떻든 무사히 뚫어낼 수 있었을 것도 같지만요.’

━그래, 네 애들 잘났다.

‘그럼요. 흐흐, 내가 참 잘 키웠지.’

덕분에 나는 이 안전한 곳에서 가만히 궁둥이나 붙이고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내 눈앞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 보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한가롭게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멀리 각범부 건물 뒤쪽에 선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눈에 마력을 모으고 나서야 확인한 두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입을 쩌억 벌렸다.

정호산과 도채희.

도대체 저 두 사람이 여기에는 무슨 일인데?

* * *

“이곳에 벨츠머츠에 대해 잘 아는 여자애가 있다고 했죠.”

“예, 비협조적이라서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요.”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제가 만나 봐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그 여자애가 여기에 갇혀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에요. 그러니 저희가 잠깐 만나는 것쯤은 별문제가 안 될 거예요.”

오늘 두 사람에게 귀띔해 준 건, 김용원이었다. 탑의 빌런들을 취조하기 위해 간부들이 마침 오늘 모두 자리를 비운다나.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그 여자애를 만날 기회가 올지 모른다.

“문제는 그 여자애가 전혀 협조적이지 않다는 거죠.”

“그래도 진심으로 부탁하면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원래대로라면 법을 어기는 일이라면 질색을 하던 정호산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만큼 벨츠머츠에 대한 정보가 간절하다는 거겠지.

‘무엇 때문인지는 아직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말해 주겠지. 도채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가 보자고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