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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51화 (151/352)

제151화

#49 내가 뿌린 씨 (1)

앞으로 협력하기로 한 만큼, 나는 남주현에게도 같은 휴대폰을 넘겼다.

언데드 새가 휴대폰을 물고 오는 광경을 목격한 남주현이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긴 했다던데, 다행히 휴대폰을 집어 던지지는 않았단다.

어쨌거나 휴대폰을 받은 남주현에게 나는 간단하게 문자로 상황을 설명했다.

전화를 거는 것만 금지됐을 뿐, 이쪽으로 문자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문자를 남겨 두라고도 말했다.

한서현에게 말해 그쪽을 감시해 두라고는 했지만, 게이트에 들어가거나 해외로 나가면 즉각적인 반응이 힘드니 말이다.

문자를 나누며 남주현 기자의 근황도 들을 수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시리우스 백화점 테러 사태를 조사하는 중이라나. 이번 일로 인한 여러 가지 여파까지 다룰 예정이라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됐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그쪽에 넘겼다. 이번 일의 배후에 설록진이 있다는 것까지는 밝히지 못하더라도 탑의 빌런들이 ‘그냥’ 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의혹 하나 정도면 충분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은 대충 뭉갰다. 아무리 남주현이라고 하더라도 인질을 구출한 게 나라는 건 비밀로 해 두고 싶어서 말이지.

━왜냐. 이미지를 좋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야?

“그야, 설록진이 내가 자기 일을 훼방 놨다는 걸 몰랐으면 하거든요. 탑의 빌런들을 적으로 돌리기도 싫고.”

가뜩이나 설록진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황인데, 탑의 빌런들까지 적으로 돌려 봐라.

남주현은 믿을 만하지만,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

나는 남주현을 응원하며 대화를 종료했다.

문제는…….

“후우.”

한숨을 내쉰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호산에게 연락해야 할 때다.

시간을 끄는 것도 이제 그만해야지.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바로 정호산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벨이 울리기도 전에 곧바로 정호산과 전화가 이어졌다.

[너!]

“아, 안녕하냐.”

[안녕하겠어?]

“어, 난 아주 안녕히 잘 있다.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게 할 말이냐.]

내가 몇 번이고 안전하다고 말했음에도 정호산은 내 말을 못 믿는 기색이었다. 하긴 그런 꼴로 끌려갔으니까 의심을 할 만도 하지.

그래도 그동안 보냈던 쪽지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니, 충격인걸.

[너 벨츠머츠랑 대체 무슨 사이야.]

갑자기 훅 찌르고 들어오는 그 말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젠장, 이렇게 정곡을 찌르기 있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때 널 데리고 갔던 사람, 벨츠머츠였잖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잡아떼 봤지만, 역시 전혀 소용이 없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정호산은 모든 걸 다 알아차렸다.

이게 다 김재호의 얼굴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가면을 늘 쓰고 다녀야 하는데! 괜히 내가 가면에 집착하는 게 아니다. 이게 무슨 마법소녀물도 아니고, 대충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는 것만으로는 전혀 신분 보호가 되지 않는단 말이다.

어쨌거나 들켜 버렸군.

이 상황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 상황에 대한 적당한 답변은 전화를 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 찾지 못했다.

일단은…….

“그래서, 뭐.”

뻔뻔하게 가자!

[너 대체…….]

내 뻔뻔한 반응에 정호산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어쩌라고! 괜한 발뺌은 이 녀석을 더더욱 자극할 뿐이다. 오늘의 작전은 적반하장도 유분수, 방귀 뀐 놈이 성낸다, 후안무치다.

말로는 이길 수 없다면, 정신 공격으로 가는 거다.

━이게 맞냐?

‘어쩔 수 없잖습니까.’

일단은 정신 공격으로 대략 머릿속을 멍하게 만든 다음에 얼렁뚱땅 넘어가는 수밖에.

나도 원래 이렇게 사는 사람이 아니지만, 물러설 수 없는 문제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여기에서 진지하게 나오면 더 문제라고.

[벨츠머츠가 어떤 녀석인 줄은 알고 거기에 있는 거야? 아니, 애초에 네가 대체 왜 그놈들이랑 움직이고 있는 건데. 대체 무슨 말로 널 꼬셨길래…….]

하지만 정호산은 육체 강화계답게 금세 멍해진 정신을 복구했다. 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헛웃음이 나올 만한 말이다. 꼬시긴 누가 날 꼬셔.

죽어도 내가 벨츠머츠를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는구나. 하긴, 게이트 채굴 일이나 하던 사람이 갑자기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빌런들의 수장이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판타지 소설 같은 일이긴 하군.

“그, 세상에 많은 오해가 있어서 그렇지 벨츠머츠 그 사람들, 생각보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뭐? 너 벨츠머츠가 최근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알아?]

음, 내가 최근에 뭘 했더라.

━음, 참고로 가장 최근에 벨츠머츠가 저질렀다고 보도된 건으로는 김성득 의원을 갈가리 찢어 놓은 건이 있었단다.

레이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확실히 ‘그리 나쁜 놈들이 아니야’라고 말할 타이밍이 아니긴 했네.

“뭐, 그런 사소한 일은 넘어가자고.”

[사소한 일이라니! 너 진짜 거기에 있다 보니 나쁜 물이 잔뜩 들었네.]

나쁜 물이 잔뜩 들었다니. ‘꼭 우리 애가 나쁜 게 아니라 나쁜 친구를 만나 물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극성 부모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 그 말이 나오는 때가 그렇듯,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렇듯.

“나쁜 물이 든 게 아니야. 내가 나쁜 거지.”

이 모든 일에 대한 원인은 모두 나다.

정호산은 나와 벨츠머츠를 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벨츠머츠고, 벨츠머츠가 나니까.

[하아, 이신아. 그놈들을 자경단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 아니야. 너도 이 사실을 알면 생각이 바뀔걸.]

“무슨 말을 들어도 내 생각은 바뀔 리 없다니까 그러네.”

[최근 중국에서 벨츠머츠한테 아버지를 잃었다는 여자애가 입국했어.]

“으응?”

[네가 그렇게 따르는 벨츠머츠는 겨우 열몇 살 된 여자애의 아버지를 죽이고 한국으로 도망 온 끔찍한 범죄자라고!]

그 말에 나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에?”

당황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정호산이 말을 쏟아 내었다.

[여태까지 보였던 모습은 전부 가식일 게 분명해. 겨우 열 살이 조금 넘은 어린애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애를 그냥 내팽개친 놈이야. 그게 바로 네가 그렇게 따르는 벨츠머츠의 진짜 모습이라고!]

아니, 듣다 보니 이거 너무하다. 누굴 그렇게 쓰레기로 만드는 거야!

“어쩌면 그 애 아버지가 죽는 게 나은 나쁜 놈이었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적막한 침묵이 수화기에 흘렀다.

[뭐?]

실수했다.

[야! 강이신!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빌런들이랑 지내더니!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뭐어? 죽는 게 나은 나쁜 놈?]

“미안, 어, 신호가……. 어, 말이 잘 안 들리네?”

나는 전화를 끊고 얼굴을 구겼다.

X 됐다.

아, 너무 당황해 버려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잖아.

하지만 당장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쑤어하오주가 한국까지 날 찾으러 왔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 *

입국 심사관, 김영의는 빼꼼 카운터에 고개를 내민 소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둥그렇게 생긴 얼굴에 동그란 눈동자.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깜찍하게 생긴 소녀였다. 키는 꽤 컸지만, 이목구비가 둥글어서 그런지 앳된 느낌이 들었다.

매번 반복되는 업무가 즐거울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녀는 깊숙한 곳에 가라앉은 친절을 억지로 꺼내고는 했다.

“여권 주세요.”

그 말에 소녀는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에서 여권을 꺼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새것인지 여권은 아주 깔끔했다.

국적은 중국, 이름은 쑤어하오주. 나이는 올해 열넷. 한국 방문은 물론이고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다.

김영의는 소녀의 뒤를 살폈지만,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 왔어요?”

그 말에 쑤어하오주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쑤어하오주를 보며 김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한국말을 못 하는 입국자는 흔했으니까.

“한국에는 왜 왔어요?”

대표적인 입국 심사 질문이다. 여기에도 대답을 못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눈앞의 소녀는 미리 준비해 왔는지 또박또박 자신이 한국에 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 살인범, 찾으러.”

문제는 그 이유가 영 이상하다는 거였다.

“음, 뭐라고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까. 지금 살인범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김영의의 말에 쑤어하오주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아빠의 살인범. 찾으러 왔다.”

어색한 억양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허.”

그리고 그 말에 김영의는 말을 잃어버렸다. 무슨 일이냐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는 소녀의 얼굴에 김영의는 땀만 주룩주룩 흘렸다.

“아빠의 살인범이라는 사람이 대체…….”

“벨츠머츠.”

그리고 그 이름에 김영의는 눈을 번쩍 떴다.

“벨츠머츠, 한국에. 맞지?”

그 이름에 김영의는 이 일이 자신의 손에서 넘길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입국 심사관은 곧바로 공항과 연계된 경찰 쪽으로 여자아이를 넘겼다.

쑤어하오주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녀가 꺼낸 이름이 주는 파급력은 대단했다.

하필이면 벨츠머츠를 잡기 위해 전국의 경찰들이 눈을 뒤집고 있는 상황에서 등장한, 벨츠머츠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 소녀.

‘어쩌면 벨츠머츠를 잡을 수 있을지도.’

그녀의 앞에 앉은 수염이 부숭부숭한 남자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 꼬마야. 내 이름은 송천길. 각범부의 2팀 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에요.”

* * *

쑤어하오주가 입국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나는 일단 그 사실을 숨겼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한서현의 잔소리를 피하고 싶다는 게 제일 컸다.

쿵쿵쿵. 화난 얼굴로 다가온 한서현이 스마트폰을 보여 주기 전까지는, 내 작전은 아주 잘 진행되는 중이었다.

“으응?”

[속보]라는 글자를 본 나는 천천히 그 뒤를 읽어 내려갔다. 기사를 모두 확인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까지 났다니, 이거 이래서야 빼도 박도 못하겠네.’

하필이면 현직 국회의원 피살 사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놨던 탓에, 벨츠머츠는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벨츠머츠의 ‘피해자’라니.

뉴스에서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

하, 이래서야. 기사를 확인한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하, 14살 소녀라니. 그렇게 보여도 꽤 나이가 들어 있을 텐데, 이렇게만 보면 내가 아주 개자식으로 보이잖아?”

“내가 뭐랬어요!”

내 농담도 분위기를 반전시킬 순 없었다. 야차처럼 내게 달려드는 한서현을 본 나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 글쎄. 그때 뭐랬더라.”

“굳이 왜 원수를 만드냐고 했잖아요! 왜!”

한서현의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 조신하게 앉았다. 이럴 때는 냅다 미안하다고 하는 게 최선이다.

“미안하다. 설마하니 정말 날 찾아 한국까지 올 줄은 몰랐지! 이게 또 이렇게 기사가 날 줄도 몰랐고. 으응? 아직 사실관계 확인도 안 됐는데, 이렇게 기사부터 터트리고. 우리나라 언론은 이게 문제야, 안 그래?”

오더라도 밀입국으로 몰래 올 줄 알았지, 당당하게 비행기를 타고 입국 심사대에서 자기 아빠 죽인 원수를 찾으러 왔다고 말할 줄 알았나.

이건 나도 피해자다.

음, 그렇고말고.

“그게 말이에요?”

━조신하게 무릎만 꿇으면 뭐 하냐! 주둥이는 방만하기가 짝이 없는데.

레이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젠장, 내가 또 실수를? 감히 내가 또?

무어라고 말하든, 이건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잘못은 이미 저질러 버렸고, 이제는 수습해야 할 때다.

그때 김재호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걔까지 그때 죽여야 했는데.”

“히익!”

그 말을 들은 차송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고는 슬쩍 김재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근래 겨우 우리를 편하게 인식하게 된 것 같았는데, 말짱 도루묵이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하, 일이 이렇게 됐지만, 어떻게든 될 거야.”

“하아, 어떻게든 될 거긴요. 대체 어떻게 할 셈인데요?”

“그거야, 일단 정보부터 알아봐야지.”

나는 한서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쑤어하오주는 어디에 있는데?”

한서현이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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