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48 벨츠머츠로 사는 법 (4)
“재능을 써 봐.”
내 말에 김재호는 잠자코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림자 속에 일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겠지만, 그림자를 그렇게 살피는 사람은 보통 없지.
가뜩이나 기척을 숨기는 데에 도가 튼 녀석이 그림자 사이를 오가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신출귀몰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누군가를 감시하는 데도, 암살하는 데에도 최적의 능력이야.’
그래서 과거에 김재호는 이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설록진의 정적들을 차근차근 제거했다.
세뇌를 당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선가. 과거보다도 그림자에 녹아드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약점은 여전히 존재했다.
들어갈 때는 모르겠으나, 그림자에서 나올 때 김재호의 몸은 아무런 방어 없이 노출되었다.
그 점을 살핀 나는 김재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시 해 봐. 이번에는 내가 손짓할 때 밖으로 나와야 해.”
그림자 속에 완전히 녹아든 김재호가 내 손짓에 튀어나왔다.
지금.
나는 주변에 있는 눈을 뭉쳐 김재호에게 던졌다.
김재호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지만, 내가 던진 눈덩이는 그대로 김재호의 머리를 두드렸다.
“윽.”
“이때가 네 빈틈이야.”
“빈틈?”
“그래. 이때, 어땠어? 눈을 피할 수 있었어?”
“아니. 뻔히 보이는 데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
“응, 그러니 이때 공격을 당하면 넌 당할 수밖에 없는 거야.”
이 빈틈을 줄일 수만 있다면 더욱 완벽해질 거다.
방법은…….
“이 빈틈을 없앨 수 있을 때까지 해 보자고.”
하다 보면 될 거야, 하다 보면.
━너도 모르는 거냐.
‘제가 그림자를 다루는 걸 어떻게 압니까?’
나도 체험해 보려고 해도 4획 이상인지, 아예 내 몸에 깔린 회로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방법도 모르면서 어떻게든 하라는 상사가 최악인데 말이지.
‘그래도 옆에서 계속 도와주기는 하잖습니까.’
나는 열심히 눈덩이를 뭉쳐서 던졌다. 김재호가 나를 노려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불만이 가득 묻어나는 김재호의 얼굴을 본 나는 이를 꽉 물고 웃음을 참았다.
‘생각보다 재밌네요.’
━뭐가? 저 녀석을 두들겨 패는 거?
‘아니요, 누군가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거요.’
이렇게 계속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없어지겠지.
글쎄, 그때가 오면…….
나는 눈덩이를 뭉쳐 날리며 소리쳤다.
“느려!”
아직은 멀었으니, 그건 나중에 생각할까.
* * *
그렇게 훈련과 교육을 병행한 지 며칠.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와라, 네가 부탁했던 거 다 만들어 뒀으니까.]
사랑스러운 엔지니어님의 호출이었다.
연락을 받은 나는 곧바로 금 박사의 집으로 향했다. 금 박사의 거실에는 박스가 잔뜩 놓여 있었다.
“뭘 많이 만든 모양이네요.”
“아, 자금은 알아서 내 쪽에서 미리 땡겨 썼다. 걱정하지 마. 아직 네 몫은 많이 남았으니까. 진짜 주식이 대박이 났거든.”
그야, 대박이 날 수밖에.
현무 제약의 주식은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30%인가, 40%가 날아갔다던가. 누군가는 돈을 잃을 때 누군가는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니. 주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현무 제약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회장이었던 김성득 의원의 아들도 구속 상태로 조사를 받는 상황이고 관련자 수십 명이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니까. 워낙 크게 사건화됐던 터라, 국민의 관심이 식었다고 전처럼 흐지부지 넘어갈 순 없겠지.
하지만 이 모든 일에도 현무 제약은 망하지 않을 거다.
“바닥까지 떨어지면 몇 주 주워 놔요.”
“왜?”
“결국 주가는 복구될 테니까요. 전처럼은 아니겠지만, 오르긴 오를 테죠.”
더는 전처럼 인체 실험을 하진 못하겠지만 이미 쌓은 데이터로 현무 제약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테니까.
동화 속 이야기처럼 나쁜 놈들이 쫄딱 망해 버리면 좋겠으나, 세상은 그리 편히 돌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현무 제약이 아예 망해 버려도 문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제약 회사긴 했으니까.
그래도 더는 그 김씨 일가가 숟가락을 얹진 못하겠지. 그걸로 족했다.
금 박사가 상자에서 제일 먼저 꺼낸 건, 나에게 그토록 만들고 싶다고 말했던 가면이었다.
━야무지게도 만들었군.
나란히 놓인 세 개의 가면을 보며 나는 착잡함을 애써 삼켰다. 이렇게 된 거 정말로 가면 트리오로 가야겠군. 슬쩍 머리에 차송진의 얼굴이 스쳤지만, 차송진은 정식 벨츠머츠 소속도 아니고 언젠가 헤어져야 할 사람이니 차송진의 몫을 챙겨 줄 필요까지는 없겠지.
그나저나 이 가면들 말이다. 조금 특이했다.
“검은색이네요?”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웃는 얼굴을 그렸던 가면과는 달리,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가면은 검은색이었다. 마치 펜싱 투구를 보는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가면의 옆을 툭 건들자, 붓칠로 그린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붉은색 물감을 가득 묻힌 붓으로 문질러 그린 것처럼 질감이 생생했다. 붓칠 텍스처는 나쁘지 않다만, 색깔이 문제다.
“레드잖아요, 이거.”
“리더는 레드지.”
이 인간, 결국 색깔을 넣어 버렸잖아. 거기에 레드라니. 색이 뜻하는 의미가 뻔했다.
“당장 평범한 색으로 돌려놔요.”
“레드 정도면 평범하지! 무지개색도 아니고.”
“무지 개 같긴 한데요, 지금.”
“헉! 그런 심한 말을!”
금 박사는 상처받은 순정 만화 속 주인공처럼 뺨을 감싸 쥔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금 박사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내가 경악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금 박사가 주섬주섬 다시 일어났다.
저럴 거면서 왜 약한 척을 하는지.
“……설마 다른 가면에도 색을 넣은 건 아니죠?”
“아, 안 되나?”
“같은 색으로 통일해 줘요!”
색색의 가면이라니! 누가 봐도 파워레X저 짝퉁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고! 게다가 그쪽은 히어로 집단 아니냐! 빌런인 우리가 그쪽을 벤치마킹해서 어쩌라고!
“쳇.”
내 말에 혀를 찬 금 박사는 가면의 색을 모두 초록색으로 통일해 주었다. 그나저나 초록색이라. 형광 초록이 아니라 톤이 낮은 청록색이라 검은색이랑 잘 어울리긴 했지만, 영 꺼림칙했다. 누가 봐도 독을 내뿜을 것 같은 불길한 색처럼 보인달까.
“왜 초록색입니까?”
“내가 초록색을 좋아해.”
그런 이유로 초록색을 해 놨냐고!
“그냥 무난하게 흰색으로 해 주면 안 됩니까?”
“그건 너무 멋이 없잖아. 게다가 설정할 수 있는 색이 별로 없어서 말이지. 으응? 쉽지가 않다고.”
누가 봐도 거짓말 같지만, 속아 주기로 했다. 그래, 차라리 초록색이 낫지. 독에 한 번 절여졌다 나온 것 같지만, 빨주노초파남보로 빛나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그나저나 이제 보니 표정도 조금 그렇다. 전에는 제대로 웃는 얼굴이었는데, 어째 붓칠이라 그런가. 너무 기괴하게 보인달까.
“이게 최선이었습니까?”
“귀엽지 않아?”
귀엽기는, 밤에 보면 비명을 내지를 것 같은 얼굴인데.
툭 하고 한 번 더 가면을 건드리자 웃는 입이 나타났다. 한쪽 입꼬리만 유난히 올라간 것 같은데. 일부러 이런 거겠지, 이거.
정말로 악취미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기괴한 디자인이었다.
뭐, 그래도. 확실히 한번 보면 잊을 순 없겠다.
“기능적으로 많이 추가했지. 1세대에는 없었던 인식 저하 기능에 음성 변조 기능까지. 그동안 성대를 혹사시키느라 고생했지?”
“예, 뭐.”
일부러 목소리를 깔면서 얘기하긴 했었다. 때로는 능글맞게 목소리 톤을 올려서 변주를 줬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개고생을 할 필요가 없단다.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거기에 이제는 주변의 데이터를 적당히 받아들여 가짜 얼굴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내가 만들었던 형태 변환자 가죽 가면의 상위 버전이었다. 내가 만든 것과는 달리 완벽하게 촉감까지 재현해 냈다.
기본 모드일 때의 가면을 이루고 있던 검은 입자들은, 모드에 따라 입체적으로 움직였다. 가면의 입자가 흩어져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본 내가 입을 벌렸다.
“이거는, 정말 신기하네요.”
“그렇지? 최근에 나온 기술이야. 이른바 인피니티 파티클! 이걸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무궁무진할지.”
아, 그러고 보니 낯설지 않았다. 이걸 응용해서 가방에 넣어 다니는 바이크 같은 제품들이 많이 나왔으니까. 내구도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게 밝혀져서 나중에는 모두 폐기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면 정도라면……, 확실히 쓸 만하지.
“이걸로 움직이는 피규어를 만들면, 진짜 엄청날 거 같지.”
“예에…….”
어쨌거나 이제는 촉감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이상, 가까이에서 보거나 만져 봐도 속을 지경이었다.
전에는 그저 눈속임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입자들이 자연스럽게 목과 이마의 경계선도 덮어 줄 거라고.”
확실히 써 봤을 때, 어색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 밖에도 기능이 많고 많았는데…….
“도대체 가면에 맥가이버 칼 기능은 왜 넣어 둔 겁니까?”
“혹시 모르잖아. 이 가면만 가지고 무인도나 게이트에 뚝 떨어지게 될지!”
만사가 불여튼튼이라지만, 너무 만사를 다 대비하는 거 아닌가. 금 박사가 준비해 준 가면은 3개. 각각 멤버들의 특징에 맞는 특별한 디자인이 내장되어 있었다.
내 가면에 웃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듯이, 한서현의 것에는 해골이, 김재호의 것에는 귀와 송곳니가 그려져 있었다.
해골이야 그렇다 치지만, 귀랑 송곳니는 또 뭐람. 심지어 눈도 없었다. 내 손짓에 금 박사가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 친구, 약간 야성적인 이미지잖아? 그러니까 늑대에서 이미지를 가지고 왔지.”
“눈이 없잖아요.”
“눈을 감은 늑대 콘셉트거든.”
“눈을 감은 늑대보다는 눈을 뜬 늑대가 더 낫지 않아요?”
내 말에 금 박사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내 손에서 가면을 빼앗아 간 박사가 몇 번 기계를 만지작거리더니 눈을 만들어 냈다.
“내가 괜히 눈을 없앤 게 아니라고.”
“이, 이게 뭡니까.”
“눈이 있으니까 너무 귀여워지지 않냐?”
확실히 너무 귀여웠다. 늑대라기보다는 강아지가 생각난달까. 쓸데없이 눈이 너무 초롱초롱하니까 이렇지.
“누가 이렇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만들래요?”
“알겠냐? 디자인이라는 게 그냥 그렇게 키워드 입력하면 뚝딱하고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야. 생각보다 이게 만들다 보면 내 생각하고는 다른 결과물이 나올 때가 많단 말이지.”
나는 결국 타협안을 제시했다.
“감은 눈을 그리는 건 어때요? 아예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상해서 말이죠.”
“오, 그거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몇 번 뚝딱하더니, 눈을 감은 늑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좋아, 이렇게 세 개의 가면은 끝이 났다. 차송진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내가 전에 쓰던 가면이 있으니 유사시에는 그걸 씌우면 되겠지.
금 박사가 준비한 건 가면이 끝이 아니었다.
“그건 또 뭡니까?”
“너희가 언제나 옷을 대충 입고 다니는 것도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 게다가 유니폼 같은 게 있으면 좋지 않겠냐.”
유니폼이라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라텍스 쫄쫄이를 준비한 건 아니겠지?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다행히 금 박사가 건넨 옷은 평범한 검은색 옷들이었다.
굳이 종류를 따지자면 테크 웨어에 가까운 생김새랄까. 디자인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일단 전부 다 검은색인 게 마음에 꼭 들었다.
무기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와 띠도 갖춰져 있는 데다가 전체적으로 품이 좀 있되 안에 받쳐 입는 이너웨어는 딱 달라붙어 옷 핏도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이걸 다 같이 입고 다니면 제법 괜찮을지도.
그냥 집에서 입던 옷을 입고 나갔던 지난날에 비하면 확실히. 무언가 갖춰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겉에 두르는 코트까지. 요즘 같은 추운 날씨에는 대환영이었다.
“얼어 죽어도 코트파였습니까?”
“그럼, 빌런이라는 놈들이 롱패딩 입고 뜨시게 다니고 싶냐?”
“아무래도 그건 좀…….”
그건 좀 그렇지.
“그렇게 보여도 최고급 아머리에서 산 옷을 개조한 거야.”
“개조는 왜 합니까, 그냥 주지.”
“뭐어어?”
“농담이에요.”
더 놀렸다간 금 박사 삐친다.
“기본적으로 방수, 방염인 데다가 체온 유지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고. 거기에 내구도도 얼마나 좋은지 방탄에 방검까지 가능해. 아, 물론 마력이 깃든 공격에는 무용지물이지만.”
마력을 견딜 수 없다지만, 천처럼 보이는 재질로 총알도 막을 방어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최고급 헌터 아머리에서 구매한 옷이라더니, 거의 준아티팩트급이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 비쌌겠는데요.”
“그렇지.”
이런 걸 세 벌이나 준비했단 말인가.
“고맙습니다.”
나는 순순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내 감사 인사에 미소를 지은 금 박사가 상자 깊숙한 곳에 있던 마지막 완성품을 내게 건넸다.
“그리고 여기.”
“이건…….”
“네가 그렇게 부탁했던 거.”
휴대폰이었다.
“네가 부탁한 대로 한 대를 빼고는 전부 수신 불가 기능을 넣었다만. 그래서야 휴대폰인 이유가 없지 않나.”
“일방적으로 연락하고 싶은 상대가 있어서요.”
“오, 그렇게 안 봤는데 강이신 씨 제법 나쁜 사람인가 봐?”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긋거리는 금 박사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반응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