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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46화 (146/352)

제146화

#48 벨츠머츠로 사는 법 (1)

“왜…….”

“탑의 빌런들이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예? 왜, 왜요?”

“그야, 당신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할 테니까. 알지 모르겠는데 지금 그 셋은 각범부에 체포된 상태야.”

“체포요?”

“그래, 시리우스 측 헌터의 활약으로 말이지. 하지만 그들이 가장 원망하는 건 아마도 차송진, 당신일 거야. 당신이 도망가지만 않았더라도 자신들이 잡히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할 거거든.”

강이신의 말에 차송진은 입을 떡 벌렸다.

“뭐, 뭐라고요? 나는 그저 그쪽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잖아요! 도망, 도망친 게 맞긴 하지만! 그 사람들한테 엿을 먹인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 사실을 아는 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뿐이라서 말이지.”

태연한 강이신의 말에 차송진은 경악했다. 이렇게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겠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럴 줄 알았으면, 뭐. 설마하니 거기에 계속 남을 생각이었다고 말하려던 건 아니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차송진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어깨를 으쓱인 강이신이 말했다.

“그놈들보다는 우리가 나을걸.”

“그, 그러는 그쪽도 빌런이잖습니까. 난, 나는 빌런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고요. 빌런은 최악이에요.”

아, 말해 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차송진은 눈을 굴려 주변의 눈치를 봤다. 다행이랄까. 막상 그 말을 들은 강이신의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은 빌런이다.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언제든 저 멀쩡해 보이는 가죽을 벗어던지고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악당.

“난, 나는 그냥 돌아가고 싶다고요. 그냥, 집으로 가고 싶어요. 제발, 제발 나를 돌려보내 달라고요!”

눈을 질끈 감은 차송진이 외쳤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탑이고, 벨츠머츠고 빌런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 간절한 차송진의 부탁에 강이신이 말했다.

“좋아, 알겠어. 나도 싫다는 사람 잡아 두긴 싫어.”

순간 희망이라는 단어가 차송진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을 그냥 놔줄 수는 없어.”

그러나 희망은 바로 꺾였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지! 결국 자신을 가둬 둘 생각이라는 거 아닌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지금 꼴로 내보냈다가는 금세 도로 잡힐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어차피 당신, 갈 데라고는 시리우스밖에는 없잖아?”

“예? 그야…….”

“거기보다는 여기가 나을걸?”

“장난하는 겁니까? 시리우스 길드보다 여기가 나을 리가 없잖아요!”

“24시간 감시를 받으며 갇혀 지내고 싶은 거라면, 시리우스로 돌아가도 좋고.”

“예?”

“설마하니 시리우스 길드에서 당신을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무려 탑의 빌런에게 납치까지 당했던 귀한 인재인데.”

“하아?”

“시리우스로 돌아가는 즉시 당신은 격리될 거야.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못한 채로 사방이 막힌 감옥 같은 방에 갇혀 있다가, 게이트를 공략할 때나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

“설마 시리우스에서 그런 짓을 할 리가…….”

겨우 내뱉은 그 말에 강이신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뭐, 시리우스도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런 방법이 아니라면 ‘탑’에게서 당신을 지킬 수 없을 테니까.”

꿀꺽, 차송진은 침을 삼켰다. 강이신의 표정에는 그 어떤 농담기도 보이지 않았다.

“말했잖아. 탑의 빌런들이 당신을 제1순위로 노릴 거라고. 장담하건대, 당신이 시리우스에 돌아가는 순간 그 소식은 탑의 빌런들에게 전해질 거야. 시리우스는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거대 길드인 만큼 관련된 사람도 많거든. 시리우스로 돌아가는 순간, 당신의 목에는 터지는 게 시간문제인 폭탄이 걸린다는 거지. 하지만 여기는 달라.”

툭툭, 자신의 무릎을 두드린 강이신이 씩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걸 모른다고.”

차송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강이신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탑의 빌런이 자신을 노린다면, 여기에 숨어 있는 것도 좋은…….

아니, 좋기는!

“그,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꼬실 생각이지? 흥! 어림도 없어, 나는 절대! 절대로 여기서 나가고 말 테니까.”

작게 나온 그 말에 강이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는 체를 한 강이신이 차송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겠어, 응원할게. 얼마든지 여기에서 나가도 좋아.”

생각보다 유한 반응에 차송진은 강이신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굴렸다. 정말로 여기에서 도망쳐도 된단 말인가?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뒤이어진 말에 차송진은 입을 벌렸다.

“예에?”

“좋아, 얘기 끝! 자세한 건 내일 마저 얘기하자고.”

차송진은 입만 뻐끔거렸다. 아니, 지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차송진의 어깨를 두드린 강이신은 촬영을 끝낸 감독처럼 두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말했다.

“자, 착한 어린이들은 잘 시간이에요.”

강이신의 말에 한서현과 김재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제 방으로 들어갔다. 차송진 쪽으로 고개를 돌린 강이신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뭡니까.”

“그 의자 어땠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차송진은 두 눈을 치켜떴다. 의자? 무슨 의자?

“그냥, 뭐 앉았을 때 어땠냐고.”

“어, 엄청 불편했는데요.”

“젠장. 역시 그렇군.”

얼굴을 구기며 욕설을 내뱉은 강이신은 그대로 자신의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뭐, 뭔데.”

홀로 남겨진 차송진은 당황했으나 그를 신경 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뉴스를 자세히 확인했다.

어제 대충 자기 전에 탑의 빌런들이 체포되었다는 건 확인했지만, 어떻게 일이 진행됐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탑의 빌런 셋은 각범부에 체포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있었다.

제미니가 현장에 있던 마정석을 폭발시켜 주변을 모두 덮는 거대한 불꽃을 불러냈는데, 그 불꽃에 시리우스의 헌터 몇이 화상을 입었다나.

다행히 내가(정확히는 한서현이) 빼돌린 인질들은 멀쩡하단다.

헌터 중에 특히 큰 피해를 입은 건 시리우스의 유망주로 꼽히는 한지무라는 이름의 헌터였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하필이면 얼굴을 비롯한 상체 쪽이 거의 녹아내리는 중상을 입었단다.

최상급 포션으로 처치했지만, 마력에 상한 피부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훈훈한 외모로 팬이 특히 많았다던데, 안타깝게 됐다.

유선제는 내게 보여 주었던 그 기술로 무사히 그 폭발을 피한 모양이었다.

‘흠, 딱히 걱정은 안 했지만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그나마 봐줄 만한 건 그 잘난 얼굴밖에 없는 놈 아닌가. 그 싸가지에 얼굴까지 못생겨 봐라. 정말 꼴불견이지.

어쨌거나 세 빌런이 체포되면서 설록진의 계획은 틀어졌다.

원래대로라면 ‘각성자는 나쁘다’로 다 뭉개 버렸겠지. 수많은 이가 죽은 참사조차도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인간이니까.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희생자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시리우스의 헌터와 각범부가 나서 테러범들을 체포하고 인질들을 구했으니 얼추 그림을 예쁘게 포장할 정도는 됐다.

‘게다가 시리우스 측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테고.’

전생에서는 테러에 전혀 입을 댈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일 아닌가. 시리우스 측에서도 이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막고 싶어 할 테니, 이 일을 되도록 원만하게 덮으려 하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곳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을 가지고 언론전을 한다는 건 바뀌지 않겠지만, 설록진에게 놀아나는 것보다는 그쪽이 나을 거다.

그 테러가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내 능력으로는 이게 한계였다.

‘더 큰 희생을 막았다는 데에서 위안을 찾아야지.’

일단 테러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문제라면…….

━그나저나 정말 저놈을 놔줄 생각이냐.

레이의 말에 나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차송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플랭크를 시켜 봤는데 단 30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겠다고 나뒹굴고 있었다.

공장에서 오래 일했다던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생활 근육은 꽤 있는 상태였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몸을 만들었던 적이 없던 터라 영 부실했다.

거기에 몇 주간 탑에서 지내며 기초 체력까지 모두 깎여 나간 것도 클 테고.

“헉, 헉.”

“다 쉬었으면 다시 자세 바로 하고.”

“차, 차라리 죽을래요.”

“영원히 우리랑 같이 살고 싶은 건 아니잖아? 여기에서 나가려면 열심히 훈련해야지.”

내 말에 차송진은 나를 노려봤다. 처음에는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하더니, 이제는 제법 저런 눈으로 나를 노려볼 줄도 알게 됐단 말이지.

“말했잖아, 언제든지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나가도 좋다고.”

내 말에 이를 악문 차송진은 다시 한번 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나갈 놈이라면 네가 봐줄 필요도 없는 거 아니냐.

‘뭐, 나갈 때 나가더라도 어디 가서 비명횡사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 말이지요.’

나는 본래 차송진을 벨츠머츠에 은근슬쩍 편입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빌런이 되고 싶지 않다고 울고불고하는 놈을 붙잡아 두기엔 내 양심이라는 게 쿡쿡 찔려서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굴리는 거냐?

‘적어도 스스로의 몸을 지킬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언제든 여길 나가도 좋다고 말한 뒤, 내가 차송진의 감시 역으로 붙인 건 김재호였다.

━차라리 창살 있는 감옥이 낫겠다.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는 편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덩치가 좀 있는 성인 남자 하나다. 능력을 써서 널 잡지는 않겠다고 말해 놨으니, 차송진의 머릿속에는 제법 희망의 싹이 자라 있겠지.

“허억, 허억.”

그러니까 저렇게 열심히 수련하는 거 아니겠냐.

“쉬었다가 하체 하고.”

내 말에 차송진은 앓는 소리를 냈지만, 나는 가볍게 그 신음을 무시했다. 오늘의 신음이 내일의 근세포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다만 워낙 몸이 상해 있던 터라 과하게 굴릴 수는 없었다. 적당히 차송진을 굴린 나는 미뤄 두었던 한서현과 김재호, 두 사람의 능력을 체크해 보기로 했다.

요새는 두 사람하고 훈련하지 않은 지 꽤 됐으니까 말이지.

특히 한서현이 모래를 다루는 것과 김재호의 그림자 능력을 제대로 테스트해 두어야 했다. 나 없이도 제법 본인의 재능을 써먹는 방법을 알아낸 모양이다만, 조금 더 제대로 다듬어 줘야지.

게다가 녀석들의 리더로서 나는 언제나 녀석들의 정확한 전력을 알아 둬야 했다. 그래야 작전을 제대로 짜지.

━꽤나 열심히 사는구나, 네놈은.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니,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처박혀 있던 게 생각이 나서 말이지.

‘아아.’

확실히 지금도 정호산과 도채희 일을 생각하면 위장이 뒤집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설록진의 밑에 있으면서 배운 것 중 몇 안 되는 좋은 점이 있다면요.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쓸데없이 매달리는 건 안 좋은 거라는 겁니다. 적당히 넘겨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이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진즉 미쳐 버렸을 거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다. 그러니 더는 그 생각은 하지 말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래도 뭐, 그렇게 살다가 정말 못 견디겠다 싶을 때가 오기도 했었는데…….’

그렇다고 죽음으로 도망치기에는 내가 저지른 짓이 한둘이 아니라서.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설록진이니까요.”

다시는 네가 내 세상을 부수지 못하게 막겠다.

그리고 나는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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