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47 차송진은 벨츠머츠가 싫다 (2)
저녁이라니. 지금 이 상황에서 태연히 밥이나 먹자고?
차송진은 입을 떡 벌리고 강이신을 바라보았지만, 강이신의 말에 모두가 익숙하다는 듯이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허어.”
왠지 돕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차송진도 엉거주춤 일어나 부엌 쪽을 어슬렁거렸지만, 떨어진 건 한서현의 불호령이었다.
“방해되니까 보스랑 같이 저 소파에나 앉아 있어요!”
그 말에 머쓱하게 고개를 뒤로 돌리니 소파에 앉아 있던 강이신이 여기로 와서 앉으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차송진은 그 손짓을 무시한 채로 거실에 우뚝 서서 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 상념은 한서현의 말에 끊겼다.
“와서 앉아요.”
그 말에 차송진은 쭈뼛거리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4인용 식탁은 네 사람이 앉으니 꽉 찼다.
기껏해야 보존식이나, 인스턴트식품을 내올 줄 알았는데 저녁 식사가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었다.
차돌 된장찌개에 계란말이. 소시지 채소볶음에 나물 반찬까지. 열여덟 먹은 남자애가 차렸다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짓수도 많았고 만듦새도 완벽했다.
이렇게 잘 차려진 밥상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걸 다 저 네크로맨서 꼬맹이가 만들었다고? 놀란 얼굴로 입을 벌리는 차송진 앞으로 쿵 하고 밥그릇과 국그릇이 놓였다. 그릇을 놓는데 ‘쿵’이라니.
“서현아, 조심 좀 해. 엎을 뻔했잖아.”
“아, 아. 평소보다 더 차린 게 많아선지 손이 미끄러져서요.”
거짓말! 내가 고까운 것뿐이잖냐! 차송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다못해 여기까지 와서 눈칫밥이라니.
“자, 그럼 다들 맛있는 저녁…….”
강이신의 말이 끝나기 전 김재호의 젓가락이 빨랐다. 계란말이를 쓸어 담는 김재호의 젓가락에 강이신이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먹자고.”
그제야 눈치만 보던 차송진도 젓가락을 들었다.
줏대 없이 배 속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밥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니 견딜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졌다.
‘그러고 보니 한참 굶었긴 하네. 탑에서 먹었던 건 거의 정크 푸드뿐이었고.’
식탁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입가에 침이 고였다.
흥, 생긴 것만 이렇지. 맛이 없을 게 분명해. 괜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첫술을 떴는데, 이게 웬걸.
‘맛, 맛있잖아!’
차송진은 게 눈 감추듯이 제 앞에 있는 밥그릇과 국그릇을 비워 나갔다. 집는 반찬마다 전부 제 입맛에 딱이었다. 차송진은 슬쩍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벨츠머츠에서 식사 담당을 할 만큼의 인재!
밥을 먹은 다음에는 강이신이 준 귤을 까먹고, 귤을 다 까먹은 뒤에는 강이신이 건넨 칫솔로 양치까지 했다.
‘이,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전 친구 집에 놀러 온 것처럼 편하게 있지 않았나!
‘위험해! 정신을 바짝 차려, 차송진. 여긴, 여기는 벨츠머츠의 기지라고. 언제 내 배때기를 갈라 버릴지 몰라. 호랑이 굴에 물려 가더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댔잖아. 그래, 그래.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그래야 여기에서 도망이라도 치지 않겠는가. 차송진의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이신은 태평한 얼굴로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하아암, 졸리네.”
“대체 저번에 잠도 안 자고 뭘 했길래 병든 닭처럼 계속 조는 건지.”
살벌한 중얼거림에 차송진은 굳은 얼굴로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긁적거린 강이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서현아? 나 불렀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서현의 음침한 목소리를 들은 건 근처에 있던 차송진뿐이었다. 목소리에 진득하게 묻은 원망이 느껴져 자신의 등골마저 서늘해질 판이었으나, 한서현의 말을 듣지 못한 강이신은 여전히 태연했다.
“아, 맞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차송진 씨 쓸 방이나 알려 줘야겠다.”
“제, 제 방이요?”
“그럼, 오늘 잠은 따로 자야지. 자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게 아니면?”
강이신의 농담에 차송진은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누구든 같이 자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가 있겠냐! 너희 같은 빌런은 한 트럭으로 줘도 사양이다!
차송진의 질색하는 표정을 본 강이신이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얼굴이 너무 어려 보여서 차송진은 입을 꾹 닫았다.
‘저렇게 보여도 악당이다, 빌런이다, 벨츠머츠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강이신이 차송진에게 내어 준 건 강이신의 방과 마주 보고 있는 방이었다. 방문마다 웃기게 생긴 명패가 붙어 있어 어디가 누구 방인지 알아보기는 참 쉬웠다.
아무것도 달리지 않지 않은 방문을 열자, 역시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방 안이 나타났다.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음침한 방 안을 바라보며 차송진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도대체 왜 이 방까지 까맣게 칠해 놓은 건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이신이 말했다.
“아, 너무 아무것도 없지?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 우리가 친구는 없어도 침구는 많거든.”
강이신의 말에 차송진은 기겁했다.
‘뭐야, 이 아재 개그는.’
어려 보이는 주제에 개그 센스가 낡디낡았다. 이래서 자기가 보기보다 정신연령이 높다고 한 건가. 그래도 웃어 줘야 하나. 차송진이 고민하는 사이 강이신은 침구를 꺼내 잠자리를 대충 만들어 줬다.
“오늘은 여기에서 자고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고.”
“얘, 얘기요? 무슨 얘기를…….”
“뭐, 그쪽 처우라든가.”
처우, 라. 차송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지금의 이 부드러워 보이는 분위기는 모두 가짜다. 이들은 벨츠머츠, 그 악독한 빌런들이니까.
“아, 맞다. 갈아입을 옷도 줘야겠네. 기다려!”
그러니까 왜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건데!
차송진은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
* * *
차송진에게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알려 준 강이신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주의할 점이라는 건 아주 간단했다.
‘다른 애들 방에 들어가지 말고,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를 부르라고? 누굴 여덟 살짜리 어린애인 줄 아나.’
자리에 누운 차송진은 눈을 깜빡였다. 정말 자신이 그 악독하기로 유명한 벨츠머츠의 기지에 온 건지, 아니면 수학여행을 온 건지 가늠이 도통 되지 않았다.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자신을 묶어 두지는 않더라도 방에 가둬 둘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아무런 잠금장치도 없이 그를 그냥 두다니.
밤중에 배가 고프면 언제든 냉장고에서 먹을 걸 꺼내 먹으라는 말도 했으니, 돌아다녀도 된다는 뜻이다.
‘내가 도망치면 어쩌려고 이렇게 날 내버려 두는 건지.’
물론 도망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려고. 그래도 그렇지. 너무 허술하다 이거다.
‘참 나, 내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잠이나 자자.’
딸깍, 누군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히익!”
“어이, 거기 우리랑 얘기 좀 하지?”
문틈 사이로 삐딱하게 선 한서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럼, 거기 당신 말고 누가 또 있나?”
차송진은 떨리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자고……. 겁에 질린 차송진은 한서현이 시키는 대로 잠자코 밖으로 나왔다.
“거기 앉아.”
“여기?”
한서현이 가리킨 것은 웬 볼품없는 의자였다. 어디서 버리려던 걸 주워 온 것인지 영 모양새가 이상했다. 차송진은 조심스럽게 그곳에 앉았다. 어쩐지 다른 의자보다 훨씬 몸이 불편한 것 같았다. 하긴, 이런 분위기에서 몸이 편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만.
‘아니, 진짜 왠지 몸이 무겁고 등골이 찌릿찌릿한데.’
하지만 의자를 바꿔 앉겠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몸을 꿈지럭대는 차송진에게 한서현이 말했다.
“보스는 너를 받아 줄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반대야.”
‘우리’라기에는 김재호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차송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한서현이 김재호의 옆구리를 쳤다.
“맞아, 반대다!”
무섭게 생겼지만, 이거…… 바보 아니야? 툭 한서현의 손짓에 김재호가 입을 열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이런 귀한 분이 오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지.”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반대로 말해야지.”
“왜? 틀린 거 없잖아.”
“뭐가 틀린 게 없어. 내가 말한 거랑 다르잖아.”
“누추하다는 거, 딱 우리 집 같은 데를 말하는 거잖아. 지저분하고 더럽고.”
“더럽진 않거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청소하는 줄 알아?”
그 말에 차송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저놈이 왜 귀한 분인데?”
“쟤 재능은 귀하다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셨다는 게 맞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 꼭 우리가 저 녀석을 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난 저 녀석 싫거든?”
“그래도 난 틀린 말 안 해!”
어느샌가 저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고 있었다.
‘이, 이럴 거면 나는 들어가라고 해 주면 좋겠다.’
차송진은 그 둘의 싸움을 보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점점 몸이 불편해졌다.
‘젠장.’
뭐가 됐든 좋으니 빨리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됐어, 형이랑 나랑 싸워서 뭐 해. 중요한 건 저놈이라고.”
자기보다 훨씬 어린놈에게 이놈, 저놈하고 불리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었지만, 차송진은 참았다.
“당신은 벨츠머츠랑 안 어울려.”
하지만 이 말은 듣고만 있기에는 너무 열이 뻗쳤다. 아니, 전 거기 들어갈 생각도 안 한다고요!
“나도, 벨츠머츠가 되고 싶은 생각은…….”
“뭐? 우리 벨츠머츠가 어디가 어때서! 왜 싫다는 건데?”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거냐!
차송진은 아득해졌다.
“나도 그냥 돌아가고 싶다고……요.”
겨우 열여덟밖에 안 된 어린애에게 존댓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위기상 반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안 돼. 보스가 네놈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니까.”
진짜 어쩌라는 건지. 차송진은 오락가락하는 한서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절대 벨츠머츠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말해.”
그때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강이신이 문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흐아악! 보, 보스!”
한서현은 비명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김재호는 손을 뻗어 한서현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 잔뜩 피곤한 듯,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나온 강이신이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헤집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깼, 깼어요?”
“그럼. 재호 녀석이랑 아주 쩌렁쩌렁하게 싸워 댔잖아. 난 또 나 깨우려고 그런 줄 알았지.”
강이신의 등장에 한서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그럼 혹시…….”
“그래, 다 들었다. 벨츠머츠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일단 리더는 나야. 그러니까 멤버를 들이는 것도 일단은 내 몫으로 해 두자고.”
“하지만…….”
강이신은 손짓으로 한서현을 뒤로 물렸다. 입술을 꾹 깨문 한서현이 뒤로 물러났다. 소파에 앉은 강이신이 차송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얘기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된 거 오늘 얘기하자고.”
“끅.”
숨을 삼킨 차송진에게 강이신이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당신을 그냥 내보내 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