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42화 (142/352)

제142화

#46 테러, 테러, 테러 (4)

한서현에게 안의 사정은 대충 들었다.

“애초에 저놈들은 인질을 살려 둘 생각이 전혀 없다고?”

“네, 다 죽일 생각이래요.”

“끄응.”

인질들이 걱정돼서 함부로 들어갈 순 없지만, 이래서야 가만히 내버려 둬도 다 죽을 판이다.

원래는 쓱 탈출 능력자만 빼 가려고 했지만, 그쪽도 머리가 빈 것은 아니라 자신들의 옆에 딱 붙여 뒀다. 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탈출 능력자를 빼돌릴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탈출 능력자를 빼돌리지 못하면, 탑의 빌런들은 언제든지 도망칠 거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몇 번이고 벌이겠지.

그 꼴은 내가 또 못 보지.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확실한 방법은 아무래도 그것뿐인가. 한서현의 눈치를 살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한숨에 한서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하아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방법뿐인데. 하지만 이 방법을 말하면 한서현이 날 가만둘 것 같지 않단 말이지.

“뭔데요! 자꾸 한숨만 쉬지 말고 말해 줘요.”

“아무래도 내가 직접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엔 없는 것 같아서.”

“애초부터 그럴 생각 아니었어요?”

“어, 음. 계획을 조금 바꿀까 해서.”

원래 우리의 계획은 셋이서 저 안을 덮치는 거였다. 하지만 말이야. 유선제를 꼬시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 말이지. 그거보다 훨씬 좋은 계획이 생각났으니까. 문제는…….

“나 혼자 들어갈 거야.”

“예에에에?”

“눈 튀어나오겠다.”

“욕이 튀어나올 것 같긴 한데요.”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표정이 살벌하다. 나는 황급히 한서현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 모든 계획을 들은 한서현은…….

“그래서 혼자 들어가시겠다?”

여전히 더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아?”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잖아요.”

“그야, 대놓고 붙으면 인질들의 피해가 너무 커지잖아.”

박상편 때하고는 다르다. 그때야, 나 혼자 박상편을 마크하고 나머지 두 사람이 인질을 빼돌린다는 전략이 가능했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적도 셋이니 그게 불가능했다.

유선제가 끼어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전면전이 일어나면 인질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아마 피해가 크겠지.’

조립가야, 집중 마크를 한다 쳐도 제미니의 경우에는 대규모의 인명 피해를 피할 수 없게 될 테니.

“하지만 이 계획이라면, 인질들을 보호할 수 있겠지. 게다가 싸울 필요도 없고…….”

“그리고 보스가 위험해지겠죠.”

“실패한다면 말이야.”

그리고 나는 실패할 생각이 없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만약의 경우에는 너희가 빨리 합류하면 되잖아.”

나와는 달리 모래를 다룰 수 있는 한서현과 그림자로 이동이 가능한 김재호는 유사시 순식간에 진입하는 게 가능했다.

━정말 말이라도 못 하면 얄밉지나 않지.

내 설명에 나를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한서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위험해진다 싶으면 바로 진입할 거예요.”

“그래, 그래.”

“나는 인질들 따위 신경도 안 쓰니까.”

등골이 다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나는 슬쩍 김재호를 바라봤다. 여차하면 한서현을 말릴…… 수가 없겠군. 같이 휘말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영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내가 선택한 우리 팀원이다.

일단은 믿는 수밖에.

* * *

차송진은 여기저기 주저앉아 있는 인질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게와 복도에 가득 찬 인간들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더 소름이 돋는 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였다.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섞이는 누군가의 중얼거림까지.

“그, 그 울지 마세요. 제발…….”

차송진은 옆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환상에 빠진 이들은 차송진의 말에도 어떤 반응도 없었다.

무서웠다.

당장에라도 졸도할 것처럼 두렵고 떨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람들을 죽여 대는 빌런들도 두려웠지만,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두려웠다.

“무서워!”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 걸까.

‘이럴 거라면 각성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겨우 ‘도망’치는 능력 따위는 없는 게 나았던 거 아닐까.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몸을 지킬 수도 없고, 누군가를 위해 싸울 수도 없는, 그런 허접한 능력. 이런 데에 끌려와서 원치 않는 사람들을 날라야 하다니.

정말로 도망칠 수 있다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도망쳤을 텐데.

차송진의 눈이 거멓게 죽어 갔다.

그때 발밑으로 자그마한 쥐가 나타났다. 흠칫, 몸을 떨었지만 차송진은 용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쥐는 자신이 물고 온 쪽지를 차송진의 발밑에 내뱉었다.

조심스레 펼쳐 본 쪽지에는…….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차송진이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말이 적혀 있었다.

* * *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에 얼굴을 구겼다.

“피 냄새…….”

그리고 매캐한 그을음의 냄새가 건물 안에 지독하게 남아 있었다.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붉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를 확인한 나는 숨을 들이켰다.

━……끔찍하구나.

레이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시체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안과 밖이 뒤바뀐 시체부터, 산 채로 녹아 버린 시체까지.

일반인도 꽤 되었지만, 각성자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 각성자 중에서는 5성급의 헌터까지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탑의 빌런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충 세어 봐도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시체가 어찌나 많은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신발 바닥이 벌겋게 물들 정도였다.

“정말이지…….”

난 탑의 빌런이 참으로 싫었다.

다른 놈들과는 달리 능력도 있으면서 뭐 하러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 열등감? 그런 걸 왜 남의 삶을 빼앗으면서 충족하려고 하는 건지.

“전보다 피해가 더 커졌네요.”

━그러냐?

“예. 전에는,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였는데…….”

설록진이 이 백화점을 노린 건 전에 없던 일이다. ‘세레나의 빙궁’ 공략에 실패한 시리우스에게는 백화점을 개점할 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 백화점을 개점하는 것도 미루고, 나중에는 자금 때문에 팔아치웠던가.

과거와 달리 시리우스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건재했고 그래서 이 백화점을 노린 거겠지.

그 잘난 시리우스 길드가 운영하는 백화점에까지 침입한 빌런, 그리고 그 빌런의 검거에 실패하는 헌터와 각범부.

시리우스도 무너트리고, 각성자는 위험하다는 인식도 새기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밖에 모여 있는 인파는 설록진이 그려 놓은 그림을 제일 앞좌석에서 관람할 구경꾼들이었다.

이곳에서 죽어 나간 몇백의 사람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런 걸 신경 쓰는 위인이 아니니까, 그 양반은.

나는 지금 피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이들이 느꼈을 절망이, 두려움이 피부에 불쾌하게 달라붙었다.

테러는 이미 성공이다.

이 사실이 바깥에 흘러나가면 모두가 겁을 집어먹게 될 테니까.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벌을 받아야 할 빌런들도 있죠.”

그것만으로 내가 저 안으로 들어서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 * *

탑의 빌런들이 자리 잡은 곳은 3층에 있는 헌터 아머리였다. 트릭스터의 환영에 갇혀 신음하는 인질들 사이를 걸어 나는 그곳에 자리한 세 명의 빌런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곧바로 마력이 사납게 일어났다.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 항복입니다, 항복.”

“너어!”

양 갈래머리를 한 여자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벨츠머츠!”

내 가면을 알아본 제미니 덕분에 두 사람의 살기는 조금 옅어졌다.

“네놈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이렇게 재밌는 판을 벌이시다니. 구경 오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날을 잔뜩 세우고는 있지만, 일단은 ‘같은’ 빌런이라는 것 때문인지 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나는 빙긋 웃었다.

세레나의 빙궁 이후 두 달 만에 보는 세 사람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런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이니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다만.

“이거 놀라운데. 내 환영을 뚫고 오다니 말이야.”

트릭스터의 말에 나는 툭툭 가면을 건드렸다.

“제법 쓸모가 많은 아티팩트지요.”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이번에는 조립가의 질문이다.

“조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런 재밌는 판이 벌어졌는데 구경 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정말로 그냥 구경 왔다고?”

“예.”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시리우스가 연 백화점을 통째로 점거하시다니요. 빌런들에게는 꿈과 같은 업적 아닙니까. 거기에 여기 이렇게 인질들까지.”

그런 말을 하며 나는 슬쩍 인질들을 훑어보았다.

저 중에 빌런들을 무사히 빼돌릴 탈출 능력자가 있다.

김춘태. 본명 차송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인질들 사이에 숨어 있는 그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를 골라냈다.

가면을 쓴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어깨를 떨었다.

‘좋아, 준비는 다 됐군.’

차송진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다시 시선을 세 빌런들에게로 돌렸다. 조립가가 나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근데 이건 영 예의가 아니지 않나. 우리가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고 온 거 말이야.”

“맞아, 계속 그 예쁜 머리를 목 위에 붙여 두고 싶다면 꺼지는 게 좋을 거야.”

“응응, 여기에 있는 건 모두 우리 거거든. 그러니까 손댈 생각 하지 말라고 꺼지라고.”

세 사람의 말은 거의 동시에 내게 쏟아졌다.

“아이쿠, 그렇게 말씀하시면 조금 마음이 아픈데요.”

그렇게 말한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덧붙였다.

“저도 양심은 있는 놈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탑의 빌런분들께서 당연히 얻으셔야 할 몫을 탐하러 왔을 리가 없잖습니까.”

내 말에 제미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할아범을 쫓아낼 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게다가 좋아한다면서! 우리한테 왜 합류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정상 혼자 움직여야 해서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탑에 언제든지 합류하고 싶지만, 그 사정이라는 게……. 하, 참 세상이 야속하지요.”

나는 가면 위로 눈물을 훔치는 체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여러분의 전리품을 탐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정말로 여기에 온 건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세 분을 볼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였으니까요. 개인적으로 혈마님도 무척이나 존경하지만, 사실 세 분의 활동이야말로 예술의 경지라 생각하거든요.”

내 말에 제미니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으래? 우리를 존경한다고?”

안 그런 척 보여도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는 약하다.

애초에 탑의 빌런들은 죄다 관심 종자거든.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관심이란 것들은 전부 다 경멸, 혐오 비슷한 것들뿐이다. 그렇다고 서로를 핥아 주기에는 다들 성격이 모났고. 그러니 뻔한 감언이설에 약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제미니는 실제로 정신연령이 많이 어린 편이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또 이런 타입은 아주 익숙하지.

“그럼요, 탑의 빌런이라. 빌런이라고 이름을 붙인 자들은 누구나 동경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까지 오면서도 몇 번이고 감탄했습니다. 역시 탑의 빌런분들은 규모부터 다르군요. 시리우스를 엿 먹일 줄이야!”

나와 똑같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면을 착용한 트릭스터는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었지만, 제미니는 내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럼! 우리가 그 뻔뻔한 놈들에게 엿을 먹였지.”

하지만 나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만 있는 건 아니었다.

“구경 끝났으면 가.”

트릭스터의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뭐, 구경뿐만 아니라 겸사겸사 볼일이 있기도 했고요.”

“역시 그냥 온 게 아니군! 대체 뭘 노리고 온 거지?”

조립가의 짜증에 내가 곧장 말했다.

“저희 그룹 막내가 사령술사인 건 다들 아시죠? 마침 싱싱한 재료들이 필요해졌지 뭡니까.”

“싱싱한 재료?”

“예,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마음 깊숙한 곳으로 여러분을 존경하는 터라. 얼굴도 직접 뵙고 싶기도 했고…….”

말을 늘인 내가 인질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기념으로 여러분들이 잡은 저 인질 중 몇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둘이나 셋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