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46 테러, 테러, 테러 (1)
김춘태, 아니, 차송진은 덜덜 떨었다.
“히이익.”
탑의 빌런들에게 잡혀 온 지 몇 달. 그는 간절히 귀환을 꿈꾸고 있었다.
각성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리우스의 부길드장을 만나고 핵심 멤버로 스카우트당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차송진은 자신의 인생에 드디어 빛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흑흑.”
김춘태라는 촌스러운 가명을 쓰고 자신의 정체를 감춰야 한다는 말은 영 불만스러웠지만, 무려 S급 게이트 공략 팀에 속하게 된 이상 그런 불만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이 일만 끝나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알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진연화 부길드장의 약속도 있었고 말이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
시리우스의 공략은 실패했고, 자신은 이렇게 빌런들에게 잡혀 와 그들의 수발이나 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오늘은 또 제게 무슨 X랄을 해 댈지. 제미니의 얼굴을 확인한 차송진은 재빨리 몸을 웅크렸다. 구석에 숨어 발발 떠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제미니가 말했다.
“정말이지, 언제까지 그렇게 겁을 집어먹을 건데?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다!”
구석에 있던 트릭스터가 제미니를 향해 말했다.
“그러게 네가 좀 갖고 놀았어야지.”
“흥, 너무 약해 빠졌으니까 그렇지.”
제미니는 툭하면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차송진을 굴렸다. 그녀가 쏘아 보내는 불꽃을 피하지 못해 생긴 화상 자국도 여럿이었다.
“저놈은 글러 먹었어. 재능만 아니면 확 태워 버리고 싶을 정도야!”
제미니의 발랄한 말에 차송진은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저 말이 전혀 농담이 아니라는 건 차송진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웬일로 다들 모였네.”
늘 탑에 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제미니와 달리 트릭스터와 큐브, 조립가는 늘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이들이 모두 모인 건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뜻.
제미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뭔데, 뭔데?”
“그 의원한테서 메시지가 왔어.”
“으응?”
“저번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조립가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그 말에 제미니의 시선이 트릭스터에게로 향했다.
“그러게 확실하게 불태우고 나와도 됐잖아!”
그날 작전을 주도했던 건 트릭스터다. 갑작스러운 제3자의 등장에 그들을 버리고 퇴각하자고 했던 것도, 그걸로 충분하다고 장담했던 것도 그였다.
두 사람의 원망에도 그림자 사이로 얼굴을 숨긴 트릭스터는 여전히 태연했다.
“나는 거기에서 절망을 느끼다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설마 그 인원만으로 S급 게이트를 공략할 줄 누가 알았겠어.”
트릭스터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분명 그 안에서 말라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살아 돌아왔단 말이지.
“애초에 내가 확실하게 끝내게 해 줬으면 이럴 일도 없었어.”
“글쎄, 확실하게 끝낼 수나 있었을까.”
트릭스터의 말에 제미니가 발끈했다.
“뭔데, 그 말은. 내가 그놈들을 이길 수 없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 인원만으로 S급 게이트를 공략한 사람이야. 확실히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얕볼 상대는 아니었다는 거야.”
“날 무시하는 거지? 응?”
또다, 또.
제미니의 머리카락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걸 확인한 차송진은 재빨리 구석에 붙어 몸을 웅크렸다.
사이가 좋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들의 관계는 살얼음처럼 늘 위태로웠다. 말 한마디, 눈짓 한 번으로도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도 있었다.
뜨거운 불꽃이 차송진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를 참지 못한 제미니가 사방으로 불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놈들아, 그만 좀 해라, 그만 좀! 이러다가 우리 살림살이 다 거덜 나겠어.”
혈마 추마걸이 나서고 나서야 제미니는 화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영감! 저놈이 나를 무시하잖아.”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뭘 그러냐. 이번에 일 뭐 새로 받았다며. 거기에서 보여 주면 되는 거 아니냐.”
추마걸은 제미니를 순식간에 달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대로 물어뜯어 버렸겠지만, 제미니 또한 추마걸에게는 약했다. 차송진이 갇혀 있는 우리를 본 추마걸이 혀를 차며 말했다.
“불꽃 거둬라. 우리 춘태 놀랄라.”
저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눈물이 났다. 난 춘태가 아니라, 송진인데.
하지만 여기서 그를 김춘태라고 부른다면 잠자코 김춘태가 되는 편이 나았다.
트릭스터도 말을 던졌다.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네 바람대로 판을 제대로 벌일 생각이니까. 그놈 볼 낯이 없어서라도 제대로 해 둘 생각이야.”
“언제부터 우리가 국회의원 뒤나 빨아 주는 사람이었다고?”
“뒤를 빨 생각은 없지만, 무능하다는 이미지로 박히기도 싫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트릭스터의 목소리는 참으로 서늘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에 차송진은 재빨리 귀를 막았다. 여기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자신이 듣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팍팍 들었으니까.
국회의원이라니! 설마하니 탑의 빌런들이 국회의원과 아는 사이란 말인가.
게다가 일을 벌인다니!
그 일에 자신은 빠지고 싶었지만…….
“저놈도 있으니까 위험하게 한판 해도 되잖아.”
이어지는 말에 희망은 사라졌다.
“어흐흑.”
차송진은 주먹을 물고 울었다.
“이번에 새로 개장한 백화점이 있는데…….”
이어지는 말들에 차송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저기 가게 될 거야, 응, 무조건 테러리스트가 될 거야. 나는, 내 인생은…….’
차송진의 소원은 출세였지, 테러리스트 같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소원과는 별개로 세상은 그를 악당의 길로 떠밀고 있었다.
* * *
나는 금 박사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그러니까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요?”
[네가 원한 기능이 한두 개여야지! 그렇게 뚝딱뚝딱 나오는 게 아니야.]
“가면 만들고 있죠? 솔직하게 말해요.”
내 말에 금 박사는 조용해졌다.
“내가 그건 급하지 않다고 했잖습니까?”
[거의 다 됐어! 조금만 더 만들면 된다니까?]
━저거 꼭 누구랑 말이 똑같지 않냐?
레이의 말에 나는 주먹만 꽉 쥐었다. 지금은 그런 농담을 할 때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큼, 큼. 어쨌거나 물건이 완성되는 대로 연락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습니다.”
어째 본전도 못 건지고 끊은 것 같은데.
“하아.”
정호산에게 연락하는 건 며칠 뒤로 더 미뤄 둬야 하는 건가.
내가 금 박사에게 부탁한 건 추적이 되지 않는 스마트폰이었다.
한서현을 통해 보낸 쪽지가 모두 무시당하고, 정호산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네가 쪽지를 형편없이 보내니까 그놈이 무시하지.
‘뭐요. 그럼 그대로 둬요?’
참고로 내가 보낸 쪽지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길드로 돌아가. 아니면 너 평생 안 본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아주 잘 있으니까. 길드로 돌아가기나 해! 도채희 경위랑은 멀어지라고!」
「도채희 경위 보러 가면 나 너 진짜 평생 안 본다?」
이 쪽지에 대한 정호산은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그 쪽지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내가 빌런들에게 잡혀 있다고 믿을 테니까.
━그건 너무 좋은 해석인 것 같은데. 그냥 듣기 싫은 거일 수도 있잖냐.
“호산이가 그럴 리가 없어요! 누구 말을 막 무시하고 그런 애가 아니라고요. 그냥, 그때 상황은 누가 봐도 좀 그랬잖습니까. 그런 오해를 할 법도 하죠.”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라. 문제는 네 놈의 쪽지가 전혀 효과가 없다는 거 아니겠냐?
레이의 말대로 내 간절한 부탁에도 정호산은 도채희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정호산을 다시 만나러 갈 생각은 ‘당분간’ 없다.
다시 그 녀석 앞에 나서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로는…….
“부탁해도 안 되면요?”
━또 겁이 나는 거냐?
“아니,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안 되면요. 애초에 정호산 그놈은 고집이 아주 지독한 놈이라고요. 누가 말한다고 들을 놈이 아니에요.”
━끼리끼리 잘도 만났네.
“정호산에 비하면 제 고집은 없는 정도거든요?”
━그냥 그 녀석을 두고 보는 건 어떻겠냐?
“두고 봐요? 뭘 두고 봐요. 그러다가 또 잘못되면요?”
과거 설록진은 도채희를 제법 오래 살려두었다. 하지만 도채희의 인생은 절대 편하지 않았지. 실컷 농락당하다가 자신의 꿈이 눈앞에서 부서지는 걸 보고 죽었으니.
게다가 미래가 바뀌었으니 설록진이 도채희를 오래 살려 둘지, 어떨지도 확신할 수 없다. 제대로 ‘걸림돌’이 될 도채희를 정리하려고 마음먹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정호산까지 원플러스원으로 가는 거라고.
문제는 이 사실을 정호산에게 말해 줄 수 없다는 거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하면 짚을 두르고 위험에 뛰어들 놈이 바로 정호산이니까!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행복하게 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냐?
“으아아.”
━정말 속이 터질 것 같은 상황이로군.
“관두게 할 거예요, 두고 보라고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야 말 테다. 나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일단 도채희의 무급 휴가가 끝날 때까지는 두고 볼 생각이다. 각범부에 정식으로 들어가는 일만 막으면 되니까.
“정 안 되면…….”
━정 안 되면?
“아니,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으렵니다. 일단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으니까요. 일단 당장 중요한 건 설록진의 계획을 막는 거 아니겠습니까?”
도저히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뒤로 미뤄 두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집중해야겠다.
━네가 전에 말한 거 말이냐.
“이쯤 슬슬 터질 때가 됐거든요.”
국회의원 피살 건으로 나를 쪽쪽 빨아먹는 것도 슬슬 단물이 빠지고 있다.
“내가 죽인 건 ‘일단은’ 추문이 있던 국회의원이니까요. 개인적인 이득을 하나도 취하지 않기도 했고. 설록진이 관점을 ‘힘이 있다고 해서 사적인 보복을 하는 게 옳냐’로 재빨리 틀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아니었다면 그쪽도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설록진의 언론전으로 대중들은 설록진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록진이 원하는 메시지를 주기에는 부족하죠.”
그러니 각성자들을 데리고 조만간 사고를 칠 거다.
그게 테러가 됐든, 뭐든. 어떤 식으로든 각성자들이 설 자리를 부수는 게 될 테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테러에 한 표다.
원래 ‘정호산’이 일으켰어야 할 테러가 이번 생에는 없었거든.
내가 그동안 사고를 쳐서 테러를 일으킬 짬이 없었던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설록진 쪽은 잠잠했다.
과거에 있었던 것만큼, 아니,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만회할 만큼 거대한 테러가 터질 거라고 보는 게 맞겠지.
내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몸을 숙이고 있는 것도 그 테러를 막기 위해서였다.
“전생처럼 별 볼 일 없는 각성자를 빼내 와서 테러를 저지를 수도 있고…… 탑을 이용할 수도 있겠죠.”
━탑이라면, 저번에 빙궁에서 봤던 그 녀석들 말이냐?
레이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저번 임무에 실패했잖아요.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하려고 할 겁니다.”
설록진과 탑. 그 둘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탈출 능력자가 있으니, 도심에서의 테러도 못 할 건 아니고.
오히려 구미가 당기지 않을까 싶었다. 탈출 능력자를 확보하고 나서도 여태까지 그놈을 제대로 쓸 만한 일이 없었으니까. 이번 기회에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고 싶을지도.
“사실 도심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건 확실히 위험부담이 큰 일입니다. 거대 길드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다가, 정부에서도 강력하게 테러범을 처치할 테니까요.”
그래서 설록진은 ‘죽어도’ 상관없는 인물들만 테러에 이용했다.
하지만 탑에게는 이제 완벽한 탈출로가 생겼다. 깽판을 치고 도망가면 그만이라는 거다.
━그 탑의 빌런들이 날뛰는 거라면, 너도 답이 없지 않나?
“뭐, 정면으로 맞붙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하지만 굳이 그 빌런들과 정면으로 맞붙을 필요는 없지.
“대충 계획은 짜 뒀습니다. 그 계획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테러가 일어날 법한 곳은 감시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출동할 수 있다.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피해가 더 커지는 건 방지할 수 있겠지.
그동안 나도 내 할 일을 할 생각이다.
“이 망할 놈의 검을 좀 뜯어봐야겠습니다.”
박상편이 사용하던 마검. 드디어 이놈을 처리할 때가 됐다.
━하긴 저번에도 그걸 뜯어보겠다고 하다가 일이 생겼지.
이 마검 안에 깃든 마력은 대단했다. 사용자의 목숨을 그대로 날려 버릴 물건만 아니라면, S급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의자에 대한 집착이 끝나니까 이제는 검이냐.
“솔직히 이쪽을 먼저 해야 했는데, 레이가 분석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의자나 붙잡고 있던 거 아닙니까. 그렇게 시간을 드렸는데도 결국 실패했고 말이죠.”
━끄응. 나도 내 세계에서 온 기술이 아니면 좀 약해서 말이다. 아무래도 이건 마계의 힘이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계라. 게이트로 연결된 곳 중에는 실제로 악마가 존재하는 차원도 있다고 했지.
레이는 변명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마계의 기술은 원래 인간이 다루던 게 아니라서 자신이 알 수가 없다든가, 계약자가 아니면 아예 다루지도 못하는 게 정상이라든가.
그 긴 변명을 압축하자면 이거다.
“결국 능력 부족이네요.”
━끄응!
레이의 한판패였다.
나는 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악마의 힘이 닿은 검이라. 진짜 문자 그대로 마검(魔劍)이로군.
방수포에 싸인 검은 여전히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박상편이 흘린 핏자국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렇다고 이걸 계속 내버려 두는 것도 아깝고요.”
이걸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다.
나는 그 검의 손잡이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