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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38화 (138/352)

제138화

#45 친구 (3)

“이놈들아! 따라오면 어떡해.”

“그렇지만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해요.”

한서현은 내 말에 입을 삐쭉였다. 이게! 분명히 나한테 다 맡겨 놓겠다고 했으면서!

“게다가 말이야! 나를 그렇게 낚아채 오면 어떻게 하냐!”

따라오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나를 이렇게 끌고 오다니. 하필이면 그런 대화 중에 날 낚아채서 데리고 오면 어떡하냐! 이래서야 정호산의 오해가 아주 글러 먹었다고도 말 못 하잖냐!

“그렇지만 그놈이 먼저 보스를 꽉 붙잡았잖아요! 우리에 대해서도 막 추궁하고! 곤란해했잖아요!”

“그야, 곤란하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나를 낚아채면 그놈이 더 큰 오해를 하지 않겠냐. 그나저나 김재호. 넌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네가 날 낚아 왔잖아!”

내 말에 김재호는 억울하다는 눈길로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깨달았다.

“네가 시킨 거냐!”

한서현이 김재호를 말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가 되었다니.

“시, 시켰다니요! 우리 둘이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결단하고 실행한 거거든요?”

“뭘 그렇게 장황하게 말해! 그렇게 말해 봤자 한 2분은 고민했냐?”

“……3분은 고민했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굴리는 한서현의 얼굴에 나는 이마만 팍 쳤다. 내가 이 어린애를 데리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때 눈을 굴린 김재호가 슬쩍 내 옷자락을 붙들고 말했다.

“그놈이 보스를 공격했다.”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맞아요. 그쪽이 보스를 안 놔준다고 말했잖아요.”

“다 듣고 있었구만.”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아, 보스로서의 위엄은 어디로 간 건지.

“그렇지만, 우리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보스는, 보스는 그 사람이랑 같이…….”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어깨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불안하게 만들었던 건가.

“어차피 걔를 따라갈 생각은 없었어.”

김재호와 한서현을 버리고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여기로 데리고 올 생각도 없고.”

“왜요? 엄청 친해 보이던데, 아니, 실제로도 엄청 친하잖아요.”

“호산이하고 친한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놈이 걱정되어서 견딜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녀석과 함께할 생각은 없다.

“걔는 우리를 이해 못 할 거야.”

정호산을 빌런의 길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건 부차적인 이유다.

정호산은, 나를, 내가 하는 짓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다.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정호산은 그 죄책감을 견뎌 낼 수 없을 거다.

내가 하자면 하겠지. 하지만 그러는 동안 놈은 망가지고 말 거다.

내가 한서현과 김재호를 받아들인 건, 이렇게 말하면 쓰레기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뭘 하든 이해해 줄 수 있는 애들이라서였다.

한서현은 형의 복수를 원하는 네크로맨서였고 김재호는 워낙 비인도적인 일을 겪어 와서 이런 일에 덤덤했으니까.

하지만 정호산은 아니다.

그놈은 날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사실은 그놈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정호산의 손에 피를 묻히느니 저 핏덩어리 같은 애들을 이용하기로 한 게 바로 나다.

으으, 이거 죄악감이 장난 아닌데.

나는 눈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혼낼 마음도 사라졌다. 내게 저놈들을 혼낼 자격이 있나.

결국 이 모든 건 내 잘못인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혹 떼러 갔다가 혹만 붙이고 온 기분인데, 이거. 길드로 돌아간다는 말도 제대로 못 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듣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걸 생각하기에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그래, 내일의 강이신이 어떻게든 다 해 줄 거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끝.”

“예?”

“너희도 이만 쉬어.”

“……저, 그냥 쉬라고요?”

“그래.”

나는 한서현과 김재호를 일으켰다.

“오늘은 여러모로 고생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은 자고 내일 생각해 봐야지.

정호산이 저렇게 나온 이상 대책을 생각해 봐야 했다.

‘역시 망했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죠?’

━그래, 오히려 오해가 커지면 커졌지. 너 다른 데서는 잘만 말하더니 왜 그 친구 앞에서는 그렇게 형편없어진 거냐.

‘원래 제 말솜씨는 그따위였습니다. 괜히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왕따가 아니었다고요. 말솜씨가 좋아진 건…….’

설록진을 따라다니면서 여기저기 아부를 날리기 시작한 뒤다.

‘정호산 앞에서는 차마 그렇게 굴 수가 없어서 말이죠.’

━내가 봤을 땐, 오늘 만남은 차라리 만나지 않느니만 못했다.

레이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오해만 더 키운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일단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긴 했으니, 전보다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마지막에 네놈이 납치되는 걸 보여 주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젠장.’

어쩔 수 없이 조만간 다시 한번 연락해 봐야겠다.

‘끄응, 정말 각범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한번 정하면 누가 때려죽여도 제 생각을 바꾸지 않는 놈이다. 괜히 다른 길드를 두고 그 붉은개 길드에 들어간 게 아니니까.

‘웬만하면 정호산이 생각을 바꾸면 좋겠지만,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하, 각범부 쪽까지 신경 쓰고 싶진 않았는데.’

━도채희, 그 여자랑 같이 움직이는 건 신경 쓰이지 않는 거냐.

‘뭘요.’

━그 여자잖냐, 과거에 정호산을 죽인 사람.

아, 확실히 도채희가 쏜 총알이 정호산을 죽이긴 했지.

‘도채희 씨가 무슨 잘못입니까. 진짜 나쁜 놈은 설록진인걸요.’

새삼 내 친구를 죽였다고 도채희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그 일로 도채희를 원망하는 건, 지나치게 이기적인 생각이지.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던 내가 도채희를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내가 끝내 줄 수 없었던 정호산에게 끝을, 평화를 줬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에서 도채희와 정호산이 함께하는 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다.

전생에 당신이 호산이를 죽인 걸 원망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번 생에도 제발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해줘. 나는 도채희에게 간절히 빌었다.

‘다시는 전생처럼, 호산이를 그놈에게 잃진 않을 겁니다.’

놈이 내 목줄을 쥐고 있었던 건 과거의 일이다.

목줄에서 풀려난 개는, 주인이었던 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생각이다.

‘그 계획에 정호산은 필요 없어요.’

너를 외면하는 게 아니다. 내 계획에 네가 필요하지 않을 뿐. 내 중얼거림을 들은 레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그냥 그 녀석이 못 견디게 걱정되는 것뿐이면서.

* * *

강이신이 들어가고 한서현과 김재호는 거실에 남았다. 자러 가라는 강이신의 말에도 두 사람은 쉬이 방으로 향하지 않았다.

둘 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왜 데리고 오라고 했어? 혼나기만 했잖아.”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서현은 분명히 봤다.

“흔들렸어.”

아주 잠깐이지만, 보스는 분명 그놈의 말에 흔들렸다.

다 때려치우고 오라는 그 말에. 곧바로 말도 안 된다며 웃긴 했지만, 그래도…….

한서현이 조사한 정호산이라는 사람은 너무나도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바벨을 졸업하고, 곧바로 붉은개 길드에 들어가서 승승장구. 그곳의 길드 마스터가 가장 아끼는 각성자가 되어 그대로만 있었다면 붉은개 길드의 핵심 멤버가 됐을 거다.

죄 한 번 지어 보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보스까지 데리고 가는 건 너무하다.

한서현의 걱정에 김재호가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고?”

“응, 보스도 그랬잖아. 그 사람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정호산은 너무 맑고 선하다. 그래서 그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강이신이, 보스가 정호산을 이곳에 데리고 오지 않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래, 어울리지 않아. 그 사람은.”

한서현의 말에 김재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응, 그러니까 여기에 그 사람은 안 와.”

김재호의 말에도 한서현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김재호는 그런 한서현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럴 때의 한서현은 영 불편했다. 말을 해도 듣지도 않고 제 생각에만 빠져 있으니까.

“나는 자러 간다.”

김재호는 그런 한서현을 두고 제 방으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 앉은 한서현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여러모로 열이 받는 사람이었다. 보스가 그렇게 부탁해도 들을 생각도 않고, 계속해서 보스를 곤란하게만 만들지. 하지만 그 사람이 위험해지면 또 보스가 그를 구하러 갈 거다. 그 과정에서 또 다칠지도 모르고……. 아니, 다치겠지. 자기 몸 귀한 줄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멤버가 더 늘어나는 데에는 불만이 없지만, 그 사람은 싫다.

“앞으로도 영원히 만날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또 만나게 되겠지.

“아아, 싫다.”

* * *

“저, 정말 길드를 나왔다고요?”

“네, 말씀드렸잖아요. 각범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가만히 정호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야 환영이지만…….”

참 빠르다고 해야 할까. 그 얘기를 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바로 이렇게 길드를 나와 버리다니.

그렇다면 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말해 줘도 되겠지.

“저번에도 대충 말씀드렸지만, 사실 지금 각범부의 사정이 좋진 않아요.”

도채희는 차분히 각범부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미 각범부는 누군가에 의해 놀아나고 있는 상황이며 제대로 된 수사가 어렵다는 것.

정호산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도채희와 함께인 이상, 각범부 내에 자리를 잡는다는 건 무척이나 힘들 수 있다는 것도.

솔직히 자신조차, 얼마나 더 각범부에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도.

모두 털어놓았다.

“상황이 이렇지만, 정호산 씨를 각범부에서 거절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당장 6성급 헌터시기도 하고…….”

잠재력이 이만큼이나 있는 헌터를 그쪽에서 거절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호산 씨는 각범부에 들어오시는 게 아까울 정도의 인재예요.”

능력 있는 전위를 찾는 길드는 많다. 당장 붉은개 길드만 하더라도 정호산을 무척이나 아꼈고……. 그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들어오기에 각범부는 얼마나 초라한가.

도채희는 주먹을 꼭 쥔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진작에 말씀드려야 했던 건데.”

그 고백을 전부 들은 정호산의 얼굴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더 결심이 섰다는 듯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든, 전 꼭 각범부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전에도 각범부에 합류하고 싶다는 말은 했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는 느낌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도채희의 질문에 정호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곳에 꼭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캐고 싶은 사건이 생겼거든요.”

“뭔데요?”

“음,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죠.”

“뭔가요?”

눈을 굴린 정호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벨츠머츠 구성원 말이에요. 밝혀진 걸로는 세 명이라고 했죠?”

“갑자기 벨츠머츠는 왜요?”

“그냥, 요새 하도 유명하니 여쭤보는 겁니다. 혹시 그 사람들의 사진을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사진이요?”

“모르죠, 혹시 지나가다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개인적으로 찾아보기도 했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건 도통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말을 돌리는 정호산의 얼굴은 왠지 수상쩍어 보였지만, 도채희는 괜히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대신 새로 생긴 조력자에게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음, 잠시만요.”

한때는 거의 집착적인 수준으로 벨츠머츠를 쫓았던 도채희였다. 그때 모아 둔 자료는 여전히 그녀에게 있었다.

“일단 벨츠머츠로 추정되는 사람은 최소 셋이에요. 그중에서 정체가 드러나 공개 수배까지 당한 건 한서현뿐이지만.”

도채희는 사진을 꺼냈다.

리더라고 추정되는 가면 속의 남자, 그리고 한서현. 그리고 호주에서 발견된 한 명. 도채희는 가장 마지막 남자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남자는 그동안 몇 번이나 얼굴이 드러났었죠. 다른 이들과 달리 늘 이 얼굴이었어요.”

그 사람의 얼굴에 정호산의 시선이 박혔다.

“왜 그러세요?”

“아니요, 그냥.”

정호산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얼굴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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