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45 친구 (1)
나는 끌려 나갔다. 소파에 억지로 앉혀진 내 앞으로는 한서현과 김재호가 팔짱을 낀 채로 섰다.
키도 부쩍 큰 녀석들이 사람을 앉혀 놓고 내려다보니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너희도 앉아라.”
한서현과 김재호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머쓱함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처박히는 게 사람이 할 짓이에요?”
기다렸다는 듯이 한서현의 잔소리가 떨어졌다. 그런 말을 하는 한서현의 얼굴은 형편없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이틀은 지났다.
레이의 말에 나는 놀랐다. 이틀이나 지났다니.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것도 같고.
━지금 배가 고픈 게 중요하냐! 저 녀석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틀간이나 네놈을 애타게 기다렸단 말이다.
레이의 말에 나는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렸다.
문짝을 뜯어내고 사람을 끌어와 소파에 앉혀 둔 주제에, 한서현은 제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스가 그렇게 틀어박히면, 우리는…….”
당장 눈물을 쏟아 낼 듯 붉어진 눈가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내가 이런 애들을 두고 뭘 한 거지.
순간 정신이 나가서 그만.
━순간이기는, 저 녀석들이 아니었더라면 며칠이고 그 방에 박혀 있었을 생각이었으면서.
으, 양심이 가루가 될 지경이다.
━걱정하지 마라. 네놈의 콩가루 양심 대신에 내가 있으니까.
나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서현과 김재호를 보고 나서야 나는 내 실수를 깨달았다.
이 애들을 데리고 와서 보호자 노릇을 해 주겠다고 말해 놓고서는, 갑자기 내팽개친 거다.
“미안해.”
“대체 뭐가 미안한데요. 우리한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이틀이나 저 방 안에 틀어박힌 거? 지금도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대충 사과로 얼버무리려는 거?”
으윽, 이거 완전히 버튼을 눌러 버렸는데. 곤란함도 잠시, 곧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래서야 보호자 자격 상실이다.
나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그냥 다.”
김재호 때문에 찾아본 육아 교육서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이들이라고 입을 다무는 건 아이들의 인격 성장에 특히 좋지 않다고 했다. 어리다고 대충 얼버무리지 말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건 해 줘야 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다.
다 아는데, 아는 건데. 정호산이 또 나 때문에 잘못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비겁하게 숨어들었다.
“미안하다. 너희를 내팽개쳐 둬서.”
내 진지한 사과에 한서현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한숨을 푹 내쉰 한서현이 내 발밑에 앉아 말했다.
“이제 이유를 말해 줘야죠. 대체 갑자기 왜 그런 건지.”
한서현의 집요한 시선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요즘 애들은 깐깐하구만,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쟤랑 너랑 4살 차이밖에 안 나는 건 알고 있는 거냐?
‘으음, 거기에 10살 더 얹어야죠.’
14살 차이라니. 새삼 어마어마하군. 그런 어린애한테 추궁당하는 게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해 둬야지.
“그 친구 인생이 나 때문에 망한 것 같아서. 그래서 새삼 정신이 나가 버렸달까.”
“망해요?”
“나 때문에 그 잘난 길드도 그만두고 각범부 같은 쓰레기 부서에 들어갔잖냐.”
━빌런이 정부 기관을 쓰레기 부서라고 말하다니. 그야말로 주객전도 아니냐.
‘뭐, 실제로 쓰레기가 맞잖습니까. 적어도 설록진의 입김이 닿는 동안에는 그렇게 되겠죠.’
설록진이 원하는 건 각성자들이 위험하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 주는 거다. 각범부는 철저히 무능한 기관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각범부나, 정부의 힘으로도 컨트롤되지 않을 만큼 각성자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퍼질 테니까.
위에서는 까이고, 대중들에게는 무능한 인간으로 찍혀서 괴롭고. 자기 힘으로 뭘 해 보려고 해도 이도 저도 안 되고. 이래저래 구를 팔자라는 거다.
차라리 박철완처럼 시키는 대로 넙죽넙죽 할 수 있는 철면피면 모를까, 도채희나, 정호산 같은 타입이 그곳에서 느낄 건 절망뿐이다.
회귀 전의 도채희는 그야말로 처절했다. 박철완이 그의 끄나풀이라는 것도 그때에는 몰랐으니. 가운데에 끼어 몇 번이고 깨지고 부서지고 구르다가, 진실을 알게 된 뒤 절망하는 도채희를 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설록진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걸 알게 된 도채희는 그대로 깨져 버렸다.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빛이라고 생각한 이가 사실은 그 모든 일의 흑막이라는 사실을 견디기엔 도채희는 이미 지나치게 지쳐 있었으니까.
설록진에게는 그녀의 절망 섞인 몸부림조차 하나의 유흥이었다.
그런 자리에 정호산을 던져 넣을 순 없다.
“나 때문이야.”
“그게 왜 보스 때문이에요?”
“나 하나 찾겠다고 그렇게 된 거니까.”
“그 친구요, 보스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면, 아주 친한 사이였을 거 아니에요?”
“그래.”
“그런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쪽에서도 극단적으로 나오는 게 당연하죠.”
자세한 사정은 설명하지도 않았지만, 한서현은 이미 나와 정호산의 사정을 대충 눈치챈 듯 보였다.
하긴, 이 세상에서 한서현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정호산의 감시를 부탁한 건 나였으니, 왜 뒤를 캤느냐는 말도 못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자면 이게 다 보스가 잠수 타서 일어난 일이라는 거잖아요.”
그래도 이런 말을 듣는 건 아팠다. 뼈가 시리다, 시려.
“끄응.”
하지만 내게도 변명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정호산이 행복한 삶을 사는 거다.
그 행복한 삶에 빌런 친구는 필요하지 않잖아.
그러니 사라져 준다.
짜-잔.
얼마나 깔끔한 결론이냐, 이거야.
━전이었다면 네 말을 믿었겠지만, 그 기억을 보니 알겠다. 네 녀석, 그저 두려웠던 거 아니냐?
레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서현이 말했다.
“그냥 무서워서 도망친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두려워? 내가? 뭐가?”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한서현의 시선에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웠다, 사실은.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미치도록 두려웠다.
“대체 그 사람이 뭔데요.”
“내 친구……였던 사람.”
이미 우리의 관계는 오래전에 끊겼다고 생각한다.
전생에 그 녀석은 나와 얽힌 죄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데 내가 감히 그 녀석의 친구라고 할 수 있을 리가.
나와 엮이지 않는 편이 훨씬 행복…….
“아! 답지 않게 땅 파는 것 좀 그만둬요!”
━그래! 이건 너답지 않다고.
이런 대사에는 나다운 게 뭔데! 하고 질러 주는 게 예의지만, 그런 힘도 나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요!”
한서현이 보기에는 퍽 답답하겠지.
그래,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일단 멀쩡한 척이라도 해 둘까.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 순 없으니까.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은가.
“미안했다. 다시 정신 차릴 테니까…….”
내 말에 한서현이 말했다.
“그러지 마요.”
“응?”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지 말라고요.”
“어…….”
이제는 또 멀쩡한 척을 했다고 난리인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뭐든, 도와줄게요.”
한서현이 말했다.
“그렇게 보스가 혼자 끙끙 앓는 거 못 보겠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는 것도 싫어요.”
그렇게 말한 한서현이 김재호의 옆구리를 쳤다.
“나도.”
이거야, 원. 몇 개월간 이 녀석들의 보호자 노릇을 해 온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반대가 된 것 같았다.
“도망친다고 나아지는 일은 이 세상에 없잖아요. 함께 힘을 합쳐서 뭐든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한 건 보스예요, 안 그래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거 맞는 말이네.”
순간적으로 압도적인 절망감을 느끼고 도망쳐 버렸지만, 사실 도망친다고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여기에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도망친다면, 상황은 더 최악이 돼 버리겠지.
나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도망칠 때가 아니었다. 나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으니,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한다.
그걸 위해서는, 그래.
“그 녀석을 한번 만나야겠어.”
내 말에 한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요?”
“그래, 아무래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편이 확실하겠지.”
이 모든 게 내 잠수 때문이라면, 물 위로 올라와 그 녀석을 만나는 게 제일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그래, 어영부영 이러고 있어 봐야 뭐가 달라지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쑥 하고 왼팔이 내려갔다.
내 팔에 원숭이처럼 달라붙은 한서현이 외쳤다.
“그, 그 사람은 도채희 편이잖아요! 도채희는 우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고! 그런 사람을 직접 만나러 간다는 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예요?”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도망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내가 말한 건 물리적으로 도망치지 말라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내 친구 정호산을 잘 안다.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놈은 계속해서 나를 찾아 헤맬 거다.
“만나는 것보다 더 확실한 해결책은 없어.”
━그, 그놈을 만날 생각이냐? 지금 이 상황에?
‘예,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잖아요?’
날 찾겠다고 길드까지 때려치우고 각범부에 들어갈 생각을 해?
가만 생각해 보니 진짜 열이 받는다. 날 찾겠다고 자기 인생을 진창에 빠트려? 누가 그런다고 고마워할 줄 알고? 정말 정호산은, 자기만 아는 바보 멍청이다.
날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그런 거 전혀 바라지 않는다고.
━만나서 뭘 어쩌려고?
“만나서 뭘 어쩌려고요!”
또 한 번 레이와 한서현의 말이 겹쳤다.
“설명하고 부탁해야지.”
사정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너도 네 할 일 하라고 말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호산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온 건 내가 살인 용의자가 된 다음 실종이 됐기 때문이니까.
음, 살아 있다는 걸 알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래! 다시 길드로 돌아간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너 인마, 그거 현실 도피야!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있겠냐!
‘도피라뇨. 도피하는 걸 그만두려는 참에, 무슨.’
나는 한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 친구도 없으면서 그래도 친구 관계에 대해 꽤나 잘 아네. 고마워, 덕분에 도움이 됐다.”
이번에는 도움을 받았다.
제법 진심으로 한 말인데, 내 말에 한서현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부터 빼액 질렀다.
“누, 누굴 친구 하나 없는 찐따인 줄 알아요?”
찐따인 건 모르겠지만, 친구 하나 없는 건 맞지 않나?
내 시선에 한서현이 더욱 날뛰었다.
* * *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요새 하도 어딜 가든 가면을 쓰고 돌아다녔더니,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바깥에 나오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으, 이래서야 가면 성애자라는 말을 들어도 이상할 게 없겠는걸.
━이상한 게 아니라 너는 그냥 그거…….
[정말로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한서현의 무전이 레이의 잡소리를 끊었다. 여전히 날 걱정하는군. 나는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괜찮다니까. 게다가 우르르 같이 몰려가서 뭘 어쩔 생각이야. 벨츠머츠라고 광고할 생각이냐?”
[그건, 그렇지만…….]
“오늘 난 여기 벨츠머츠가 아니라 강이신이라는 한 사람으로 온 거야.”
[그 강이신도 충분히 범죄자인 게 문제인데요!]
정호산은 내 친구다. 설마하니 나를 잡아다가 각범부에 넘기겠어?
━꽤나 믿고 있구나.
‘뭐, 결국 그날 절 보내 준 것도 정호산이니까요.’
이곳에 오기 전 나는 한서현의 도움을 받아 정호산에게 쪽지를 하나 보냈다.
「얘기 좀 하자.
-강이신.」
쪽지를 확인한 정호산은 곧장 이곳으로 왔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공원에서 서성거리는 정호산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놈.’
“다섯 시간 있다가 오라고 했는데.”
곧바로 대기하고 있다니.
나는 인적이 모두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터벅터벅 그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내가 적어 두었던 약속 시간보다도 10분이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정호산은 미련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로 걸어갔다. 놈이 나를 보고 내가 놈을 보았다.
“그동안 잘 지냈냐?”
내 인사말과 함께 터억, 곰이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