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44 떨쳐 낼 수 없는 과거 (2)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 있어야 언젠가 설록진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설록진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설록진은 정말로 나를 제법 아꼈다. 며칠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까 말까 하더니,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찾아온 것은 물론이요, 내 목에 걸려 있던 인식표도 떼어 줬다.
허전해진 목을 쓸어내리는 내게 ‘목이 허전하면 다른 목줄이라도 채워 줄까?’ 하고 설록진이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한 일도 있었다.
평생 나를 옥죄던 목줄을 벗어 던진 기분은, 생각보다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또 다른 주인에게 매인 내 신세 때문일까.
설록진은 내 숙소도 다른 곳으로 옮겨 줬다. 지하 감옥이 연상되던 지하실에서 벗어나 제법 그럴싸한 투룸 아파트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내 우울함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나는 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그냥 조금 더 고급스러운 감옥에 갇힌 죄수일 뿐이었다.
모든 게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지만, 때로는 살아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워지는 날도 있었다.
‘결국 정호산을 죽인 놈에게 빌붙어 살아남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는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구석에 틀어박혔다. 그때마다 설록진은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이렇게 우울하게 처박혀 있어서야 대체 언제 나에게 복수를 하겠어?”
“그렇게 날 도와주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창문 바깥에 떨어져서 죽지 그래? 그럼 아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내 말에 설록진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농담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놈이 죽어 주면 나 또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설록진이 내게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몇 번이나 설록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경호원을 대동한 데다가 아티팩트로 무장한 설록진을 죽일 방법은 없었다. 죽이기는커녕, 제대로 된 상처 한 번 내 본 적이 없다.
그때마다 설록진은 내게 혀를 찼다.
“나에게 복수하랬지, 자살하러 뛰어들라고 한 적은 없는데.”
이런 일차원적인 방법으로는 설록진을 죽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나 있나. 어차피 나는 이 방 안에 갇혀 있을 뿐인데.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설록진은 나를 왜 살린 걸까. 자신에게 복수의 칼날을 가는 부하 놈을 거둬 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나는 여전히 설록진을 증오했고 놈을 죽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머리가 식었다.
그리고 차가워진 이성은 내게 이 상황이 모두 말도 안 된다고 외쳐 댔다.
그래, 말이 안 됐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삐딱하게 벽에 기대서서 그렇게 묻는 내게 설록진은 피식 웃기만 했다.
“존대하려면 존대를 하고, 반말하려면 반말을 해. 그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는 뭐야.”
“대답이나 하지 그래?”
내게 놈의 능력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겨우 그런 이유로 나를 살려 뒀다고? 살려 둔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따로 인력을 배치해서 나를 감시하고, 살아가게끔 도움을 준다고?
도저히 이해 못 할 상황이다.
내게는 그래서 이유가 필요했다.
내 원수와도 같은 놈이 나를 굳이 살려 두는 이유.
나는 몇 번이나 설록진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설록진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될지를 생각해야지. 그래야 언젠가 내 뒤통수를 치고 나에게 복수란 걸 할 수 있지 않겠어?”
놈의 휘어진 눈동자에 나는 깨달았다. 이놈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다고.
그냥 놈을 아무런 상식도 통하지 않는 사이코패스, 쾌락주의자 따위로 이해해야 한다는 걸.
놈은 나를 그저 장난감으로 보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내가 특별하니 뭐니 한 건, 내가 그만큼 특별한 장난감이라는 뜻일 거다. 모든 게 뜻대로 되는 놈에게, 나라는 장난감은 퍽 새로운 모양이니까.
놈의 악취미에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었다.
그래, 그렇게 방심하고 있어라. 언젠가 네놈의 목을 콱 물어 줄 테니까.
그날 설록진은 나를 끌고 어떤 건물로 향했다. 빌딩 지하로 내려간 설록진은 여기가 어디냐는 내 질문에도 도통 대답하지 않았다.
‘날 가지고 노는 것도 지겨워진 건가. 하긴, 반응도 뭣도 없으니 재미가 떨어질 만도 하지. 그래서 이제는 날 죽일 생각인가?’
그래도 뭐, 어쩔 수는 없지. 나는 가만히 입을 닫고 놈을 따랐다. 차라리 이렇게 돼서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과 함께.
설록진과 내가 도착한 곳은 웬 취조실처럼 생긴 방이었다.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둔 반대쪽 방에는 한 남자가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 있었다.
내가 걱정한 것처럼 실험실로 끌려온 것은 아니었지만, 심상치 않아 보이는 방 분위기에 내 몸은 긴장감으로 굳었다.
“저 사람은, 뭐야.”
유리창 너머로 우리가 훤히 보일 텐데도 남자는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매직미러인가, 뭔가 하는 그런 건가.
대체 나는 여기에 왜 데리고 온 건지.
“그래도 밥값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밥값이라니.”
“말했잖아, 난 너를 나름대로 아껴 줄 거라고. 하지만 그만큼 너도 나에게 해 주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나는 주먹을 쥐었다. 잘도 그런 말로 나를 꼬여 내려고 하는군. 뭘 시킬 생각이든 무조건 싫다고 해야지.
내 반항적인 눈빛에 설록진이 말했다.
“싫으면 마.”
“하, 당연히 싫…….”
“그곳에서 평생 갇혀 지낼 생각이라면.”
그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에서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 집에서 나가게 해 줄 거라는 거야?”
“그래. 대신 약속해 줘. 이왕 해 보는 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성실하게 해 보겠다고.”
설록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모르겠지만, 근 한 달을 갇혀 있었더니 죽을 지경이었다.
당장 저놈을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나는 꼭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럼 뭘 하면 되는데.”
내 질문에 설록진은 방 안에 묶인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간단해. 네 재능으로 저걸 속여 봐.”
저거라니, 사람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참 못된 호칭이었다.
그나저나 저걸 속여 보라니. 내 재능을 이용하라는 말을 한 걸 보니 거짓말을 하라는 뜻이겠지.
“어떤 거짓말을 하라는 건데?”
“흠, 글쎄.”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린 설록진이 말했다.
“그건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생각 안 해 봤다니.”
내 원망 섞인 시선에 설록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넌 지금 여기가 무척이나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보기만 해도 겁에 질릴 만큼 새하얀 방 안에, 그것도 저렇게 사지를 결박해서 묶인 사람한테 ‘넌 무척이나 편안하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지금도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 대는 사람한테?
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불가능해.”
“해 보지도 않고?”
“해 보지 않아도 알아.”
내 거짓말은 설록진의 능력과는 다르다. 이미 저렇게 겁을 집어먹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능력은 당신처럼 만능이 아니라고. 저런 상태면 무슨 거짓말이든 통하지 않을 거야.”
거짓말이든 뭐든 말이 통하는 상대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대화가 통할 대상이 아닌 사람에게는 애초에 말을 제대로 붙일 수도 없다.
“흠, 알겠어. 애초부터 세팅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설록진의 동공이 노랗게 물들었다. 동시에 내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뭘 하려는 거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내가 외쳤을 때였다. 총을 꺼낸 경호원은 그대로 의자에 묶인 남자의 머리에 총을 갈겨 버렸다.
“허억.”
눈앞에 튀는 핏물에 나는 숨을 삼켰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사, 사람을 죽였어?
설록진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신중히 준비해 두도록 할게.”
“이게,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네가 말했잖아. 불가능하다고.”
“저, 저 사람은 왜 죽인 건데!”
“아, 이래야 네가 다음에는 조금 더 열심히 할 것 같아서?”
톡톡 내 볼을 두들긴 설록진이 말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하기 싫다고 곧바로 때려치우면 안 돼?”
* * *
다음 날, 예의 건물로 나를 끌고 가는 설록진에게 나는 빌듯 애원했다.
“나는, 나는 못 해.”
누군가를 시야에 담는 것만으로 그를 완벽하게 세뇌해 버리는 설록진과 달리, 내 능력은 허접하기만 하다.
겨우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은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야 먹힌다. 그 사람과의 공감대 형성도 중요하고, 상황도 중요하단 말이다. 이런 삭막한 취조실에서는 통할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거다.
게다가 내 행동에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선, 나 또한 제대로 된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내 말에 설록진이 말했다.
“이왕 해 보는 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성실하게 해 보겠다고, 네가 네 입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그때에는 나 때문에 누가 죽는다는 걸 몰랐으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준비해 놓은 사람들을 다 치워 놓는 수밖에.”
“잠깐, 준비해 놓은 사람들이라고?”
몇 명이나 더 있는 거야.
게다가 내가 하기 싫다고 말하면 그 사람들을 죄다 죽여 버릴 생각인가? 아니, 생각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겠지.
“네가 열심히 해 준다고 해서 신이 나서 많이도 준비했는데, 안타깝게 됐지.”
그렇게 말하는 설록진은 내 반응을 살피며 웃고 있었다.
이 개자식.
“잠, 잠깐!”
나는 설록진의 팔뚝을 잡았다. 소름이 오스스 돋지만, 당장에라도 무슨 짓을 벌이려던 설록진을 말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해 볼게.”
나는 설록진을 향해 간절히 말했다.
“해 볼 테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에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는 건 싫다.
절대로, 절대로 싫다.
하지만 어떻게?
내 거짓말로 정말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내 얼굴을 살핀 설록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번이나 네 능력을 써 봤어?”
설록진은 목을 툭툭 두들겼다.
“개 목걸이를 찬 상태에서는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을 텐데.”
각성자는 모두 의무적으로 인식표를 착용해야 했다. 아카데미에서야, 특정 상황에 목걸이를 벗어 둘 수 있었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도 나는 내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졸업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내 능력을 쓰지 않았고.
왜냐고?
난 내 능력을 끔찍이 싫어했으니까.
내 몸에 흐르고 있는 마력을 다른 쪽으로 사용하려고 해 본 적은 있지만, 거짓말이라는 내 능력을 갈고닦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인 몬스터에게는 통하지도 않는 데다가, 거짓말을 해 보겠다고 적을 앞에 두고 입이나 터는 꼴이 우스워서.
“정말로 할 수 없는 거야? 아니면, 해 보지도 않은 거야?”
설록진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열심히 해 보지도 않고 못 하겠다고 도망치는 거야, 또?”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되 설록진에게만큼은 도망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깨끗하게 치워진 방에 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반들거리는 거울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설록진을 생각했다.
“당신은, 당신은…….”
온 힘을 다해 봤지만, 내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이미 상황을 눈치채고 나를 보며 덜덜 떠는 남자는 내 말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남자에게 말을 붙여 보았지만, 실패였다.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한 대가는 어제와 같았다. 나는 벽에 튄 핏자국을 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대체 왜…….”
설록진은 내게 말했다.
“사람은 압박감이 조금 있어야 능률이 좋아지기 마련이거든.”
겨우 그걸 위해 사람들을 죽여 대는 거라고.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날 죽이는 게 어때? 이만하면 재미는 다 보지 않았어?”
나는 이미 희망을 잃었다. 나처럼 약해 빠진 놈이 어떻게 설록진에게 복수를 하겠어. 내 재능 하나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놈인데.
나를 절망에 빠트리려고 했다면 성공이다.
“재미라니.”
내 턱을 들어 올린 설록진이 나와 눈을 맞대며 말했다.
“나는 널 도와주려는 거야.”
“날 도와주려는 거라고?”
“아까운 재능을 썩히고만 있잖아.”
아까운 재능이라. 겨우 남을 속이는 거짓말 따위가?
“내 생각에 네게 필요한 건, 조금 더 간절해지는 거야.”
그리고 다음 날, 설록진은 날 정말로 간절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