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32화 (132/352)

제132화

#43 누군가의 결심 (3)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정호산을 마주한 김명철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달았다.

지금 그의 하늘은 무너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호산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정중한 인사도 반쯤 집을 나가 버린 김명철의 정신을 되돌리진 못했다.

“대, 대체에…….”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김명철은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길드를 나가게 해 달라는 부탁만 아니었더라도 무슨 부탁이든 전부 다 들어줬을 텐데. 왜 하필 네가 바라는 게 그거란 말이냐.

정호산의 얼굴을 보며 김명철은 혀를 찼다.

정호산의 눈빛을 본 순간, 정호산의 생각을 꺾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걸 다 결정해 둔 거다.

저런 눈을 한 놈을 어떻게 말려.

게다가 정호산이 가려는 길이 아주 글러 먹지 않았다는 게 또 문제다. 정호산은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김명철은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한 줄로 압축했다.

“네 친구라던 그 녀석 때문이냐.”

결국 정호산은 자신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 적어도 그놈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 길드를 나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정말 원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히 그때 친구를 찾아 준다고 오지랖을 부려서는, 일을 이렇게 망치고, 그다음으로는 정호산까지 잃게 되었으니.

차라리 실종된 채로 두었다면, 물론, 그래도 그놈 뒤를 어떻게든 쫓겠다고 난리였겠지마는 이런 식으로 각범부에 들어가겠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오히려 어떻게든 붉은개 길드에 붙어 있었겠지. 각범부보다는 길드의 헌터로서 이룰 수 있는 게 훨씬 많으니까.

하지만 각범부의 사람과 헌터로서는 할 수 없는 수사를 하겠다고 나선 이상, 더 이상 잘나가는 길드의 1군 헌터라는 명패는 정호산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 돼 버렸다.

김명철의 원망에 정호산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아시잖아요. 그때 이후로 제가 길드 일에 전혀 집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

그 말에 김명철은 또 한 번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확실히 강이신을 그렇게 놓쳐 버린 날 이후로 정호산은 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큰일이 날 것 같았기에 고등급 게이트에서는 아예 정호산을 배제했고, 저등급 게이트에도 쉬이 보내지 않았다.

훈련실에 처박혀 고강도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에는 이 시간을 스스로를 갈고닦을 기회로 여기나 싶어 차라리 다행이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시간 동안 정호산은 다른 길을 걷기로 해 버렸다.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이 이러할까.

김명철은 차마 어떤 말도 쉬이 내뱉지 못하고 앉은자리에서 팔짱만 꼈다 뺐다를 반복했다.

온몸을 이용해서 요란하게 ‘나 지금 불편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김명철을 바라보며 정호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 길드에 들어오기로 한 이유는 알고 계시지요.”

“그래.”

김명철은 예전 일을 떠올리며 쓴 미소를 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정호산이라는 인간에게 자신의 인생을 베팅할 결심을 한 것도 그 이유라는 놈이 그의 심장을 울렸기 때문이니까.

“마스터께서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 길드를 만들었다고 하셨잖습니까.”

헌터들이 모여 만든 길드는 저마다 다른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

누군가는 게이트 공략 자체에 희열을 느끼고, 누군가는 게이트로 인해 얻는 부에, 누군가는 자신의 스타성을 빛내기 위해.

그중 김명철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길드를 이끌어 나가겠다고 외친 사람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을 모두 게이트 브레이크로 잃은 직후였다.

힘이 생기면 다시는 이런 일을 두고만 보지 않을 거라고, 김명철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정호산 또한 그랬다.

아주 어린 시절 가족을 잃었을 때, 결심했다. 자신에게 힘이 생긴다면 절대로 약자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이 길드를 들어오고 싶다고.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정호산을 본 순간 김명철은 자신을 똑 닮은 이 꼬맹이를 어쩌면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돼 버렸을지도 모른다.

정호산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제 힘을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연하죠, 그런 결심을 하고 나서 받은 힘이니까. 누군가, 저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힘을 줬다고 생각했죠. 이 세상을 구하는 데에 힘을 보태라고.”

붉은개 길드는 정호산의 뜻을 펼치기에 가장 알맞은 길드였다.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앞장섰고,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해외 파견도 가장 잦은 편이었다.

재난 현장에 제일 먼저 찾아가는 것도 붉은개 길드였다.

확실히 붉은개 길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세워진 길드답게, 수많은 이를 구했다.

“이번 일로 알았습니다. 게이트를 공략하고, 몬스터를 잡는 것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내 징벌하는 일 또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될 수 있겠다고요.”

“호산아.”

김명철은 답답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네 일이 아니다. 헌터로 사는 것과 그 길을 걷는다는 건 전혀 다른 일이야.

그 길은 너처럼 좋은 놈이, 재능도 많은 놈이 갈 만한 길이 아니야.

그러나 그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김명철 또한 자신에게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며 꿋꿋하게 가시밭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하아, 나를 가장 닮은 놈이라 그리 아낀 것인데. 나를 가장 닮은 놈이라 결국 떠나 버리는구나!”

김명철의 하소연에 정호산은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됐다, 그리고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무슨 마스터냐. 길드까지 나가겠다고 했으면서.”

“계속 형님이라고 불러도…….”

“그럼! 당연히 되지. 길드에서 나간다고 영원히 나랑은 모르는 척을 할 생각이냐? 참 답답하고 고지식한 놈이라니까.”

김명철의 말에 정호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김명철의 말이 허락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길드에서 받은 건 모두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얼마나 한다고. 그냥 갖고 가라.”

“예?”

“됐다니까, 그냥 갖고 가!”

정호산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는 그냥 저렇게 턱 하고 줄 만큼 값싼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마저 거절했다가는 아예 계속해서 붙잡아 둘 기세였다.

“그리고 언제라도 돌아오고 싶으면, 혹여나 그 세상에서 네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 붉은개 길드는 널 언제나 환영할 거다.”

김명철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길드 가면 그때는 정말 화낸다?”

* * *

정호산과 도채희가 만났다는 소식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두 사람이 왜 만나? 전처럼 내 사건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도채희가 정호산을 만난다는 건 절대로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었다.

나는 그 소식에 다리만 덜덜 떨었다. 하필이면 두 사람이 만난 곳이 한서현의 ‘쥐’로는 출입이 거의 불가능한 프랜차이즈 카페였기에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들리는 소식에 나는 기함했다.

정호산이 붉은개 길드를 나왔단다.

도채희와 함께 움직이기 위해서.

“미친 거 아니야.”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바짝 굳어 버렸다.

━오, 네 친구가 정말로 너를 찾고 싶은 모양이다.

레이의 웃음기 섞인 말에 반응할 정신도 없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저 녀석과 연을 끊었는데, 잘 다니던 길드마저 때려치우고 각범부에 들어간다고?

각범부는 설록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정호산은 놈의 표적이 돼 버릴 거다. 그것도 아주 먹음직스러운 표적.

솔직히 말해서 내가 도채희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에 대한 미묘한 죄책감 때문이다.

도채희는 가장 앞에서 모든 어그로를 끌어 줄 훌륭한 방패이자 설록진을 끌어낼 미끼였으니까.

앞으로 온갖 역경이란 역경은 다 겪을 테고, 시련이라고 이름 붙이지도 못할 일이 그녀에게는 수없이 일어날 거다.

이번 일로 완벽히 박철완의 눈 밖에 나 버렸으니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괜찮아질 일은 없을 거라고.

난 그걸 알면서도 방치할 생각이었다.

왜냐?

도채희의 존재가 내겐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 옆에 정호산이 같이 선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앞으로 설록진과 맞서 싸우는 최전선이 되어야 할 각범부에 정호산이 들어간다니.

말도 안 돼.

그래,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건.

내가 뭣 때문에 그 녀석과 연을 끊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건데.

나 혼자만 살 생각이었다면 진즉 몸을 뺐을 거다.

애초에 내가 이 세계를 한번 멸망에서 건져 보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한 것도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정호산. 내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다.

나 때문에 비참하게 죽었던 그 녀석에게 행복한 삶이라는 걸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근데 이게 말이 되나?

정호산, 그놈을 구해 보려고 이 짓거리를 벌였는데, 결국 또 내 행동으로 녀석이 제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고?

“보스?”

한서현이 나를 당황한 얼굴로 바라봤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도대체 왜?

왜 그 자식은 또 자신의 목숨을 나 때문에 던지려고 하는 걸까.

대체 내가 뭐라고.

말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 녀석의 앞에 나타나서 지금 네가 하는 건 머저리 짓이라고 말해? 그럼 그 녀석이 내 말을 들어줄까?

아니, 그 앞에 나설 수나 있나?

난 이미 그 녀석에게 범죄자일 뿐 아닌가. 사람을 죽이고, 그보다 더 나쁜 짓을 저지르고, 온갖 짓을 다 했는데.

이미 정호산이 기억하는 좋은 친구 ‘강이신’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데 그 녀석의 앞에 나서라고?

안 돼.

“보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그 녀석이 그놈의 목숨을 앗아 갈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거다.

또,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잖아, 그냥, 그냥…….”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놈 하나만 행복하길 바란 건데.

정호산은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고 멋진 삶을 누려야만 한다. 붉은개 길드의 후계자가 되어 김명철 마스터에게 사랑이나 쭉쭉 받다가, 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멋진 헌터가 되어 빛나야만 했다.

전생에서처럼 비참하게 죽는 건, 그건 안 돼.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나는 나를 붙잡는 한서현의 손을 뿌리쳤다.

“보스?”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한서현이 보였지만, 지금 당장은 저 녀석을 신경 쓸 여력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서현에게서 뒷걸음질을 친 나는 내 방으로 기어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허억, 헉.”

어느새 땀범벅이 된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자,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왜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구는 건데.

“애초에 회귀했다고 나댄 게 문제입니다. 뭐라도 바꿀 수 있다고 믿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고요.”

━무슨 일이든 척척 해냈던 주제에 왜 갑자기 이런 약한 소리를 하는 거냐?

“하.”

정호산이 엮이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안 된다.

정호산만큼은.

그 녀석은 절대로 잘못돼서는 안 되니까.

답답함에 욕이 튀어나왔다.

“그냥 날 모르는 체하고 자기 잇속을 챙기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냥 자길 예뻐해 주는 길드 마스터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나만 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는데.”

왜 나 같은 친구를 찾겠다고 그 모든 일을 저지르는 걸까.

━그만큼 네 녀석을 아끼는 거겠지.

그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저에게는 그럴 가치가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이미 정호산이 아끼던 강이신은 죽었는데, 이미 누군가에게 짓밟혀서 사라진 지 오래인데.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설록진의 목소리가 뇌리로 파고들었다.

“아, 빌어먹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잊은 지 오래됐다고 생각한 악몽이 다시 선명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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